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미국 대통령들은 영국 지도자와 친밀하게 지냈다. 양국 간의 ‘특수관계’ 못지 않게 개인적으로도 절친 관계를 유지했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윈스턴 처칠을, 로널드 레이건은 마거릿 대처를, 빌 클린턴은 토니 블레어와 ‘베프(영원한 절친·BFF·Best Friend Forever)’였다. 버락 오바마 만이 예외적으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친했다. 이념적 지향은 다르더라도 동맹관계와 글로벌 아젠다를 다루는 데 있어 정치적 동지관계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도널드 트럼프의 베프는 누가 될 것인가. 워싱턴 포스트가 13일 던진 질문이다.
■현재까지 트럼프에 가장 성공적으로 다가간 우등생은 아베
취임 두 달이 다돼가는 3월 중순 현재 트럼프에 가장 가깝게 접근하는데 성공한 외국 지도자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로 보인다. 첫 만남은 실패로 비쳤다. 지난해 11월 트럼프가 당선된 직후 뉴욕으로 달려가 그를 만나 일본이 심혈을 기울여온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를 외면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지만, 트럼프는 취임 4일만에 TPP탈퇴를 발표했다.
하지만 2008년 첫 총리 당시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오답 노트’를 만들었다는 아베 아닌가. 일본은 트럼프의 심리를 주도면밀하게 연구해 마춤한 선물을 마련했다. 뉴욕 회동에서 전달한 황금도금 골프채(3755달러·430만원 상당)였다. 색상은 취임과 동시에 백악관 내부 카텐과 가구등을 황금색으로 단장한 트럼프의 취향을 저격한 것이었다. 지난 2월10일 백악관 미·일 정상회담 뒤 트럼프의 플로리다주 개인 별장 마라라고로 함께 날아간 아베는 하루 동안 27홀을 라운딩했다. 팜비치의 주피터 골프리조트에서 18홀을 돌고 정식 오찬 대신 햄버거와 핫도그를 씹어가며 9홀을 더 돈 것이다.
트럼프는 라운딩 전 연습스윙 때 황금색 골프채를 휘둘러보이면서 만족을 표현했다. “골프에 대해 한가지 말하자면, 점심 식탁에서 보다는 골프 코스에서 상대를 더 잘 알게 된다는 것이다”라는 게 트럼프의 평소 지론이다. 아베는 연회비가 8000만엔(약 8억원)에 달하는 도쿄 인근 ‘300클럽’ 회원일 정도로 골프를 즐긴다.
아베 집안의 ‘골프 외교’는 뿌리가 깊다.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 총리는 1957년 매릴랜드로 달려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골프를 쳤다. 당시 각국 언론은 일본을 2차대전의 적국에서 군사동맹국으로 바꿔놓은 ‘외교의 승리’라고 평가했다.
■토니 블레어와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부시의 애견 리스트’에 올라
외국 지도자들은 많은 경우 미국 대통령 앞에만 서면 작아진다. 오죽하면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근육질 외교를 했던 조지 부시 시절에는 ‘부시의 애견리스트’까지 나돌았겠는가. 대영제국의 총리(블레어)는 이라크 침공에 적극 동조함으로써 ‘부시의 푸들’로, 일본 총리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부시의 아시아 푸들’로 각각 불렸다. 각국 언론에서 통용되던 호칭이다.
애견리스트에 끼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2008년 4월 미국 대통령 주말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서 부시와 함께 골프 카트를 타면서 시종 웃음을 건넸던 이명박 대통령이 그랬다. “‘부시의 공식 애완견(lap dog)’에 도전했지만, 덜컥 내준 쇠고기 파동 탓에 제주 정상회담까지 무산됐다”고 워싱턴포스트가 같은해 6월25일자 가십란에 실은 바 있다. 당시에도 일본 총리였던 아베는 같은해 4월 백악관 방문 길에 부시의 애완견 용품을 선물로 건네 빈축을 샀다. 개인적으론 모욕적인 언사일수도 있지만, 미국 대통령과 맺은 친밀한 관계는 각각 자국의 이익에 효자가 됐다.
아직까지 ‘트럼프의 푸들’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고 있지만, 각국 지도자들이 너도 나도 트럼프와의 친교에 관심을 쏟고 있다. 미국이 보유한 경제적, 군사적 영향력을 생각하면 관계맺기에 사활을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워싱턴포스트는 최소한 10여개국 지도자들이 트럼프는 물론, 측근들에 대해 다양한 방식의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고 전했다.
