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회적으로 좌파이고, 경제적으로 우파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대한민국’ 국가주의자다.” 이데올로기가 사라진 시대라고 하지만 누군가 이런 구호를 내민다면 꽤나 주목을 받지 않을까. 국민경제의 성공이 민생의 토대라는 주장으로 ‘경제적 우파’를, 경제전쟁의 패배자들을 보듬겠다는 의미에서 ‘사회적 좌파’를 자임함으로써 좌·우를 아우르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인용문구의 ‘대한민국’ 대신에 ‘프랑스’를 넣어야 한다.
‘공화국의 악마’로 지목됐던 ‘장마리의 FN’에서 믿음직한 ‘마린의 FN’으로
이 구호는 전후 프랑스 정계에서 ‘꼴통 중의 꼴통’으로 꼽히는 민족전선(FN)의 초대 대표인 장마리 르펜이 2002년 대선 무렵에 내놓은 화두다. “무엇보다 프랑스 국가주의자”를 자칭한 것이다. 당시 장마리는 1차투표 2위(16.86%)로 창당 이후 처음으로 1, 2위가 맞붙는 결선투표에 진출했다. 1972년 장마리가 창당한 민족전선은 갈수록 퇴색하는 강대국 프랑스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사회적으로 소외받고 있는 계층을 끌어안는 데 성공했다. 반세계화의 기치를 내걸고 세계화의 패배자들이 겪고 있던 분노와 좌절을 표로 연결해낸 것이다.
4월 마지막 일요일인 오는 23일 1차투표가 치러지는 프랑스 대선을 앞두고 여론조사에서 1위를 계속하고 있는 마린 르펜 민족전선( FN) 대표의 대선 홍보 포스터. 파란장미를 심볼로 내세우고 있다. 파란색은 프랑스 3색기의 색상 중 하나로 자유, 평등, 박애등 프랑스대혁명 정신 가운데 자유를 뜻한다.
좌파건 우파건 파리정치대학(Science Po) 이나 국립행정학교(ENA) 출신 엘리트들이 장악한 기성정치권의 부패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프랑스 정치에서는 앵글로 색슨 국가나 독일 등과 달리 섹스 스캔들은 의미가 적다. 하지만 부패 스캔들은 기성정치권의 아킬레스건이다. ‘제국주의 강대국’에 대한 향수를 제외한다면 태극기 집회 참가자들과 상당부분 지지층이 겹친다고 해도 무방할 듯하다. 민족전선 골수당원들의 집회에는 ‘군복 입은 할배들’도 꽤 눈에 뜨인다.
15년 전엔 “공화국의 가치를 지키자”며 좌·우파가 울력으로 극우파를 추방했지만….
FN 후보의 대선 결선투표 진출은 2차대전 이후 좌·우파가 갈마들며 지배해온 프랑스 정치판의 땅을 뒤엎는 사건이었다. 1차투표에서 탈락한 사회당의 리오넬 조스팽 후보는 “프랑스 공화국의 가치를 지키자”면서 우파(공화국연합)인 자크 시라크 지지를 호소했다. 결국 ‘공화국의 악마’로 지목된 장마리는 큰 표차로 2차투표에서 탈락했다. 돌풍은 에피소드로 종식되고 FN은 다시 군소정당으로 쪼그라들었다. 장마리는 2007년 대선에서 4위(10.44%)로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는가 싶더니 같은해 총선에서는득표율 4.3%로 주저앉았다.
2011년 1월 장마리로부터 당권을 넘겨받은 마린 르펜(48)은 그러나 화려하게 부활했다. 2012년 대선 1차투표에서 17.9%(3위)로 득표율에서 장마리의 기록을 앞섰다. 이제는 ‘인민의 이름으로’ 올해 4, 5월 대선에서 승리하겠다고 기염을 토하고 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1차투표 지지율 1위 자리를 좀체로 내놓지 않고 있다. 1일 발표된 BVA의 1차투표 여론조사 결과도 마린 르펜(25%), 중도 에마뉘엘 마크롱(24%), 공화당 프랑수아 피용(19%), 급진좌파 장뤼크 멜랑숑(15%) 순이었다. 집권 사회당 후보인 브누아 아몽은 11.5%로 5위였다. 이번에도 결선투표에서 FN 후보가 참패할 것인가가 이번 프랑스 대선의 최대 관전포인트다.
마린 르펜 민족전선 대표가 지난 3월26일 프랑스 북부 릴에서 열린 유세에서 열변을 토하고 있다. 연단에는 ‘인민의 이름으로, 마린을 대통령으로’라고 써 있다. 파란 장미와 함께 당의 상징색을 파란 색으로 통일했다. 릴/EPA연합뉴스
프랑스 극우정당 FN을 인종주의 꼴통 정당이라고 손가락질만 할 것은 아니다. 최근 10년 동안 세계 주요국 정당 가운데 마린의 FN 만큼 지역적, 정책적, 이데올로기적 확장을 해온 정당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다면 마린은 어떻게 6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이러한 성공을 일구어 냈을까.
