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문제를 핵이나 미사일, 인권 등으로 나눠 낱개로 풀 수는 없다. 지난 20여년 동안 실패한 이유다. 포괄적으로 풀어야 하며 그 방법은 단연코 평화조약 체결뿐이다.” 누군가 이런 주장을 한다면 전혀 새롭지 않다. 한·미 양국 일각에서 숱하게 제기돼온 대북 직접상대론(engagement)의 연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같은 사람이 같은 장소에서 “그렇다고 대북 무력사용 가능성을 배제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그 사람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인수위원회 자문 출신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우리는 지난해 미국 대선기간부터 미국 주류언론이 전하는 트럼프 대통령 비판에 익숙하다. 하지만 미국 언론과 정계, 재계를 통틀어 미국 주류사회는 트럼프의 당선을 예측조차하지 못했다는 점을 종종 간과한다. 마찬가지로 미국 주류사회의 트럼프 비판 역시 ‘트럼프 시대’라는 현실을 바꾸지 못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트럼프 진영 안에서 보는 시각도 접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국립외교원과 세종연구소가 주최한 동북아평화협력포럼 참석차 내한한 마이클 필스버리 미국 허드슨연구소 중국전략연구센터장을 지난 11월16일, 17일 두차례 서울 홍은동 그랜드힐튼호텔에서 만난 연유다. 지난해 미국 대선과 대선승리 뒤 인수위에 외교안보전략, 특히 아시아 전략을 자문해온 그는 미국 주류사회에서 예외적으로 공개적으로 ‘트럼프 지지자’임을 자처하는 학자이다.
필스버리는 컬럼비아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15년 마오쩌뚱·덩샤오핑·시진핑으로 이어지는 세계패권 국가로의 대장정을 하고 있는 중국을 분석한 <백년의 마라톤>이라는 베스트셀러의 저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책상물림의 서생(書生)과는 거리가 멀다. 1970년대 중반 국방부 정책담당 부차관보를 역임한 것을 비롯해 40여년 동안 현장을 누빈 군사, 전략, 중국 전문가이다. 중앙정보국(CIA), 국방부, 의회 등에서 전략자문을 하는 한편, CIA 비밀프로젝트에 발을 담갔었다. 중국어에 능통하며 ‘바이방루이(白邦瑞)’라는 중국이름을 갖고 있다.
두차례에 걸쳐 나눈 필스버리와의 대화에서는 트럼프의 사고구조(mindset)룰 엿볼 수 있는 ‘내부자의 시선’이 감지됐다. 트럼프는 ‘화염과 분노’ ‘폭풍 직전’ ‘북한의 완전한 파괴’ ‘(김정은은) 작은 로켓맨’ 등의 험한 발언으로 올해 초부터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발사와 6차 핵실험을 벌여온 북한과 말싸움을 벌여왔다. 그러다가 지난 11월7일 방한 첫 일정으로 오산기지에서 미군 장성들로부터 북한의 동향과 관련한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돌연 “모든 게 잘 될 것이다. 잘 되고 있다. 잘돼야만 한다”는 말을 내놓았다. 대북 태세가 완연하게 누그러졌다. 두가지 입장 중 어느 쪽이 트럼프의 전략일까. 필스버리는 한반도 평화조약 체결이 긍극적인 목표이지만 그 과정에서 필요하다면 북한에 대해 최소한의 제한적인 공격을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장시간 나눈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재정리하기 위해 주제별 문답형식을 취했다.
하지만 역사상 많은 평화조약이 그랬듯 ‘무력사용(use of force)’ 가능성을 배제한다면 실현되기 쉽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북한에 대한 어떠한 선제공격도 대규모 전쟁으로 비화할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최소한의 제한적인 대북 공격패키지로 평화조약 체결의 촉매효과를 볼 수 있다. 공격 대상도 최소화해 15곳쯤으로 알려진 북한 북부의 핵·미사일기지로 제한해야 한다. 공격 전에 중국과 러시아를 설득, 북한에 대해 ‘미국의 제한공격에 어떠한 대응도 하지 말 것을 권고한다’는 메시지를 보내야 한다. 북한이 보복으로 휴전선의 장사정포를 동원해 서울을 공격한다면 북한을 완전파괴할 것이라는 경고도 보내야 한다. 공격을 위한 공격이 아니다. 평화를 위한 제한적인 공격이다. 베트남전 당시 미국과 월맹은 파리에서 수년간 평화협상을 했지만 진전이 없었다. 월맹은 헨리 키신저의 주장으로 폭격을 한 뒤에나 적극성을 띠었다. 키신저와 (월맹 지도자) 레둑토가 노벨 평화상 공동수상자로 지명된 연유다. (레둑토는 수상을 거부했다.) 한반도 평화조약 체결을 성사시키려면 중국의 협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시진핑 주석이 잘 하면 노벨 평화상을 받을 수도 있다.”
