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7일 대선 결선투표에서 4년 임기의 대통령에 당선된 칼트마 바툴가가 다음날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승리를 자축하고 있다. 울란바토르|EPA연합뉴스
서구 언론이 바툴가를 포퓰리스트로 낙인찍은 것은 경제위기가 심화되면서 몽골 사회 일각에서 일고 있는 극우 민족주의 바람과 무관치 않다. 스와스티카를 새겨넣은 나치 군복을 입고 히틀러의 생일을 축하하는 몽골의 신나치들은 모든 외국인, 특히 중국인을 증오한다. 앙투완 매리 파리 정치대학 연구원은 바툴가가 “반 중국 감정에 편승한 일종의 민족주의자”라고 지칭한 바 있다. 그럼에도 사회적 소수자인 외국 이민자를 공격하는 서구의 극우 포퓰리즘과 몽골의 민족주의를 같은 걸로 보기는 어렵다. 몽골과 중국의 역사적, 현실적 관계를 봐야 하기 때문이다. 몽골에 중국, 중국인은 절대 강자였고, 지금도 그렇다. 당장 겅솽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지난 10일 바툴가 대통령의 취임을 축하하면서도 “선거 기간 동안 일부 정치인들이 사실과 다른 무책임한 말을 했다. 중국은 이에 우려를 표명한다”는 견제구를 공식적으로 날렸다.
칼트마 바툴가의 지지자들이 지난 7월8일 바툴가의 대선 승리를 기뻐하며 울란바토르 시내를 행진하고 있다. 울란바토르|EPA연합뉴스
■트럼프를 연상시킨 반 외국인(중국) 정서와 ‘몽골 퍼스트’ 공약
서방언론이 바툴가를 포퓰리스트라고 부르는 또 다른 근거는 그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성공한 사업가인데다가 ‘아메리카 퍼스트’를 본따서 ‘몽골 퍼스트’ 선거공약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바툴가는 여기에 ‘애국하는 대통령’이 되겠다고도 다짐했다. 하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여기서도 강자와 약자의 전도현상이 읽힌다. 옛 소련의 위성국가였던 몽골은 1990년대 민주화 이후 중국의 절대적인 망토 밑에서 경제를 꾸려왔다.
세계 최고 부국인 미국이 다른 나라들과의 자유무역협정(FTA)이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면서 손을 보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접근이다. 대 중국 의존도를 낮추라는 것은 지난 2월 몽골 GDP의 절반에 가까운 55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건넨 국제통화기금(IMF)의 핵심 권고사항이기도 하다. 중국은 몽골 경제의 생사여탈권만 쥐고 있는 게 아니다. 티벳 불교도가 많은 몽골에 달라이 라마가 방문할 때마다 중국은 ‘매’를 들었다. 2002년에는 72시간 동안 몽골·중국 국경을 폐쇄했고 지난해 11월에는 대 몽골 관세를 인상했다. 몽골 정부는 결국 다음달 더 이상 달라이 라마의 방문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발표해야 했다.
지난 6월26일 1차투표에서 한 몽골 주민이 투표를 하기 위해 몽골 투브 지방 에르덴솜의 초원에 설치된 대선 투표소로 가고 있다. |EPA연합뉴스
■미술학도, 레슬링 선수에서 정·재계 거물 된 ‘대부(代父)’
바툴가는 성공한 사업가라는 점에서 트럼프와 비교된다. 총천연색의 삶을 살아왔다. 3세 때부터 홍수로 집을 잃은 부모에게 국가가 할당해준 게르에서 걸음마를 익혔다. 미술학교를 다니면서 어쭙잖은 외국어 몇 마디로 관광객들에게 작품을 팔면서 세상이치를 깨우쳤다. 그러나 돈과 명예를 안겨준 직업은 부친에게 배운 브흐(몽골전통씨름)였다. 브흐로 몸을 단련한 바툴가는 16세 때인 1979년부터 1990년까지 레슬링 국가대표로 활약했다. 1989년에는 울란바토로 세계 레슬링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했다. 2006년 몽골 유도협회장을 맡아 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를 배출하기도 했다.
1990년 헝가리에서 시작한 청바지 사업이 성공하면서 재계에 발을 들였다. 영화 <대부>의 주인공 비토 콜리오네가 이탈리아 시칠리아에서 미국 뉴욕으로 막 건너왔을 때 그를 도와준 친구의 이름을 딴 젠코(Genco)그룹을 창업했다. 콜리오네가 쓰던 모자도 애용한다. 몽골 민주화 뒤 국영기업이었던 호텔과 육가공업체를 사들였고 택시와 나이트클럽 관광업으로 영역을 넓혔다. 징기스칸의 동상을 세우고 징기스칸 테마파크도 만들었다.
