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항 전 유엔군 사령관 특별고문(미국명 제임스 리·77)은 국내외를 통틀어 한반도 정전협정 체제의 최고 권위자로 꼽힌다. 1966~94년 군사정전위원회(이하 정전위) 현장을 지켜보았던 그는 ‘판문점의 산증인’이기도 하다.
추석을 앞둔 지난 21일 그를 미 버지니아주 페어팩스 카운티에서 만나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다시 현안으로 떠오른 북방한계선(NLL) 문제에 대한 견해를 들어보았다. 그는 “NLL은 정전협정 상에 어떠한 근거도 없는 선”이라면서 “70년대 말까지 한·미연합사 작전참모는 물론 사령관도 성격을 몰랐다”고 증언했다. 그는 “선을 긋기 시작하면 싸우게 된다”면서 남북이 머리를 맞대 서해를 ‘평화의 바다’로 만들 것을 제안했다.
“선긋기 시작하면 싸움만 해”
-한국 내에서 진행되고 있는 NLL 논란을 어떻게 보셨는지.
“한 한국 방송국에서 관련 토론을 하면서 전화를 걸어왔는데 NLL이 정전협정과 관계없다고 답하니까 누군가 “저 양반, 북한을 지지하는 거 아니야”라는 말이 들렸다. 90년대 중반인가 이양호 전 국방장관이 국회 질의에서 ‘NLL을 넘었다고 정전협정 위반이 아니다’라고 말한 뒤 ‘북한을 두둔하냐’면서 공격을 당했던 게 기억났다. 사실을 사실대로 이야기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전장관은 대령시절 판문점 연락장교단장을 하면서 NLL 문제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다.”
-정전협정 당시 해상경계를 어떻게 정했는가.
“(정전협정의 지도 1·2·3을 들어보이면서) 어디에 선이 있는가. 서해 5도 지역이 유엔군 사령관 통제하에 있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 영해 3마일의 선을 그었을 뿐이다. 북한이 3마일 안에 들어오면 위반이라는 표시다. 북한은 12마일을 주장하고 우리는 3마일을 주장해서 정전협정에 해상분계선을 못만들었다. 영해가 몇마일이라는 규정도 없이 흐리멍텅하게 돼 있다. 당시 합의를 못했기 때문이다. 북방한계선이라는 용어 자체가 남측에서 그 선 이북을 가지 말라는 것이었지 북쪽에서 내려오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었다.”
-정전위에서는 NLL 문제를 어떻게 다뤘나.
“내가 판문점에 근무했던 66년부터 94년까지 한번도 NLL을 들어 북한을 비난한 적이 없다. 정전위가 마비될 때까지 회의석상에서 NLL 위반 문제가 단 한번도 거론되지 않았다. 서해상에서 충돌이 벌어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유엔사가 NLL이 그려진 지도를 들고 회의장에 들고 나와 (북측에) 입장을 말한 적도 없다. NLL이 있었다면 가능한 일인가. NLL은 클라크 사령관 당시 2급 비밀로 분류됐던 군작전지도 상에만 표시됐다.”
-현재의 NLL을 방치해도 무방할 것으로 보시는가.
“선긋기를 시작하면 싸우게 된다. 해상경계는 결국 남북 간에 논의해서 결정할 문제다. 지금처럼 놔두면 사실상 북한을 봉쇄하자는 건데 이는 상대방 해안 봉쇄를 금지한 정전협정 2조15항의 위반이 된다. 우리가 계속 고집하면 북한도 선을 긋겠다고 할 것이 분명하다. (남측은) 너무 오랫동안 기정사실화해왔다. 합의된 게 없으니까 우리가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이것(정전협정)밖에 없다.”
-한국에서는 NLL을 고수하자는 주장이 강하다.
“한국 국방부 내 국방정보부의 기록을 확인해보라. 거기에도 유엔군 사령관이 국방장관에게 보낸 서한에 따르면 NLL이 정전협정과 관련 없다는 사실이 나와 있다. 그럼에도 한국 측에서는 ‘우리는 그래도 경계선으로 유지해나가도록 노력한다’는 한 구절이 들어가 있더라. 안보를 위해 뭔가 해야겠지만 NLL은 남북간의 분계선이 아니다. 군사분계선은 임진강에서 끝나며 한강 하구도 통과하지 않는다.”
-남북 간에 공동어로구역이 거론되고 있다.
“서해 5도 영해와 북한 영해가 겹치는 수역에는 중간선을 긋되 중간의 공해는 봉쇄할 게 아니라 공동어로구역을 만들어 함께 사용하는 바다로 만드는 방법밖에 없지 않나 싶다. 충돌을 막고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기 위한 유일한 대안인 것 같다. 어차피 공해에는 선을 그을 수도, 봉쇄할 수도 없다.”
“남북 머리맞대 평화의 바다로”
-미국 입장은 어떤가.
“70년대 말인가, 한·미연합사 작전참모를 하던 미군 소장이 어느 날 ‘NLL이 무엇이냐’고 내게 물었다. 브리핑을 요구해서 설명을 해줬다. 나중에 사령관에게도 브리핑을 했다. 그들 역시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92년부터 정전위가 제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다가 90년대 말쯤 판문점에서 정전위 장성급 회담이 열린 적이 있다. 그자리에서 한국측이 NLL은 기정사실화된 경계선이라고 주장하자, 북한은 이를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미군 대표는 이때 한국측의 말을 지지하지 않고 ‘그것은 앞으로 남북간에 더 논의해서 결정할 문제’라고 말했다. 당시 회의록을 내가 갖고 있다.”
-한국 내에선 정전협정의 당사국이 아닌 한국이 북한과 NLL 문제를 논의할 권한이 없다는 견해도 있다.
“미국이나 유엔사는 NLL 문제에 개입할 명분이나 이유가 없다고 본다. 미국은 NLL이 분계선이라고 말한 적도 없다. 92년 남북기본합의서도 해상경계의 추후 논의 주체로 ‘남과 북’을 명시하고 있다. (미국 입장을 살피는 것은) 과잉 사대주의가 아닌가 한다. 회담은 지금 북한과 미국이 하는 것처럼 주고받는 것이다. 부시 행정부가 (북한을) 밀어붙였듯이 NLL을 밀어붙이기만 하면 되겠는가.”
이씨는 미 국방부 분석관으로 근무하던 1966년 5월 정전위 근무를 명받아 고국에 돌아왔다. 이후 94년 9월 미국에 귀환할 때까지 정전위 전사편찬관과 유엔군 사령관 및 정전위 수석대표 특별고문을 역임했다. 2001년 그가 펴낸 ‘JSA-판문점(1953~1994)’에는 각종 기록이 담겨 있어 정전협정 체제는 물론 NLL 논란이 벌어질 때마다 ‘원전’으로 인용된다. 한국정부의 국민훈장 목련장(93년)과 미 연방정부 최고훈장(금메달)을 받기도 했다. 개성 태생인 그는 서울공대 재학중 한국전쟁을 만났다. 부산 피란 시절 백낙준 박사의 권유로 미군 통역을 맡았다가 전략첩보국(OSS) 대원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미 연방정부 공무원으로 일했지만 고향에서 살다 온 기분이다. 관사가 있던 용산 우체국 앞 춘천막국수 집이 가끔 생각난다”고 말했다.
〈워싱턴|김진호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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