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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퓰리즘 산책

[마린의 포퓰리즘은 어떻게 성공했나 3]현실이 된 포퓰리즘, 언제까지 타자화할 것인가

by gino's 2017. 4. 13.

4월23일 프랑스 대선 1차 투표를 앞두고 공식유세가 시작된 10일 파리지앵들이 나붙은 마린 르펜(왼쪽)과 에마뉘엘 마크롱의 선거벽보를 보면서 지나가고 있다. 프랑스 선거법에 따라 대선에 출마한 11명의 후보들은 지지율과 상관 없이 벽보 개수와 TV토론 할당시간 등에서 완벽하게 평등한 대우를 받는다. Getty Images/이매진스


분노와 불만의 시대는 느닷없이 오지 않았다. 오래된 현재다. 마찬가지로 마린 르펜의 부상은 개인기에 의한 것 만이 아니다. 세계적 흐름과 겹친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어느 나라건 세계화의 패배자들이 많아지면서 쌓여온 문제다.

극우 본색 완화한 선거공약

프랑스의 경우 2012년 대선에서 이미 그 전조가 농후했었다. 2002년 대선에서 장마리 르펜이 결선투표에 진출했던 것도, 민족전선(FN)이 소멸직전에 몰렸다가 월스트리트 발 금융위기가 확산됐던 2008년 이후 되살아난 것도 글로벌 흐름과 맞물린다. 하지만 아무리 당의 체질을 개선하고, 내용을 더했다고 해도 FN의 극우 본색은 여전하다. FN이 레조하스(Les Horaces)의 도움을 받아 내놓은 대선공약을 뒤져봐야 할 필요가 여기에 있다. 대선공약집 ‘144개의 약속’은 표현을 누그러뜨리고 절충적인 요소를 끼워놓았지만 ‘분노한 프랑스인들’의 취향에 맞춘 극우 민족주의 정체성이 척추를 이루고 있다. 그 핵심에 국수주의적 ‘프랑스 우선(La France, d’abord)‘ 정신이 배어 있다.

마린 르펜 민족전선(FN) 대선후보가 지난 3월30일 선거유세 여행 중 프랑스 서부 브르타뉴 지방의 돼지사육 농가를 방문하고 있다. 외국 이민자들이 많아지면서 프랑스 농촌지역에서도 FN 지지자들이 많아지고 있다.          포르딕/EPA연합뉴스
마린 르펜 민족전선(FN) 대선후보가 지난 3월30일 선거유세 여행 중 프랑스 서부 브르타뉴 지방의 돼지사육 농가를 방문하고 있다. 외국 이민자들이 많아지면서 프랑스 농촌지역에서도 FN 지지자들이 많아지고 있다. 포르딕/EPA연합뉴스


5년 전 이민 금지 공약은 다소 완화돼 합법적인 국적부여인원을 연간 4만명에서 1만명으로 낮췄다. 하지만 새로 취업한 외국인 봉급생활자들에게 높은 과세를 하고, 수입제품에 대해 3%를 신규과세할 것을 명시했다. 외국인 범죄자는 경범죄를 포함해 강제추방시킨다. 속지주의 폐지 및 하원(국민회의)의원은 577명에서 300명으로, 상원의원은 348명에서 200명으로 각각 축소하는 것 등을 골자로 한 개헌 국민투표를 다짐했다. 


치안 정책으로는 니콜라 사르코지 전 대통령이 재미를 보았던 ‘무관용(톨레랑스 제로)’을 강화하고 미성년자 범죄를 부모에 귀책시키며, 교도소 수용인원을 5년 내 4만자리 증설한다. 사형제 부활은 이번에 제외했지만, 집권 후 유럽연합(EU) 탈퇴(프렉시트)와 함께 국민투표에 붙일 것으로 보인다. 대외적으론 쉥겐조약을 탈퇴해 프랑스 국경경비를 강화한다. 


보다 근본적인 변화는 외국인과의 ‘통합정책’을 ‘동화정책’으로 바꾸었다. 마린은 비지니스 거래에만 유로화를 사용하고, 일상적인 거래에서는 프랑화를 사용하는 두 트랙을 제시했지만, 긍극적인 유로화 탈퇴를 목표로 하고 있다. 생명보험사들로 하여금 자산의 2%를 벤처캐피날에 할애하고,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 프랑스 중앙은행이 프랑화를 찍어내며, 정부조달에 프랑스 제품만 허용한다는 계획이다. 화폐 전환우려는 자본유출로 이어질 것이 분명하지만 이를 막기 위해 자본통제를 취할 경우 대혼란이 예상된다.


