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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은 미국 대선

칼럼/경향의 눈

by gino's 2012. 9. 10.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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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호 논설위원


 

감동은 줄고, 숫자는 늘었다. 희망이 사라진 자리에는 정파싸움만 남았다. 먼저 숫자를 들먹인 것은 빌 클린턴이었다. 지난주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럿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연단에 선 그는 최근 반세기여 동안 민주당 대통령 재임 시 창출된 일자리가 4200만개로 공화당 대통령 재임 28년의 2400만개보다 많았음을 상기시켰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초라한 경제성적표를 두둔하기 위해 고안한 숫자놀음이었다. “나를 포함한 어떠한 대통령도 미국 경제를 4년 만에 치유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도 단언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빌 클린턴 전 대통령 (경향신문DB)



숫자로 표시한 실적에서 클린턴은 대표적으로 성공한 경제대통령이었다. 로널드 레이건과 아버지 부시의 집권 12년을 거치면서 부실재정을 물려받은 클린턴은 집권 마지막 3년 동안 매년 690억~2360억달러의 재정흑자를 기록했다. 숱한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퇴임 무렵 68%의 높은 지지율을 받은 비결이다. 2300만개의 일자리를 창출했다. 하지만 클린턴의 성공조건이 오바마에게 적용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미국은 클린턴의 퇴임 뒤 축제가 끝날 무렵 발생한 9·11테러와 곧이은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테러와의 전쟁 및 부자감세안 탓에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클린턴 행정부에서 7500달러가 늘었던 노동자 연평균수입은, 부시 행정부에서 되레 2000달러 줄었다. 2008년 서브프라임모기지 파동 이후 급격히 악화된 국가부채는 16조달러를 넘어섰다. 작년엔 신용평가기관 스탠더드앤드푸어스에 의해 사상 처음 트리플A 등급을 강등당할 정도로 만신창이가 됐다. 하지만 그 책임의 한 축은 클린턴 행정부 당시 심어놓은 세계화의 폐단에 있었다. 클린턴의 성공은 상당 부분 IT와 부동산 버블 및 월스트리트에 의존했다. 우후죽순처럼 각종 파생금융상품이 생겨나면서 구현된 카지노 자본주의의 전성기에 거둔 경제성적이다. 미국은 더 이상 거품경제를 일으킬 거리를 찾지 못하고 있으며, 유럽 재정위기와 맞물려 경기침체국면은 장기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작금의 미국 경제가 클린턴이 돌아와도 결코 회복하기 힘든 까닭이다.


4년 전 ‘새로운 책임의 시대’를 강조하면서 안으로 성찰을 강조하던 오바마가 시선을 밖으로 돌린 지는 오래다. 2년 전 가을 도쿄의 산토리홀에서 아시아를 상대로 미국에 상품을 수출하기보다는 미국 상품을 더 사라고 다그쳤던 데서 벗어나지 않았다. 오바마가 지난주 후보수락 연설에서 밝힌 경제구상의 핵심은 미국 내에서 더 많은 제품을 만들고, 해외 아웃소싱은 줄이겠다는 것이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수출을 배가하겠다는 다짐도 되풀이했다. 자유무역협정(FTA)으로 수출환경이 개선된 것을 치적으로 꼽았다. 그가 말하는 숫자는 단위가 다르다. 재임 2년 반 동안 제조업 부문의 일자리가 50만개 늘었고, 재선되면 향후 4년간 100만개를 더 만들어내겠다는 것이 경제공약의 앞부분에 배치됐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등 2개의 전쟁에 쏟아부었던 재원을 국내로 돌려 “바로 여기(미국)에서 국가 만들기(nation building)를 하겠다”고 다짐했다. 경제·사회·정부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은 제3세계에 적용하던 국가 만들기를 하겠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만큼 미국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오바마는 “실수에서 배워가며, ‘머나먼 지평선’에서 눈을 떼지 말자”는 말로 상당기간 녹록지 않은 세월이 이어질 것임을 예고했다. 


공화당 대선후보 미트 롬니 역시 “1200만개의 일자리를 만들겠다”면서 숫자를 강조했다. 하지만 미국 역사상 평화 시 최장기간의 호황을 일궈낸 클린턴이 8년간 만든 일자리의 반 이상을 4년 동안 만들겠다는 그의 약속은 실현 가능성이 더욱 희박한 것 같다. 성공한 기업가 출신이지만, 그 성공은 이미 밑천을 드러낸 금융공학으로 이뤄진 것이다. 여전히 부자감세안과 친기업정책을 주문처럼 읊고 있다. 


이데올로기적으로 클린턴의 성공은 전통적인 민주당과 공화당의 중간쯤을 겨냥한 제3의 길 덕이었다. 새로운 민주당원(뉴뎀)을 기치로 내걸고 공화당 진영에 표를 던졌던 ‘레이건 민주당원’들을 다시 품었다. 하지만 보수적인 티파티 운동 세력이 건재하는 한 민주당이 공화당과의 중간지대를 찾기는 쉽지 않다. 되레 공화당 중도파 롬니가 우경화 쏠림에 편승하고 있다. 오바마와 롬니는 재정적자와 8%대 실업률의 원인을 두고 서로 책임 떠넘기기에 코가 빠져 있다. 한쪽이 백악관과 의회를 모두 장악하지 않는 한, 정리되지 않을 논란이다.


성장담론이 거셌던 2007년 한국 대선에서 유권자들은 ‘부자 아빠’의 꿈에 더 가까워 보이는 후보를 선택했다. 이번 대선은 2008년 미국 대선처럼, 세계화가 만들어낸 온갖 거품이 꺼진 뒤 치러지는 첫 대통령선거다. 경제민주화가 시대정신으로 부각됐다지만 돌이킬 수 없는 흐름으로 이어질지는 불투명하다. 4년 전 오바마가 지폈던 미국의 희망은 희미해졌다. 우리의 희망은 누가 풀무질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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