‘탈 악마’ 레토릭과 경제민족주의 도입
FN 대표 마린이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은 잦은 막말로 혐오를 받아온 장마리가 대중에게 심어준 ‘악’의 이미지를 탈색하는 ‘탈 악마(Dediabolisation)전략’이었다. 반유대 인종주의·반 이민·반 낙태 등과 관련해 상스러운 말 대신 젊잖은 레토릭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2년쯤 지난 2013년 2월 르몽드는 “FN이 프랑스 국민들에게 평범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마린의 FN이 수권정당으로 등장한 것은 장마리 시절의 구호정치에서 벗어나 내용 있는 정당, 믿을만한 정당으로 거듭난 덕이다. ‘탈 악마화’를 위해 아버지 장마리를 당에서 내쫓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동시에 분노와 절망, 외국인 혐오증을 발산하는 데 그쳤던 장마리 시절의 요란한 시위와 결별하고 경제민족주의를 도입함으로써 주류정당으로 거듭났다. 동성 결혼에 반대하던 장마리와 달리 마린은 2013년 골수당원들의 동성 결혼 반대 시위에 불참했다. 되레 커밍아웃한 동성애자 플로리앙 필립포를 핵심정책 브레인이자 오른팔로 기용했다.
마린 르펜 민족전선 대표가 대선 1차투표를 20일 정도 앞둔 2일 프랑스 서부 보르도에서 열린 막바지 유세 도중 지지자들에게 두 손을 들어 답례하고 있다. 보르도/ EPA연합뉴스
세금은 낮추고 연금지급은 당기고, 대중을 사로잡은 선거공약
유럽은 두개의 세계화를 동시에 겪어왔다. 1980년대 마거릿 대처와 로널드 레이건이 밀어붙인 세계화에 더해 밀레니엄 직후의 유로존 가입으로 서민들의 삶이 더 팍팍해졌기 때문이다. 물가는 올랐고, 실업률은 여전히 10%가 넘으며 산업 경쟁력은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2008년 월스트리트 발 금융위기로 유럽연합(EU)이 긴축재정정책을 도입하면서 민초들의 살림은 더욱 어려워졌다. 마린은 그 틈새를 놓치지 않았다. 장마리 시절의 ‘닥치고 반 세계화’ ‘무작정 반 유럽’ 시위에서 벗어나 정책적 대안을 제시했다.
마린은 이 모든 문제의 원흉으로 유럽연합과 유로화를 지목하고 있다. 유로화 도입이 국내 인건비와 물가 상승을 불러와 프랑스 산업의 경쟁력을 떨어뜨렸으며 그 결과로 산업의 공동화 현상이 빚어졌다는 논리다. 마린에게 유로화는 ‘프랑스의 갈비뼈 사이에 꽂힌 칼’이다. 유럽연합은 난민 수용이라는 미명 하에 수백만명의 이민자를 받아들이게 했다.
마린은 이에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세금을 더 물리는 대신 프랑스 국민의 연금지급 연령을 낮추겠다고 약속한다. 연장근로에 대한 세재개편안도 내놓았다. 프랑스 북부의 갈수록 황폐해지는 공업지대의 저소득층 노동자들과 살림살이의 어려움에 시달리던 노동자, 농민이 FN지지자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마린이 ‘잊힌 사람들’이라고 부르는 노동계급은 마땅한 대책 없이 세계화의 불가피성과 목전의 어려움을 외면한 채 유럽연합의 중요성 만 강조하는 좌파를 떠나고 있다. 전통적으로 좌파의 아성이었던 지역들이다.
드골주의자들의 향수 소환하고, 지역적으론 명실공히 전국정당으로 등장
장마리 시절만해도 북아프리카 출신 이민자들이 많은 남불지역에 기반을 두어왔던 FN으로서는 지역적으로 가장 성공적인 당세 확장이었다. 연령적으로는 일할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청년층이 가담하면서 ‘할배들의 정당’이 젊어졌다. 여기에 많은 프랑스인들의 핏속에 흐르는 드골주의 전통을 소환함으로써 엘리트들 사이에서도 지지층이 늘어갔다.
2차 대전 이후 영·미 앵글로색슨이 주도하자 샤를 드골 대통령은 헨리 키신저 보다 훨씬 일찍인 1960년대 중국과 손을 잡는 등 제3의 길을 선택했다. 미국 주도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군사부문에서 탈퇴하고 독자적인 핵전력을 키웠다. 지금의 파리 5대학 건물이 당초 나토의 본부였지만 드골 시대 브뤼셀로 옮겼다. 반 유럽연합, 프랑화 복원 정서와 맥이 통하는 프랑스 주권주의자들의 정서를 마린이 정확하게 포착해낸 것이다. 하지만 마린의 포퓰리즘이 성공한 배경과 요인을 설명하기 위해선 보다 미시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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