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호 특파원
'국가'와 '국민' 간의 기싸움이었다. 지난 30일 우여곡절 끝에 서명식을 가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논의 과정은 '두' 정부와 '한' 국민의 협상이었다. 한국측은 협상 전권을 가진 정부가 시종 일관 협상 및 관련 논의를 주도했다. 국회는 들러리였다. 일부 의원들은 단식농성을 벌이며 FTA에 비판적 입장을 보였지만 흘러가는 단막극으로 끝났다. 정부와 재계는 국민을 간단하게 양분했다. 정부의 높은 뜻을 알고 적극 지지하는 측과 철없는 반대세력으로 말이다.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눈을 부라렸다. '반국가적 인사'라는 꼬리표를 붙이고도 남을 기세였다. 정부는 협상권과 정보접근권을 움켜쥐고 국민은 물론 국회와 나누는 데 인색했다.
미국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의회가 주인이었다. 협상 전면에 나섰던 무역대표부(USTR)는 들러리이자, 심부름꾼이었다. 정부간, 국가간 협상이 끝난 뒤에도 의회가 쥐어 준 신통상정책에 맞게 다시 조정하는 '애프터 서비스'까지 했다. 미국 상.하 의원들은 재협상을 요구함으로써 국가간 협상의 게임 룰을 당당하게 어겼다. 미국산 쇠고기의 전면 수입 재개와 같이 FTA와 상관없는 의제를 비준의 전제조건이라고 거듭 밝히는가 하면 자동차시장 추가 개방을 공개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물론 무역협정 협상권이 정부에 있는 한국과 달리 미국은 협상권이 의회에 있다. 하지만 법적인 차이 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정치문화 또는 정치수준의 차이다. 한국 국회의 주류는 정부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협상 중 방미한 국회대표단들이 한 일이라고는 한.미 FTA의 중요성을 '홍보'하는 정도였다.
웬디 커틀러 한-미 FTA 미국쪽 수석대표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출처: 경향DB)
미국에도 한국과의 FTA는 국가 통상전략 상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990년대 북.미 FTA 이후 최대 규모인 데다 향후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경제권과의 협상에 초석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맥스 보커스 상원 재무위원장과 샌더 레빈 하원 무역소위 위원장 등 일부 의원들의 안중에는 국가적 명분이 없는 듯하다. 쇠고기와 자동차 등 지역구의 주산업과 그에 목매는 유권자들의 권익에 최우선 순위를 두었다.
대권후보들도 마찬가지다.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과 존 에드워즈 전 상원의원 등 유력 대권 주자들은 자동차산업의 일자리 및 환경을 위협하는 FTA라면 반대한다는 목소리를 분명히 내고 있다. 표를 의식한 얄팍한 계산에서 나온 정치적 발언들이 아니다. 이들은 실제로 자유무역으로 위협받는 미국민의 일자리를 보호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 한국의 유력 대권주자들은 명확한 찬.반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이들의 전략적 모호성에는 불행히도 고민의 흔적이 보이질 않는다. 첨예하게 입장이 갈리는 상황에서 자칫 어느 쪽의 표도 잃지 않겠다는 산수가 있을 뿐이다.
FTA 비준 여부는 양국 국회로 넘어간다. 주민의 이익이 무시되면 부결하겠다는 미 의회의 입장은 익히 알려졌다. 여의도에서는 어떤 논의가 오갈까. 바라건대 숫자로 양적 성장의 허상을 제공하는 정부의 2중대 역할은 그만두고 국민의 일자리와 환경을 고민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혹여 다시 단식 같은 건 안했으면 한다. 입법권을 위임받은 선량들이 법의 차이, 법의 한계를 탓하면서 밥이나 굶어봐야 국민에게 어떤 이익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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