테레사 메이 영국 총리는 트럼프 취임 일주일 만인 지난 1월27일 백악관으로 달려가 정상회담을 가진 뒤 함께 손을 잡고 위스트윙 열주를 산책하는 사진을 남겼다. 이 사진은 다음날 영국 타블로이드 신문들의 1면을 장식하면서 미·영 밀월관계를 과시할 수있었다. 트럼프와 메이는 이후 최소한 2번 비공식적인 통화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지난 달 백악관에서 정중한 대우를 받았다. 오바마 대통령 재임 8년 동안 관계가 껄끄러웠지만 트럼프의 사위인 자레드 쿠시너와 오랫동안 친한 사이였던 게 주효한 듯하다. 멕시코 공무원들은 트럼프의 책들을 쌓아놓고 읽고 있다. 엔리케 페냐 니에토 멕시코 대통령은 거의 매주 내각 장관들을 미국으로 파견해 트럼프 행정부와 관계맺기에 정성을 기울이고 있다고 한다.
■요란한 성격의 트럼프와 차분한 성격의 메르켈 첫 대면에 관심
트럼프 진영에선 메르켈이 힐러리 클린턴과 비슷한 사람이라는 평가가 제기되고 있다. 트럼프의 한 측근은 “우리에게 가치에 대해 강의하지 마라”고 충고했다. 한국의 고위 외교관들에 따르면 설명하고 가르치려는 태도는 김대중 대통령이 조지 부시와의 첫 만남을 그르친 이유다. 부시로부터 “이 사람(This man)”이라는 말을 되돌려 받았다. 빌 클린턴에는 통했지만, 부시에게는 안통했던 접근 방식이었다. 그렇다면 트럼프는 과연 정상외교 자리에서 어떤 인물일까.
켈리안 콘웨이 백악관 선임고문은 “외국지도자들과 관계를 맺는 데 있어 열려 있는 대통령”이라고 강조했다. 한 보좌관 역시 트럼프가 친밀한 우정을 맺기에 어려운 사람은 아니지만, 접근 방식에 있어 본능적인 수준에서 상대를 읽고, 늘 좋은 거래를 하려고 한다고 전했다. 국제적인 사업가 출신답게 거래중심의 관계를 좋아한다는 말이다. 백악관 보좌진들은 또 트럼프가 양자회담의 무거운 격식을 즐기지만, 가벼운 농담으로 분위기를 바꾸곤 한다고 귀띔했다. 저스틴 트뤼도 캐나다 총리와의 첫 만남에서 “나보다도 더 잘 생긴 것 같다”면서 농담을 던진 것이 좋은 예다. 종합해보면 트럼프는 가볍게 접근하되 만남을 통해 딜(거래)을 성사시키려는 사업가 스타일이라는 말이다.
■“새 미국 대통령은 가급적 빨리, 최대한 자주 만나라”
오바마의 국가안보보좌관이었던 토머스 도닐론은 이에 대해 비판적이다. 그는 “(정상회담은)양자적이고 거래적인 관계도, 제로섬 게임도 아니다. 그보다는 훨씬 크고 폭이 넓다”면서 “양측이 각각의 번영을 위해 책무를 공유하는 개념적인 것”이라고 지적했다. 꼭 트럼프가 아니더라도 정상 간에 좋은 인상을 주는 것은 중요하다.
스트로브 탤보트 브루킹스 연구소 회장은 “국가관계에는 수많은 요소들이 있지만, 지도자들 간의 개인적 관계는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강조했다. 부시 시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었던 스티븐 해들리는 “외국 지도자들에게 (새 미국 대통령을) 일찍 만나고, 자주 만나라고 권한다”고 말했다.
트럼프는 딜메이커(거래성사자) 답게 유리한 조건에서 협상하는 것을 좋아하는 듯하다. 자신이 덜 피곤한 상태에서 협상하는 것을 선호한다는 말이다. CNN방송은 그가 참모들에게 외국방문 일정을 가급적 줄이라고 지시했다고 전했다. 상대국 방문외교가 미국의 이익을 관철하는 데 유리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다가 개인적으로도 고된 해외여행을 싫어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오는 5월9일 밤 얼굴을 보게될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은 트럼프와 어떤 관계를 맺어갈 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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