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국가주석이 아베 신조 일본 총리를 만나는 것은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주최국으로서 일종의 의무가 아니겠나. 중국 정부는 비공식적으로 만날지, (야스쿠니신사 문제 등에 관한) 일본의 태도에 따라 두 정상이 선 채로 5분 정도 만날지 몇 가지 생각을 하고 있다.” 지난달 동아시아재단과 중국 난카이대학 및 베이징대학이 각각 마련한 한·중 대화의 언저리에서 만난 중국 싱크탱크 전문가의 전언이었다. “마지못해 두 정상이 만나더라도 중·일관계에 큰 변화는 없을 것이며, 있다면 사전에 한국과 꼭 협의할 것”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이 경우 한국은 협의를 기다리는 대상이다.

동아시아 국제관계가 갈수록 복잡해지고 있다. 국력에 따라 전략적 밑그림의 크기가 달라진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아시아 재균형 전략과 육상·해상 실크로드 구축을 제시한 시진핑 국가주석의 ‘일대일로(一帶一路)’ 청사진은 아시아를 통으로 보고 나온 전략적 고민의 결과다. 지역 강국인 일본은 미국의 큰 그림 안에서 집단자위권을 행사하는 정상국가의 꿈을 실현하고 있다. 내친김에 센카쿠열도(댜오위다오) 분쟁을 빌미로 늘어난 안보적 수요를 그득 채우려 분주하다. 한국 앞에 놓인 도화지는 그리 커 보이지 않는다. 정확히는 도화지를 갖고 있는지조차 묘연하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로 대표되는 미국 군사전략의 밑그림에 한국은 구경꾼 같은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지난달 한·미 연례안보협의회(SCM)에서는 예상과 달리 사드와 관련한 논의가 없었다. 그렇다고 전·현직 국방부 장관이 나서 “주한미군이 배치한다는데 어쩌겠는가”라고 말하던, 무책임한 입장이 바뀐 건 아니다. 여전히 미국이 협의해오기를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처지다.

미국은 군사적 밑그림에, 중국은 경제적 밑그림에 한국을 편입시키고 싶어한다. 중국 현지에서 확인한 사드에 대한 반발은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중국 전문가들마다 말의 결은 같았지만 메시지는 명확했다. 요약하자면 “한·미 동맹은 인정하되 중국을 겨냥한다면 결코 용납할 수 없다. 사드가 배치된다면 중·한 간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문화적 관계가 어려워지는 것은 물론 한국은 중국과 러시아의 전략적 공격대상이 될 것”이라는 경고였다. 경제발전에 바쁜 중국은 아직 미국과 군사적 갈등관계를 원치 않는다. 단지 한국을 내세워 최대한 미국을 압박하려는 우회전략을 구사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미국 미사일방어(MD) 체계와 사드 개요 (출처 : 경향DB)


사드가 양국 간 갈등의 뇌관이라면, 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열렸던 어제 한·중 정상회담 직전에 타결된 양국 간 자유무역협정(FTA)은 중국이 그리는 경제전략의 밑그림과 겹친다. 중국은 일단 한국과 FTA를 맺은 다음에 이를 토대로 아시아·태평양 국가들로 확대하려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 한국은 그러나 지난달 말 출범한 아시아 인프라 투자은행(AIIB)에는 참가하지 않고 있다. 한국이 중국 주도의 국제금융기관에 뛰어드는 것을 경계하는 미국의 불편한 심기를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중의 전략적 밑그림 중에서 한국은 어느 한쪽만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 할 필요도 없다. 먼저 우리의 전략적 그림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필요하다면 미·중의 협의를 마냥 기다릴 것이 아니라 먼저 우리 선택의 정당성을 설득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제로섬 게임의 사고방식으로만 볼 일이 아니다. 미·중 사이에서 그만큼 한국의 가치가 높아졌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제 베이징에서 성사된 중·일 정상회담은 비공식회담도, 억지춘향식으로 잠깐 얼굴을 보는 것도 아니었다. 엄연한 공식회담이었다. 시진핑 주석의 굳은 표정은 외교적 제스처로 읽혔다. 취임 2년이 다 되도록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와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이라는 희미한 스케치만을 만지작거리다가는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다. 전시작전통제권 이양의 기한 없는 연기에서 드러났듯이 자발적으로 냉전의 족쇄, 미국의 족쇄에 잡혀 있으려 하는 한, 미·중이 그리고 있는 역동적인 지역질서에서 미아가 될 수밖에 없다.


김진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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