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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퓰리즘 산책

“감정적 포퓰리즘이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 인터뷰. Eva Illouz. 르몽드 170726/

by gino's 2017. 7. 26.

[포퓰리즘]“감정적 포퓰리즘이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 인터뷰. Eva Illouz. 르몽드 170726/'감정의 사회학'의 전문가. 


-도대체 미국은 물론 서구사회 일부가 왜포퓰리즘에 흔들리는가.

 우선 경제적 퇴보 때문이다. 1950녀대만해도 노동계급은 노동조합에 의해 보호를 받았다. 원하는 봉급을 받고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기대할 수 있었다. 해외로의 공장이전은 노조를 약화시켰고, 일자리의 안전을 상습적으로 흔들고 있다. 

 두번째 중요한 요인은 사법적이고 상징적인 소수자의 권리가 대폭 향상됐다는 점이다. 소수자엔 여성도 포함된다. 인종주의와 차별과의 싸움에서 성공했다. 법정에서는 물론 미디어에서도 성공했다. 백인남자인 트럼프는 사회 경제적 지위가 하락한 노동자들을 동원하는 방법을 알아챘다. 자신들의 지위가 하락하는 동안 소수자들의 지위는 강력하게 향상된 세상에 살고 있는 노동자들이다. 많은 노동자들에게 가정과 거주지역(마을, 촌락)은 정체성의 근원이다. 동성애자와 자유로워진 여성들 및 이믽바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의 근원이자 지표인 가치를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실업상태의 많은 남성 노동계급은 자신들의 일자리를 '장미빛 칼라(여성)' 또는 낮은 임금도 마다않고 일할 준비가 된 이민자들이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 많은 가정에서 남자들보다 여자들의 노동이 더 안정적이다. 이러한 요소들은 남성성과 자본주의 사회조건을 전복시키고 있다. 이러한 남성들의 굴욕은 사회적이고 경제적이며 가정적이기도 하다. 가정 내에서 종래의 전통적인 역할을 할 수없게 됐기 때문이다. 마초인 트럼프와 그의 지지자들의 성격을 설명하는 대목이다. 

 세번째 요인은 객관적인 불평등의 증가이다. 세계화와 함께 가장자리(주변)에 있던 일부 계층은 엄청나게 충실(성숙, enrichissement)해졌다. 이는 네번째 요인인 리버럴 좌파(La gauche liberale)의 새로운 위치설정과 맞물려 있다. 


-리버럴 좌파는 극우 포퓰리즘의 분출에 어떤 책임이 있는가.

 1970~1980년대만해도 좌파는 노조는 물론 거리에 있었다. 노동계급을 직접적으로 대변했다. 하지만 조금씩 노동계급과 멀어졌다. 대학에 다시 자리잡기 위해서였다. 여성과 성적소수자(LGBT)들의 권리 향상을 ㅇ위해서 성적 행동주의에 뛰어들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1980년대 이후 이러한 주제에 대해 연구를 시작했다. 필요하면서도 유익한 연구였다. 이러한 노력이 없었다면 성적, 인종적 소수자들은 여전히 여성이나 흑인은 우주인이나 국가지도자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 소수자의 권리를 대변하는 좌파와 노동계급 사이는 틈이 벌어졌다. 노동계급은 점차 교회와 TV전도사들에게 기울었다. 가족과 국가의 가치 속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지극히 부유한 트럼프가 노동계급이 더 믿고 기댈 수 있는 대변자가 되는 데 성공한 까닭이다. 노동자들에게 리버럴 좌파는 소수자를 위해 싸울 뿐 자신들을 대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파는 어떻게 자신들이 시종일관 지지해온 경제적 변화와 결코 분리될 수없는 이러한 사회적 혼란을 유리하게 이끌었나. 

 독일 사회학자 Zygmunt Bauman의 표현을 빌자면 1970년대부터 정주민과 유목민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정주민은 한 장소에 머물면서 하나와 전통과 국가, 역사에 연연했다. 유목민들은 코스모폴리탄 엘리트들다. 금융가, 학자, 예술가들에게 여행은 살믜 방식이었다. 우파는 이처럼 좌파의 코스모폴리탄적인 도덕의식에 모욕감을 느낀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전통적인 정체성에 대해 다시 자부심을 갖도록 제안했다.  

