"한국에서 내려진 정치적 결정에 관여하지 않는다. 한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민주주의 역사가 있는 나라의 하나다. 모든 분쟁과 차이, 정치적 차이가 법의 지배에 따라 평화롭게 해결되는 게 매우 중요하다. 며칠 안에 윤석열 대통령과 대화할 걸로 예상한다." (4일,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
"(한국의) 계엄 선포는 우리에게 깊은 우려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이후에 전개된 사건들이 한국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는 과정과 절차를 보여줬다. 우리는 계속 공개적 목소리를 내고 한국 대화 상대들과 소통할 것이다." (4일,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한국 엘리트는 안보 위기가 발생하면 곧바로 미국으로 달려간다. '이른바 보수'를 중심으로 한사코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를 반대하는 까닭이다. 민주주의의 위기에 봉착해도 미국을 바라본다. 한국 민주주의의 '안전판'으로 미국을 바라보는 것이다. 대통령 윤석열의 뜬금없는 비상계엄 선포와 해제를 거치면서 나라가 흔들리자 다시 미국발 발언을 경청한다. 언론이 발 빠르게 전하고, 일부 야당 정치인들까지 나서 "미국이 지켜보고 있어서 제2의 비상계엄은 없을 것"이라고 낙관한다. 한 발 떨어져 생각해 볼 대목이다.
많은 이들을 안심시킨 발언은 '심각한 우려'를 표명한 커트 캠벨 국무부 부장관에게서 나왔다. 캠벨 부장관은 워싱턴에서 열린 포럼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오판으로 선포한 비상계엄의 과정은 심각하게 문제가 있고, 불법적이다"라며 "그러나 이에 반대한 국민적 의지가 다소 안심을 준다"고 말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 때부터 '아시아 차르'로 불려 온 캠벨은 미얀마의 민주화 조짐에 환호작약했다가 2021년 군사독재 귀환 뒤 입을 다물고 있는 인사이다. 조 바이든 행정부의 반응을 요약하면 계엄은 불법이지만, 국민과 국회가 해제함으로써 민주주의 '회복력'을 보였다는 평가다. 계속 지켜보며 한국 관리들과 대화하겠다고도 강조했다.
그런데 12.3 비상계엄이 성공했다면 미국의 반응은 어땠을까. 역대 미국 행정부는 5.16 군사쿠데타나 12.12 군사 반란에도 우려를 표명했다. 그러나 성공한 쿠데타 군부를 신속하게 인정하고, 대화 파트너로 삼았다. 동아시아 군사전략의 하위 파트너로 머리를 맞댔고, 통상 문제에서는 철저하게 주판알을 튕겼다. 관망자이자, 평가자의 역할에 그쳤다. 수호천사와는 거리가 멀다. 미국의 태도를 결정하는 계기는 민주주의 가치가 아니었다. 계엄령이나 쿠데타의 성공 여부가 더 중요했다. 4일 새벽 계엄군이 국회와 중앙선관위를 신속하게 장악하고 여야 지도부와 일부 언론인을 체포했다면 미국은 우려를 표명하고, 외교적 압력을 넣었겠지만, 결과를 현실로 인정했을 게 분명하다. "한국 내 정치적 결정에 관여하지 않는다"라는 블링컨의 첫마디에 단서가 있다.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 결과에 큰 의미를 두지 않을 것이다.
미국이 가장 걱정하는 대목은 한국의 혼란이 한반도와 동아시아로 확대되는 거였다. 독재정권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 강력할 때 미국이 취한 유일한 행동은 1960년 5월 29일 이승만의 하와이 망명을 주선한 거다. 중앙정보국(CIA)가 도움을 제공했다. 이는 한국 민주주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혼란의 싹을 제거하려는 의도에서였다. 국무부는 12.3 비상계엄 이후 한국을 여행자제 4단계 경고 중 1단계로 유지하고 있다. 유사시 주한 미 대사관의 신속한 도움을 받도록 여행자등록을 권고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정부수립 뒤 40여 년 지속된 독재에 항거한 기억, 5.18 금남로, 다시 일어나 거리로 나왔던 기억을 켜켜이 간직하고 있는 나라다. 2016년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촛불혁명으로 평화적 정권 교체를 이룩한 건 세계의 부러움을 샀다. 반독재, 반정부 투쟁은 물론 촛불혁명이 성공한 건 수호천사 덕분이 아니었다. 국민적 각성과 행동이 쌓아 올린 금자탑이다. 불과 8년 전 23차에 걸친 광화문 촛불집회 끝에 박근혜가 구속되던 시점, 세계은 열광했다. 그 기억이 채 가시지 않은 대한민국에서 외국 수호천사에 연연하는 건 웃픈 현실이다.
미국은 더 이상 민주주의 모범국이 아니기도 하다. 2021년 1.6 의사당 폭동을 공개적으로 사주한 이를 다시 대통령으로 뽑은 나라다. "미국의 영혼을 지키자"며 취임했던 바이든 대통령이 뜬금없이 주최한 민주주의 정상회의는 한바탕 에피소드로 끝났다. '가치 외교'를 표방했던 이가 대한민국 대통령이다. 지난 3월 20일 '미래세대를 위한 민주주의'를 주제로 열린 제3차 정상회의의 의장으로 연단에서 "세계 도처에 여전히 권위주의와 반지성주의가 고개를 들고 있다"라면서 "이러한 도전에 맞서는 우리의 사명과 책임이 그 어느 때보다 막중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신파도 이런 신파가 없겠다.
7일 오후 대통령 윤석열에 대한 탄핵 결의안 투표를 앞둔 여의도에는 헤아릴 수 없는 국민이 몰려 "반란 수괴를 처단하라"며 함성을 지르고 있다. 당초 집회 신고 규모 20만 명을 훌쩍 넘어 100만 명에 달했다. 여의도는 물론, 대방동, 마포 등지의 지하철 역사 안에 인파가 빠져나오지 못했을 정도다. 오후 5시 국회 본회의에서 '김건희 특검법' 재의결이 세 번째 부결된 뒤 '대통령 탄핵 소추안' 표결이 국민의힘 의원들의 집단 거부로 4시간이 넘도록 끝나지 않는 동안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언땅을 떠나지 않고 있다. 바로 민주공화국의 주권자들이자,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진정한 수호천사들이다.
기회 있을 때마다 "미·한 동맹은 철통(iron-clad)같다"라면서 한국 민주주의를 상찬하던 바이든은 비상계엄 사태 이후 꿀 먹은 벙어리다. 어쩌면 상황이 정리된 뒤에야 한마디 할 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국회의 대통령 탄핵 표결 이후를 고민할 시점이다. 촛불혁명의 성공과 실패의 요소를 톺아보고 우리 안에서 '힘'을 찾는 게 먼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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