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의 동진은 2000년 7월 시작됐다. 갓 취임한 러시아 대통령의 자격으로 일본 오키나와 주요 8개국(G8) 정상회의에 참석하러 가는 길에 평양에 들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으로부터 장거리 미사일 시험발사 유예 언약을 받아내 국제사회의 조명을 톡톡히 받았다. 푸틴 등극 이후 러시아의 동진은 잊을 만하면 재개됐다. 지난해 11월에는 박근혜 대통령 취임 이후 한반도 주변의 4강 국가 지도자로는 처음으로 서울을 방문하기도 했다. 한반도 종단철도와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연결이나 가스 파이프라인 건설 등의 거대한 선형(線刑) 프로젝트가 그때마다 회자됐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의 특사 자격으로 최룡해 당 비서가 지난달 17~24일 모스크바를 다녀간 뒤에는 사뭇 다른 담론이 새나오고 있다. 선형 프로젝트 못지않게 공간 프로젝트가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최 비서는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과 ‘최고위급 회담’에 대한 원칙적인 합의만 도출한 것이 아니다. 하바로프스키를 방문해 극동지역의 농경지 1억~1억5000㎡를 무상 임대받아 함께 경작하는 방식을 논의했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북한이 군병력을 개편, 최대 15만명의 유휴 인력을 러시아에 파견해 농업·수산업·에너지개발 사업 등에 투입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현재 러시아 각지에 파견돼 있는 북한 노동자(2만~3만명)의 5배 이상이다.

러시아는 북한의 부채 100억달러를 탕감한 데 이어 지난 10월부터 3500㎞에 달하는 북한 철도의 개건과 북한 지하자원을 빅딜하는 ‘포베다(승리)’ 사업을 시작했다. 지난달 최 비서를 만난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이 “양국 간 경제관계가 전혀 새로운 수준에 도달하고 있다”고 말한 것을 보면 향후 양국 경협이 무언가 달라도 다를 것이라는 합리적인 관측을 낳는다.

러시아를 방문 중인 북한 최룡해 노동당 비서(왼쪽)가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오른쪽)과 20일(현지시간) 모스크바 시내 외무부 영빈관에서 회담을 갖기 위해 함께 걸어가고 있다. _ 로이터


연해주를 경작해 남북관계에 새로운 돌파구를 여는 방식은 통일준비위원회 2차 회의에서도 제기된 바 있다. 쌀을 공동경작해 종래의 대북식량지원 패턴을 벗어나 벼 30만t을 북한에 제공하는 방안도 논의되고 있다. 러시아의 오랜 숙원인 극동개발과 남북·러 3국 경제협력은 그동안 화려한 청사진과 달리 실제 결실을 맺지 못해왔다. 중국의 주목을 받을 만큼 어느 정도 규모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지난 3분기 북·러 교역규모는 작년 동기에 비해 되레 10% 정도 줄었다.

고유가에 올라탔던 러시아 경제가 추락하면서 투자재원 마련 역시 녹록지 않다. 러시아 재무부는 투자효율이 낮은 극동지역 개발에 지갑을 열려고 하지 않는다고 한다. 밀의 경우 극동에선 생산량이 흑해연안의 5분의 1에 불과할 정도로 생산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한사코 남북·러 3자협력을 강조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유가 하락의 악재가 아니더라도 한국의 자본과 기술이 결합되기 전에는 결코 구현되기 어려운 것이 극동개발의 청사진이다. 농업 개발 역시 현대식 경작 기술 및 장비, 대규모 곡물저장고와 블라디보스토크 항만의 곡물 선적시설 등이 갖춰지지 않는 한 기후조건과 낮은 생산성 탓에 공염불에 그칠 수 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사태로 탈냉전 이후 미국 및 서방과 결정적으로 등을 돌렸다. 대미, 대서방 관계복원에는 여러 해가 걸린다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14년 전 푸틴을 떠오르는 스타로 만들었던 G8에서도 제외됐다. 하지만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한 미국과 공통된 이해를 갖고 있다. 러시아는 북핵 위기와 경색된 남북관계를 남북·러 3자 협력의 최대 걸림돌로 여기고 있기도 하다.

시기를 못 박지는 않았지만, 내년 중 열릴 북·러 정상회담은 북핵 위기의 추가적인 악화를 막을 안전장치가 될 수도 있다. 핵확산에 반대하는 러시아의 강경한 입장을 알고 있는 북한이 정상회담 전 4차 핵실험을 강행할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이다. 내년의 한반도 정세는 내달 초 정교력 상 성탄 연휴가 끝난 뒤 재개될 북·러 간 외교행보를 보고 전망해도 늦지 않을 성싶다.


김진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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