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에서 그는 반핵 캠페인 이야기를 했다. 2천여만명이 참가한 세계 최대 반핵 운동(WPC)이었다는 점을 처음 알게됐다. 하지만, 핵무기를 손에 넣기 전에 소련 공산당이 조직한 반핵운동이었고, 참가자의 대부분이 소련국민이었다는 사실에 실망했다. 롤랑 베이는 그 점은 말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프랑스 공산당원임은 밝혔다. 당초 1면을 헐어 게재하려고 했던 인터뷰를 대폭 줄인 까닭이다. 반핵, 평화는 아름다운 말이다. 하지만 뜻이 좋다고 무조건 따르기에는 언론인 경력이 꽤 됐었다.
“한반도 평화는 북한·미국 아닌 남북한 주민이 결정해야”
ㆍ롤랑 베이 국제민주법률가협회 수석부대표
“한국인들이 정전협정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는 것에 놀랐다.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 원칙은 정전협정 4조에 이미 규정돼 있다. 분단은 60년 전에 해결될 수 있었다.”
‘자주통일과 민주주의를 위한 코리아연대’가 정전협정 60주년에 즈음해 초청한 롤랑 베이 국제민주법률가협회 수석부대표(94·사진)를 지난 5일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 회의실에서 만났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해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나 여전히 반전·평화 운동의 선봉에 서 있는 베이는 한반도 문제를 정전협정문과 유엔 헌장 등 두개의 법적 잣대를 통해 들여다본다.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북한 핵문제를 해결하고 항구적인 평화의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는 평화방정식은 부차적인 의미를 가질 뿐이라는 것이 그의 견해이다.
베이는 “내가 옆집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는 협정을 체결하지 않는다고 옆집 사람을 죽여도 좋다는 말은 아니다”라면서 평화협정 체결에 앞서 평화는 한반도 거주민들이 스스로 선택해야 할 문제라고 강조했다. 그가 언급한 정전협정 4조 60항은 협정 발효 석달 내에 고위정치회담을 열어 외국군 철수와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대화를 가질 것을 권고하고 있다.
1946년 창설된 국제민주법률가협회는 한국전쟁 중인 1952년 3월 황해도 신천학살사건과 관련해 ‘미군범죄 보고서’를 발간하는 등 초창기부터 한반도 문제에 관심을 보여왔다. 베이는 “정전협정 4조는 한반도 문제가 있다는 점과 유엔의 군사개입으로도 해결되지 않았음을 당사국들이 인정한 것”이라면서 “법(정전협정)이 준수되지 않는다면 무법상황이 계속될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북한이 핵무장의 길을 선택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다”면서도 “미국은 핵문제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에도 평화를 위한 어떠한 의무도 이행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유엔 헌장을 관통하는 국가간 평등의 원칙에 비추어 한반도 평화는 미국과 북한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 남북한 주민이 결정해야 할 문제라고도 강조했다.
북한에 대해서는 “어떤 의도에서건 핵무기가 단 한번이라도 사용된다면 인류에 재앙이 될 것”이라면서 “북한도 핵이 아닌 국제사회와의 연대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베이가 거듭 강조한 고위정치회담은 정전협정 체결 9개월 만인 1954년 4월 제네바에서 열렸지만 각각 외국군 철수와 선거를 통한 단일정권 수립 등을 둘러싼 이견으로 좌초됐다.
유엔군의 모자를 쓰고 참전한 미군이 한반도 남쪽에 사실상 영구주둔하고 있는 현실정치학의 지형에서 그의 말은 공허하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정치적, 도덕적인 견지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국제)법을 말하는 것일 뿐”이라는 노(老) 평화운동가의 직언은 우리 스스로 1990년대 이후 북한 핵문제라는 나무만 보고 한반도 평화라는 숲은 보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근원으로 돌아가 정전협상에서부터 평화의 단초를 찾아내라는 충고였다.
건강과 장수의 비결로는 생후 6개월 때 스페인 독감을 견뎌냈고, 동료 변호사이자 평화운동의 동지였던 아내(모니크 피카르-베이·2009년 작고)를 만난 행운으로 돌렸다. “아내와의 사별 뒤에는 ‘절반의 인생’을 살고 있다”면서 안타까워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