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카 해협에서 라이베리아 선정의 유조선과 충돌한 뒤 싱가포르 창기 해군기지로 옮겨진 미해군 이지스함 존 매케인함. 미해군은 선박 상태 및 사망 혹은 부상당한 병사들의 사진과 해군의 조치를 투명하게 전하고 있다. 미해군 홈페이지
이지스(Aegis). 그리스신화에서 제우스가 아테네에게 주었다는 둥근 방패다. 오대양을 호령하는 미국 해군은 올해 악몽의 연속이었다. 전투력의 중추를 이루는 첨단 이지스함이 잇달아 사고를 냈기 때문이다. 두 건 모두 어처구니 없는 ‘충돌사고’였다. 지난 6월 이지스 구축함 피츠제럴드함이 일본 남쪽 해상에서 필리핀 선적 대형 컨테이너와 충돌했다. 8월에는 존 매케인함이 싱가포르 동쪽 말라카해협에서 라이베리아 선적의 유조선과 부딪혔다. 두건의 사고로 17명의 병사가 숨졌다. 지난 5월에는 순양함 레이크 샘플레인이 한반도 인근에서 어선과 충돌했고, 1월에는 역시 순양함 앤티텀이 일본에서 좌초했다. 사고는 모두 모두 유사시 한반도 주변 해역을 담당하는 태평양사령부 예하 7함대에서 일어나 우리에게도 적지 않은 충격을 던졌다. 이후 미해군은 어떻게 대응하고 있을까.
흥미로운 대목은 최첨단 전자·통신·관측 장비가 장착된 이지스함 근무자들에게 나침반과 연필을 잡으라고 지시한 점이다. 당연히 종이도 추가됐다. 토마스 로우덴 제독(중장)의 9월15일자 4쪽자리 명령서에 담긴 내용이다. 명령서를 입수한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이번 조치들은 미해군의 ‘문화적 이동’을 의미한다고 짚었다. 장교가 지휘교에 있지 않을 경우, 수병들은 장교의 지시를 기다리는 대신 수작업으로라도 잠재적 위협을 추적하라고 적시했다. 특히 충돌방지를 위해 4500m 이내에 다른 선박이 있을 경우 반드시 수작업 계측을 하라고 지시했다. 다른 선박에 스피커방송으로 함정의 진로와 속도 위치 등을 알리라는 지식도 포함됐다. 해군함정에는 자동식별시스템(AIS)이 장착돼 있다. 하지만 함정 정보 누출을 꺼리는 장교들이 장치가동 스위치를 꺼놓기가 일쑤였다.
수병들의 과로도 새삼 조명을 받았다. 연방의회 정부회계감사원(GAO)의 지난 5월 보고서는 수병들이 매주 108시간 근무한다면서 개선책을 권고한 바 있다. 당시엔 무시했다. 로우덴 제독은 감시임무를 3시간하고 9시간 쉬는 식으로 조정할 것을 지시했다. 주로 야간에 이동하는 군함과 잠수함의 근무행태 탓에 수병들의 생체시계가 어긋나기 십상이었다. 조지프 던포드 합참의장은 지난 9월26일 상원 군사위 청문회에서 “구축함을 방문해보니 일년의 70%를 취역하고 있었다”면서 개선책을 찾겠다고 보고했다. 기본적인 선원자격증을 취득하지 못한 수병들은 아예 승선을 금지시켰다. 군항에서 자격증을 딴 뒤 승선하도록 한 것이다. 이 모든 조치들이 말하는 것은 단순 명료하다. “기본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병사 기본 훈련과 초보적인 정비의 부실이 가장 큰 문제로 대두됐다.
수천억대의 장비도 결국 사람이 움직인다. 여느 조직과 마찬가지로 군에서의 사고도 기본이 부족한데서 나온다. 실탄사격이 진행되고 있는 사격장 옆으로 태연하게 병사들을 걷게 하고, 북한의 해킹으로 군사기밀이 무더기로 새나가는 크고 작은 사고 때마다 우선 거짓말로 땜질하는, 동아시아 분단국가의 ‘이상한 군대’와 확연하게 다른 점은 책임 문제에 대한 처리다.
미해군은 지난 11일 존 매케인함의 알프레도 산체스함장을 보직해임했다. 지난 8월23일자로 조지프 오코인 7함대 사령관을 해임한 데 이어 계급순으로 징계가 내려가는 중이다. 9월18일에는 제70임무단장인 찰스 윌리엄스 제독(소장)과 15구축함전대장 제프리 베넷 대령을 파면했다. 특히 오코인 사령관은 전역을 몇주 앞둔 상황이었지만 단칼에 해임했다. 추후 조사결과에 따라 책임을 묻겠다는 방침이다. “수십년 동안 조국과 민족에 헌신한 공로를 감안하여…”라는 식의 입에 발린 온정주의 언사 끝에 솜방망이 처벌을 하기 일쑤인 우리와는 사뭇 다른 단호함이다.
미군도 실수를 한다. 국내에선 신사이지만, 해외에선 잔혹행위로 지탄을 받기도 한다. 2003년 조지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침공 뒤에는 수감된 테러용의자들을 짐승처럼 학대하는 사진이 공개돼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경고음이 울릴 때마다 기본으로 돌아가고, 추상 같은 기강을 유지하는 한 국민적 지탄은 받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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