프랑스가 더이상 다른 나라 전쟁에 연루되지 않도록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군사부문 탈퇴도 못박았다. 영국은 EU를 떠나지만, 나토에는 남았다. 오히려 미국과 특수관계를 유지하는 동맹국의 지위는 더 강해질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의 나토 군사부문 탈퇴는 2차대전 이후 미국 주도로 구축해놓은 집단안보시스템의 한축이 무너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글로벌 안보체제에 큰 혼란이 예상된다.


민족전선(FN) 마린 르펜 후보의 대선 공약집 ‘144개의 약속’ 표지.
마린은 아버지 장마리 르펜의 이미지를 최대한 털어내기 위해 모든 선거 홍보물에서 ‘르펜’을 빼고 ‘마린’ 만을 넣었다.



당내 역할 분담, 집토끼·산토끼 몰이

유로존 탈퇴에 관한 FN의 공약은 민심의 변화에 발빠르게 대응하는 순발력을 보여준다. 공약에서는 ‘유로’를 언급하지 않았다. 댓바람에 유로존을 탈퇴하기 보다 유로화는 비지니스용으로 제한하고 일상생활에서의 거래에서는 프랑화를 사용하자는 이중제안으로 바꾼 것이다. 


마린은 지난 3월20일 1차 TV토론에서도 유로화를 한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최근 유럽연합의 토대가 된 로마조약 60주년에 즈음해 여론기관 CSA의 조사 결과 EU에 남아야 한다는 응답이 66%로 예상보다 높게 나오자 즉각 유로화에 대한 언급을 자제한 것으로 풀이된다. FN 지지자의 78%가 EU탈퇴에 찬성하지만 대선 승리를 위해 다소 두루뭉술한 입장으로 선회한 것이다. 물론 마린이 당선된다면 유로화 도입은 물론 EU 탈퇴를 추진할 것이 분명하다. 


집권당의 지위를 노린 이러한 이중적 태도는 당의 운영에서도 보인다. 본인은 “FN이 달라졌다”는 메시지를 계속 보이면서, 한편으로 당의 전통적 골수당원들은 장마리와 자신의 조카이자 FN의 유일한 국민회의 의원인 마리옹 마레샬 르펜(27)에게 맡기고 있다. 골수당원들이 요구한 동성결혼 반대 시위에 조카를 내보낸 것이 이를 말해준다. 마린과 마리옹 마레샬의 알력설도 있지만, 마리옹 마레샬은 집토끼를 묶어두고, 자신은 산토끼를 잡겠다는 역할분담으로 해석된다.


“사실이 아니라고? 그래서 어쨌다고” ’포스트 진실‘ 시대의 선거결과 왜곡


피곤한 대중은 거대담론도 싫어하지만, 미시적 팩트도 꼼꼼하게 따지지 않는다. 정보홍수의 시대, 사실(fact)은 유권자들의 결정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도널드 트럼프의 유세와 취임 이후 그의 행적에서 세계가 목도하고 있는 새로운 현실이다. 마린 르펜의 FN도 이러한 흐름에 올라타고 있다. 


지금까지 두차례 진행된 프랑스 대선후보 TV토론에서 마린은 다른 후보들의 공격으로 곤경에 처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FN의 우세는 꺾이지 않는다. 듣고 싶은 말만 듣고, 보고 싶은 정치인만 바라보는 유권자들이 많아진 포퓰리즘의 시대에 어차피 사실(팩트)는 중요하지 않다. 팩트체크는 똑똑한 엘리트들에게나 맡겨둘 사안이다. 그러나 어쩌랴. 포퓰리즘에 열광하는 민초들은 엘리트를 싫어한다. 마린의 FN은 트럼프에 비해 프랑스의 특성인 경제, 군사 민족주의를 결합함으로써 완성도를 높였을 뿐이다. 


