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호 논설위원
대한민국처럼 유엔을 짝사랑해온 나라도 드물다. 1964년 제2한강교(현 양화대교) 북단에 흰색의 웅장한 유엔군참전기념탑을 건립, 김포공항을 통해 서울 시내로 진입하는 모든 차량은 기념탑 밑을 지나게 했다.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유엔창설기념일(10월24일)을 공휴일로 지정해놓던 시절도 있었다. 1970년대만 해도 유엔참전 16개국의 국명을 모두 외우는 것이 어린 학생들의 과제 중 하나였다.
정부수립 이후 유엔 가입은 국민적 염원이기도 했다. 1949년 1월 가입신청을 한 이후 1955년, 1956년, 1958년, 1975년 등 집요하게 유엔의 문을 두들겼다. 하지만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옛소련의 반대로 번번이 무산됐다. 1980년대까지 대학가 축제시즌에 단골메뉴로 ‘모의 유엔 총회’가 열린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게다. 1991년 남북한 동시 가입 형식으로 회원국 지위를 받기까지 한국은 유엔의 옵서버 국가에 지나지 않았다.
국제기구에서 ‘옵서버 지위’는 일종의 깍두기 신세다. 일부 활동에 참가할 수는 있지만 표결권은 물론 결의안 발의권도 없다. 어찌 보면 처량한 신세다. 하지만 그나마 없는 것보다는 낫다. 국제사회에서 ‘국가’의 존재 자체를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에는 절실하게 바라는 것이 옵서버 지위다. 대만은 중국의 어깃장 탓에 세계보건기구(WHO)의 옵서버 국가가 되기 위해 1997년부터 11년 동안 매년 신청서를 고쳐 써야 했다.
팔레스타인 소년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와 손가락으로 승리 표시를 만들며 기뻐하고 있다. (출처:경향DB)
이스라엘군의 최근 공격으로 피해가 컸던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의 팔레스타인인들이 모처럼 환희의 축배를 들고 있다. 유엔 총회가 지난 29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지위를 ‘옵서버 단체’에서 ‘옵서버 국가’로 격상시켜주었기 때문이다. 꿈에 그리던 국가 대우를 받게 된 것이다. 아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대통령은 “유엔이 팔레스타인에 (국가)출생증명서를 떼어주었다”며 반겼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강력한 반대에도 193개 회원국 가운데 138개국이 찬성표를 던졌다.
그 오랜 세월 유엔의 인정을 받기 위해 애면글면했던 한국은 이번에도 기권표를 던짐으로써 팔레스타인을 인정한 국제사회의 ‘주류’에 끼지 못했다. 현실외교의 한계를 무시할 수는 없지만 불과 얼마 전 안보리 비상임이사국 진출을 계기로 국제적 역할 확대를 다짐했던 게 무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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