  

-포퓰리즘의 정서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포퓰리스트들은 공포와 원한, 친밀성 등 세가지 기본적인 감정을 정치에 동원한다. 공포는 포퓰리스트 지도자들에게 긴요한 도구다. 내부와 외부에서 동시에 상상 속의 적을 만들어낸다. 유럽에서 우리는 이미 난민들에 대한 공포가 커지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 인구학적으로 문화적으로 자신들의 사회 구조가 바뀔 것이라는 공포가 대표적이다. 이슬람에 대한 편견을 통해 사회구조 변화의 공포와 긴밀하게 연계된 안보상의 공포도 있다. 인구구성의 변화에 대한 공포, 경제적 공포, 정체성의 공포, 안보적 공포는 모두 새로운 상상을 만들어낸다. 

 두번째 중요한 감정은 원한(ressentiment)이다. 독일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Max Scheler은 '결코 채울 수 없는 복수욕'이라고 원한을 정의한 바있다. 내가 보기에 원한은 특히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원한을 정확하게 설명해준다. 트럼프를 찍은 남성들의 여성에 대한 비정상적인 원한 역시 잘 설명한다. 트럼프 지지자의 상당수는 여성들이 사회적 지위가 상승했음에도 여전히 불평등하게 대우받고 있다고 불평한다고 생각한다. 남성들의 강력했던 경력을 파괴하는 데 성공했음에도 성적인 공격을 받았다면서 남성들을 고소한다. 소수민족에게도 마찬가지다. 인종주의자들은 소수민족을 싫어하지만 법과 워싱턴의 엘리트들 및 대학과 미디어의 엘리트들이 그들을 보호하고 있음을 알기에 겉으로 드러내지 못한다. 트럼프가 넓고 깊에 활용한 것이 바로 이러한 원한이다. 트럼프는 라티노에 대해 “라티노들은 멕시코에서 건너와서 우리의 일자리를 빼앗고, 우리의 여인들을 범한다”고 말했다. 

 포퓰리즘 정치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세번째 감정은 친밀성이다. 한명의 지도자와 하나의 공동체와의 관계망을 만드는 능력으로서의 친밀성이다. 현대사회는 원자화돼 있다. 공동체 의식 대신 개인에게 우선권을 준다. 포퓰리스트들은 “우리는 서로 친구가 되는, 위엄 있는 그룹에 속한다”고 말하는 이유다. 트럼프의 대선 슬로건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는 쇠락에의 공포를 연상시키는 동시에 사랑의 메시지를 전한다. 트럼프는 지지자들로 하여금 자부심을 갖도록 하는 말을 한다.

 

-당신은 이스라엘이 일종의 포퓰리즘 실험실이라고 한 바 있다. 이스라엘 정부의 정치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유럽과 이스라엘에서 일어나는 현상에는 몇가지 공통점이 있다. 이스라엘의 시민의식(la citoyennete)은 프랑스의 공화주의 시민의식과 마찬가지로 universelle했던 적이 없다. 늘 인종적-종교적 성격을 가져왔다. 유대인들의 정체성은 특히 지난 20년간 급진적으로 변했다. 동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체성의 급진적인 변화도 그렇다. 비록 헝가리 체제가 반 유대적 성격이 있지만 오르반 총리와 네타냐후 총리는 서로 잘 어울린다. 이스라엘은 유럽 및 미국 국우파의 성향을 갖고 있다. 시민성은 인종과 종교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거리낌없이 말하는 나라들이다. 두번째 공통점은 이스라엘이 아랍 적국에 둘러쌓인채 늘 안팎에서 위협을 받고 있는(있다고 느끼는) 소국이라는 점이다. 이스라엘 800만 인구 가운데 200만은 아랍인이다. 이스라엘은 항상 국경을 흐린다. (un flou aristique) 바로 유럽의 난민 위기 당시 벌어졌던 현상이다. 국경은 모호해졌다. 잠재적인 적과 위협을 상징하는 나머지 세계가 우리 문 앞에 있다. 이처럼 경직된 정체성은 이민자들의 유입과 연관돼 있다. 이민자들이 서구 강대국들의 전쟁 정책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할 지라도 말이다. 테러리즘과 안보정책은 경직성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며, 이스라엘은 이런 분야의 파이오니어다.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인종적 균형에 집착해왔다. 1990년 대 이후 유대인이 아닌 이민 노동자들의 유입을 막는 가혹한 조치들을 취해왔다. 안보정책에 대한 집착이 더해졌다. 이점에서 미국은 같은 길을 끌어들이고 있다. 흑인과 라티노 간의 인구적 균형이 깨질 것이라는 공포는 '존재론적인 공포'의 반향을 갖는다. 유럽과 미국이 느끼고 있는 새로운 공포다. '과연 우리가 내일도 계속 존재할 수 있을까' 이스라엘이 수십년동안 수없이 자문해온 질문이자 서유럽이 사로잡혀온 질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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