포퓰리즘은 세계화의 부산물이 정치적으로 표출된 현상이다. 포퓰리즘의 성공을 귀납적으로 분석한다면 기존 정치권, 특히 중도좌파의 몰락과 세계화의 핵심인 자본과 노동력의 이주가 낳은 국내경제의 피폐와 일자리·치안 불안 등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가장 큰 이유를 든다면 바로 현실정치에 대한 불만에 따른 낮은 투표율이 빚은 현상이다. 영국의 경우 젊은층의 낮은 투표율이 EU 탈퇴(브렉시트)를 현실화했다.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하는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들의 낮은 투표율 역시 트럼프의 당선으로 귀결됐다. 


마린의 당선 가능성을 높이는 요인 중 가장 큰 요인도 이번 프랑스 대선에서 기권층이 사상 유례 없이 많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현재까지 각종 여론조사에서 4월23일 1차투표를 하지 않겠다는 유권자는 37%에 달한다. 과거 기권율이 많아야 20% 이내에 묶였던 것과 사뭇 다른 변화다. 낮은 투표율에 더해 FN지지자들의 충성도가 다른 정당 지지자들의 비해 월등하게 높은 점도 변수다.


민족전선(FN)의 로고. 장마리 르펜은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당의 상징을 벤치마킹했었지만 마린은 디자인을 바꾸면서 파시스트 이미지를 완화시켰다. “나는 프랑스를 사랑한다, 나는 민족전선에 가담한다!”고 적혀 있다.
민족전선(FN)의 로고. 장마리 르펜은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당의 상징을 벤치마킹했었지만 마린은 디자인을 바꾸면서 파시스트 이미지를 완화시켰다. “나는 프랑스를 사랑한다, 나는 민족전선에 가담한다!”고 적혀 있다.



FN 지지층의 높은 충성도와 다른 후보 지지층의 낮은 투표율이 당선의 조건

여론조사에서 중도 ‘전진(앙마르슈!)’의 에마뉘엘 마크롱 지지자 가운데 1차에 이어 2차에서도 찍겠다는 사람은 3분의2가 안되는 반면에 마린 지지자들은 80~90% 2차투표에도 나가겠다고 답했다. 중도우파 프랑수아 피용이 결선투표에 진출해도 비슷한 답이 나온다. 마린의 2차투표 득표 예상률은 40%대이지만, 충성도와 기권율에 따라 FN이 승리할 가능성은 여전히 높다. 2002년 대선과 마찬가지로 기존 좌·우파가 ’공화주의 전선‘을 결성하더라도 그 위력은 줄어들 것으로 관측된다.

다만, 선거 막바지에는 늘 예상치 못한 악재가 등장하기 마련이다. 결선투표 진출이 확실시되면서 FN은 도전자에서 방어자로 입장이 바뀌었다. 특히 피용과 지지율 3위로 동률까지 따라붙은 좌파연대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La France insoumies)’의 장 뤽 멜랑숑의 막판 추격이 만만치 않은 형국이다. 보좌관 급여 횡령 논란과 본인의 자책골도 변수다. 마린은 지난 주말 프랑스 경찰이 1942년 유대인 1만3000명을 나치 수용소로 넘긴 ‘벨디브 사건’에 프랑스의 책임을 부인하는 반 유대주의 발언으로 곤욕을 치루고 있다. 뒤늦게 진화에 나섰지만 탈 악마화 전략이라는 화장술로 감춰왔던 장마리 르펜의 반 유대주의 본색을 드러낸 꼴이다. 


지난 4월9일 프랑스 일간 르피가로지와 인터뷰 하는 마린 르펜. 마린은 인터뷰 사실을 트위터에 올려 홍보했지만, 인터뷰 도중 2차대전 직전 유대인 1만3000명을 나치 수용소에 보냈던 당시 프랑스 정부의 책임을 부인해 ‘반 유대주의’ 본색을 드러냈다.

지난 4월9일 프랑스 일간 르피가로지와 인터뷰 하는 마린 르펜. 마린은 인터뷰 사실을 트위터에 올려 홍보했지만, 인터뷰 도중 2차대전 직전 유대인 1만3000명을 나치 수용소에 보냈던 당시 프랑스 정부의 책임을 부인해 ‘반 유대주의’ 본색을 드러냈다.