몽골 경제의 핵심사업은 광산개발이지만 소수 정치인들이 외국 자본 및 대기업과 결탁해서 이익을 독점해왔다. 지난 3월31일 노욘산 인근에서 주민들이 “오유-톨고이 광산은 외국에 권리가 있다. 우리 나라의 안전을 보장하자”는 현수막을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광산개발로 인한 부의 공평한 분배는 이번 대선의 핵심 쟁점이었다. 울란바토르|AP연합뉴스
■광산개발 이익을 국민에게, 5400㎞의 철도건설 프로젝트
바툴가는 대통령이 되기 전에 어떠한 공직도 맡아본 적이 없는 트럼프와는 다른 길을 걸어왔다. 2004, 2008, 2012년 총선에서 잇달아 승리하면서 국회의원으로 정치를 시작했다. 정치인 바툴가가 가장 역점을 둔 분야는 광산개발 이익의 공평한 배분과 철도망의 확충이었다. 외국 자본이나 일부 재벌기업과 결탁한 소수의 정치엘리트들이 광산개발의 이익을 독점하는 것에 반대했다.
‘모든 광산물 개발은 국가경제의 안전과 몽골 국민의 적절한 사회적 발전을 위해 쓰여야 한다’는 몽골헌법 6조1항을 들어 공정한 광산개발을 주창했다. 산업부장관과 교통부장관을 지낸 그는 2010년 6월 몽골 정부로 하여금 3단계에 걸쳐 5400㎞의 기간철도망을 건설토록 하는 법안을 통과시켜 중국과 러시아 항구로 연결하는 프로젝트를 주도했다. 내륙국가 몽골의 광산물을 수출항까지 직접 운반하는 동시에 철도거점마다 공업단지를 만들어 고용창출과 산업발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자는 담대한 계획이다. 몽골은 2012년 11월 1단계 철도망과 2단계 철도망을 잇는 1800㎞의 철도건설을 확정했다.
지난 6월9일 카자흐스탄 이스타나에서 열린 상하이 협력기구 정상회에 참석한 차히야 엘벡도르지 몽골 대통령(왼쪽)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악수를 하고 있다. 중국이 아닌, 제3국의 이웃국가를 찾는 것이 몽골의 숙원이다. 이스타나|AP연합뉴스
■‘제3의 이웃국가’를 찾겠다는 정책에 담긴 함의
선거유세와 현실정치는 다르다. 바툴가의 민주당은 지난해 총선에서 원내 소수당으로 전락했다. 몽골인민당이 전체 76석인 국회의 85%(65석)를 휩쓸었다. 민주당 의석은 9석에 불과하다. 프랑스가 두 차례 경험했던 동거정부와 마찬가지로 국회 다수당과 협치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대선에서 바툴가와 겨뤘던 엥흐볼드는 국회의장으로 국정의 필연적인 동반자이기도 하다. 바툴가는 취임사에서 “빈곤과 실업이 심각한 수준에 도달했다는 점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일 것”이라면서 국회가 그 해결노력을 함께 하자고 당부했다.
포퓰리즘은 (세계)경제의 실패와 기성 제도 및 기성 정치엘리트에 대한 실망에서 태동한다. 선거에서는 높은 기권율로 나타난다. 프랑스 대선 결선투표의 유효표가 전체의 66%에 불과했던 것처럼 몽골 대선의 투표율은 61%에 그쳤다. 바툴가를 포함한 3명의 대선후보가 모두 부패의혹을 일으켰다. 총리를 역임한 엥흐볼드 국회의장은 공직 매매와 뇌물수수 의혹을, 바툴가는 해외은행에 거액을 예치하고 있다는 의혹을 받았다. 1차 투표에서 탈락한 몽골인민혁명당의 사인쿠 간바타르 후보는 통일교로부터 4만 유로를 받았다는 비난에 직면했다.(르몽드 6월26일 보도).
바툴가가 포퓰리즘 성향이 다분한 정치인이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몽골이 처한 현실에서 그나마 국민에게 희망을 말할 수 있는 경력과 비전을 갖고 있는 유일한 후보였던 점 역시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몽골의 중국 경계심리는 근거 없는 증오가 아니다. 옛 소련의 도움이 없었으면 독립국가 건국이 불가능했다. 중국 내 자치주가 된 네이멍구(내몽골)에서도 몽골인은 전체 2400여만명의 17%(400여만명)에 불과한 소수민족으로 전락했다. 그나마 몽골 국민 310만명보다는 많다. 자기 땅에서 추방당한 내몽골인들의 분노는 2011년, 2013년 폭동으로 표출됐지만 곧바로 진압당했다. 몽골 내 반 중국 정서가 서구 극우주의자들의 공격적 포퓰리즘과 거리가 먼 ‘저항(레지스탕스)의 포퓰리즘’인 까닭이다.
(2013년 10월31일 평양 김일성대학에서 몽골이 1992년 비핵지대를 선언했음을 소개하면서 “어떠한 폭정도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는 이례적인 연설을 해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았던 엘벡도르지 전 대통령은 두 차례 임기(8년)를 마쳤기에 이번 대선엔 불출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