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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의 딸 3-피노체트와 박정희 그리고 그 딸들

칼럼/경향의 눈

by gino's 2012. 7. 9.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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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호 논설위원

 

 

 

가매장한 역사는 반드시 동티를 낸다. 지난달 10일 지구 반대편 칠레에서는 어설프게 묻어두었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역사가 푸르딩딩하게 되살아났다. 수도 산티아고 데 칠레의 카우폴리칸 극장에서 반대파를 고문, 투옥, 살해했던 피노체트의 집권 17년을 재평가하는 다큐물을 상영하는 행사를 가진 게 화근이었다. 피노체트와 함께 민주선거로 집권한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을 1973년 9월11일 탱크를 앞세워 전복했던 칠레군 장교들이 결성한 ‘9월11일회’가 주도했다. 카우폴리칸은 피노체트의 대통령 재임 당시 민주세력들의 집회장소였다. 반독재 투쟁의 상징적인 공간에서 피노체트 추모행사가 열리는 것을 막기 위해 민주화운동 유가족들을 비롯, 4000여명이 상영 중단을 시도했지만 진압경찰의 완력에 분루를 삼켰다. 피노체트가 권좌에서 쫓겨난 이후 처음으로 2010년 보수우파 정권이 들어서면서 예고된 일인지도 모른다.

 

행사에 참석한 피노체트 지지자들이 “우리 목숨을 그에게 빚졌다. 좋은 대통령이었다” “(피노체트가 무너뜨린) 아옌데 정부 때는 설탕조차 제대로 맛보지 못했었다”면서 경제발전의 공으로 ‘더러운 전쟁’의 과를 덮는 발언을 했다고 하니, 한국이나 칠레나 기득권층의 과거회귀 논리는 별 다름이 없는 것 같다. 역사적 진실에 엉뚱한 해석을 붙이는 것도 비슷하다.

 

피노체트와 박정희는 정치적으로 일란성 쌍생아다. 성공한 쿠데타에 이어 경제발전을 이뤄냈다는 점에서 그렇다. 각각 17, 18년 동안 독재권력을 움켜쥐면서 전국에 고속도로를 건설했으며, 각각 자기 나라가 제3세계 경제권에서 도약할 기반을 만들었다. 하지만 피노체트가 아무리 공이 있다고 한들 3095명의 시민이 피살 또는 실종되고 4만18명이 고문·투옥됐으며, 50여만명이 망명을 떠나야 했던 ‘더러운 전쟁’을 꾸밀 명분은 없었다. 박정희 역시 북한의 위협을 빌미로 숱한 관제 빨갱이를 양산하고, 지역감정을 덧들이면서까지 전국을 공포사회로 몰아넣을 필요는 없었다. 두 사람 모두 경제발전보다는 권력을 위한 권력을 지키기 위해 숱한 악행을 저질렀다.

 

애국가 부르는 박근혜 l 출처:경향DB

 

피노체트 추모행사라는 어찌 보면 사소한 일에 산티아고 시민들이 분노한 것은 역사적 해원(解寃)이 미진했기 때문이다. 피노체트는 퇴임 뒤 7년간 군총사령관직을, 이후 면책특권을 갖는 종신 상원의원직을 지켰다. 91세로 자연사할 때까지 단 한번도 법정에 서지 않았다. 미 상원 조사 결과 2700만달러(308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된 해외 도피 불법자산 역시 한 푼도 반환하지 않았다. 우리는 지난 2월 큰 불상사 없이 서울 상암동에 번듯한 박정희 기념관을 세웠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박정희의 공과를 둘러싸고 칠레처럼 격렬한 갈등이 적었던 것은 역사적 우연이 겹쳤기 때문이지, 박정희의 유산이 가벼웠기 때문은 결코 아니다. 우선 본인이 창졸간에 피격됨으로써 직접적인 심판의 예봉을 피해 갔다. 여기에 박정희 사후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의 변종 독재정권이 다시 국민을 옥죄었기에 가능했다. 광주학살과 같은 새로운 상처가 과거의 상처 위에 덧씌워진 격이다.

 

박근혜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 부모에게 정치적, 경제적 자산을 물려받았다. 역사적 해원의 첫 단추도 ‘산업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피해를 입은 분들’이 끼워주었다. 박근혜 스스로 기념사에서 밝혔듯이 상암동 박정희 기념관에는 국민통합의 소중한 정신이 담겨 있다. 그 국민통합의 출발점에 서는 것은 박정희의 그늘에서 벗어날 때나 가능하다. 하지만 박근혜는 불행히도 반대의 모습을 보여왔다. 2007년 과거사위가 박정희 치하 긴급조치 위반사건 분석 보고서를 내놓자 “나에 대한 정치공세”라고 폄하하더니, 최근엔 뉴라이트 교과서에 5·16쿠데타를 미화한 사람을 대선후보 경선 캠프에 영입했다.

 

칠레에서도 수년 전부터 피노체트 시절의 올드보이들이 국회로, 지자체로 정치 일선에 속속 복귀한다고 한다. 카우폴리칸 행사 당일의 충돌은 그 일단일 뿐이다.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직 결정적인 구심점이 없다. 아, 피노체트에게도 정치하는 딸이 있긴 하다. 60대 맏딸 루시아가 2008년 지방선거에서 고급 부티크가 밀집한 산티아고의 부촌 비타쿠라 지역에서 시의회 의원으로 당선됐다. 하지만 정치적 영향력은 찻잔 속에 머문다. 루시아나 그 지지자들은 모두 피노체트의 쿠데타를 “합헌이자, 영웅적 행동”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5·16 쿠데타가 “구국의 행동”이라는 말과 참 비슷하다.

 

역사를 과거지사(過去之事)쯤으로 묻어두고, 미래를 향해서만 질주할 수 있을까. 그러한 과거와 현재의 축적물로 만들어지는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장군의 딸, 독재자의 딸’을 열쇳말로 글을 쓰면서 뇌리를 떠나지 않는 의문부호들이었다. 맞다. 생물학적인 아버지의 과오를 어찌 딸에게 평가하라고 하겠는가. 하지만 아버지의 정치적 과거와 단절했음을 입증해내야 비로소 전혀 다른 품종의 정치인으로, 꿈을 꿀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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