‘마린 르펜 프랑스 대통령‘이 쓸 요한계시록


브렉시트를 이끌어낸 테레사 메이 영국 총리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공통점은 모두 보수당과 공화당이라는 기존 정당에서 선거를 승리했다는 점이다. 집권 뒤 자신들의 아젠다를 풀어가는 노력 역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기존 정당의 문법에서 완전히 이탈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비주류에서 중원으로 진출한 극우정당 FN이 공약을 이행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은 또다른 성격의 미답의 길이 될 것이다. 프랑화 복원 및 EU 탈퇴가 국민투표를 통과할 경우 영국 처럼 질서정연한 협상 과정을 기대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국제관례에 맞는 협상을 진행할 당의 인프라가 여전히 부족하다. 국민회의(하원) 477석 가운데 1석, 상원 348석 중 2석을 갖고 있을 뿐이다. 대선과 마찬가지로 1, 2차 투표로 진행되는 총선에서 기존 정당들의 견제 때문이다. 유럽의회에서만 74석 중 22석을 차지하고 있다. 대선도 중요한 고비가 되겠지만 FN이 6월 총선에서 어느 정도 의석을 확보하느냐는 또다른 변곡점이 될 것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경제적으로 프랑화 복원과 긍극적인 EU탈퇴는 국제자본시장의 격동을 야기할 것으로 분석된다. 프랑스가 자본유출을 막기 위해 자본통제를 할 가능성이 짙기 때문이다. 마린의 측근들은 이러한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와 글로벌 자본시장이 프랑스 대선의 향방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까닭이다. 여기에 프랑스의 나토 군사부문 탈퇴는 그렇지 않아도 이슬람국가(IS)와의 전쟁 및 중국의 남중국해 팽창 움직임, 북한의 지속적인 핵개발, 러시아와 미국의 갈등 등으로 불확실성이 많은 글로벌 안보상황에 평지풍파가 될 것이다.
 


프랑스 대선에도 또다른 포퓰리즘으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좌파연대후보 장 뤽 멜량숑이 4월2일 샤토루에서 유세 연설을 하고 있다.    Getty Images/이매진스

프랑스 대선에도 또다른 포퓰리즘으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좌파연대후보 장 뤽 멜량숑이 4월2일 샤토루에서 유세 연설을 하고 있다. Getty Images/이매진스



‘탈 진실’로 타자화하지말고 현실로 인정해야


전세계적인 포퓰리즘의 발흥은 모두에게 놀라운 현상으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그 ‘모두’는 모두가 아닌 일부다. 주류(mainstream)에 포함된 학계와 언론, 정계 만이 포함된다. 포퓰리즘을 설명할 방법을 찾지 못한 주류사회는 객관적인 사실보다 감정호소가 더 효과적인 환경임을 뜻하는 ‘탈 진실(Post-Truth)’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냈다. 포퓰리즘에 관한 글을 연재하면서 SNS에서 접한 가장 인상적인 댓글은 ‘탈 진실’을 혹독하게 비판하는 글이었다. “기성 정치인과 지식인들이 민심의 흐름을 놓쳐놓고 왜 뒤늦게 포퓰리즘을 타자화하는 것이냐”는 문제 제기였다. ‘탈 진실’이라는 꼬리표를 붙여 자신들의 기성세계와 분리시키지 말고 ‘탈진실=현실’임을 인정하라는 죽비소리로 들렸다. 


프랑스 대선 결과와 무관하게 우리는 이미 영·미를 중심으로 포퓰리즘이 주도하는 세계에 거주하기 시작했다. 일단 현실로 인정해야 한다. 대책 마련은 그 다음이다. 포퓰리즘의 기원이 세계화시대의 구조적인 모순에서 비롯됐다면 그 해법을 찾는 과정 역시 지구 차원에서 신자유주의 체제의 앞날을 고민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어떤 변화이건, 변화에 대한 해법은 세가지 밖에 없다. 새로운 현실로 등장한 포퓰리즘과 함께 살면서 적응하거나, 외면하거나, 아니면 새로운 대안을 마련하느냐다. 포퓰리즘이 프랑스나 유럽의 고민이 아닌, 지구촌 차원의 고민인 이유다.


그 대안의 하나는 이미 등장했다. 미국 대선에서 돌풍을 일으켰던 ‘사회주의자’ 버니 샌더스와 마찬가지로 프랑스 대선에서 좌파 포퓰리즘을 일으키고 있는 장 뤽 멜랑숑이 그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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