-대북 무력사용은 리스크가 너무 큰 게 아닌가.
똑똑한 사람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대북 경고가 허풍(bluffing)일 것이라면서 어떠한 대북 무력사용도 안된다고 하지만, 이를 허풍으로만 받아들인다면 상황 개선은 물론, 평화도 불가능해진다. 아시아 순방기간 미국 항모전단 3개가 한반도 부근 해역에 투사된 것은 대통령의 결정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미국에서 대북 제한적 공격의 필요성을 내놓은 뒤 나는 많은 비난을 받았다. ‘한반도에서 전쟁은 안된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말에 동의한다. 당연히 모든 사람들의 첫번째 선택지다. 하지만 김정은은 ‘미국이 공격할 가능성도 있구나’라는 생각을 가져야만 진지하게 협상에 임할 것이다.
무력을 동원하지 않고 체결한 평화조약은 거의 없다. 나폴레옹 전쟁 뒤 빈 조약(1815년), 1차 세계대전 뒤 베르사유 조약(1919년), 태평양전쟁 뒤 샌프란시스코 조약(1951년) 등 주요 전쟁을 매듭지은 평화조약들은 모두 무력사용 또는 전쟁 뒤에나 체결됐다.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은 베르사유조약의 협상 때 파리에 6개월 동안이나 체류했다. 평화조약안에 포괄적인 내용을 담으려면 논의가 길어질 수밖에 없다.”
-아무리 제한적인 공격이라도 중국이 동의하겠는가.
“미국과 중국의 전략적 협력관계는 오래됐다. 나의 책 <백년의 마라톤>에서 몇년 전 비밀이 해제된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의 1980년대 초 국가안보결정지침(NSDD)들을 소개한 바 있다. 미국이 중국에 육해공 전략기술과 미사일 기술을 전해줬음을 말해준다. 레이건은 닉슨-포드-카터 행정부의 대북 노선을 따랐을 뿐이다. 레이건 행정부는 베트남군을 캄보디아로부터 내몰기 위해 중국과 비밀리에 협력하며 매년 200만달러를 지출했다.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태국도 참가한 328프로젝트였다.
<백년의 마라톤>에는 미·중 전략적 협력을 다룬 기밀서류 12건의 내용이 사상 처음 소개됐다.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하자 CIA는 역시 중국과 극비리에 협력하면서 모두 20억달러를 지출했다. 아프간 반군을 돕기 위해서였다. 기밀이 밝혀지기 전까지 상상도 못했을 일이다. 미국과 중국의 전략적 협력의 역사는 길고 깊다. 북한 문제에도 먹힐 수 있다.”
-조지프 던포드 미국 합참의장이 지난 8월 중국을 방문 팡펑후이 인민해방군 참모총장과 함께 군작전 상황에서 상호교신을 정례화하고 확대하기로 합의 한 것도 그러한 협력의 일환인가. 한반도 유사시 주한미군 사령관이 인민해방군 북부전구사령관에서 직접 전화를 거는 내용이 포함됐다는 보도도 있었다.
“아니다. 순전히 나의 아이디어다. ‘필스버리 제안’이라고 해두자. 나는 트럼프 인수위(transition team) 자문을 지냈고 여전히 ‘트럼프 지지자’이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대리인’은 아니다. 평화조약은 순전히 나의 제안일 뿐이다.”
“역사상 어떤 전쟁도 레토릭 때문에 일어난 적은 없다.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내가 공부한 컬럼비아대 정치학부는 전쟁의 원인(cause of war)을 연구하기 위해 설립됐다. 레토릭도 그 원인의 하나라고 내가 논문을 썼다면 박사학위를 거부당했을 것이다. 물론 오스트리아 황태자 피살이 계기가 된 1차 대전처럼 우발적인 전쟁도 있다. 하지만 레토릭 만으로 일어난 전쟁은 없다.
나는 트럼프 대통령의 모든 공식, 비공식 말과 트위터 메시지를 정리하고 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미국이 먼저 북한을 공격한다는 말은 없다. 반드시 ‘북한이 미국이나 우방을 공격한다면’이라는 조건이 있다. 비판론자들은 조건절을 빼고 발언내용을 과장해 오히려 위기를 부추겼다. 트럼프는 ‘김정은이 작고 뚱뚱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김정은이 작고 뚱뚱하다고 비난하지 않았는데, 왜 그는 나를 늙다리라고 했나’라고 하지 않았나.”
-트럼프의 아시아순방을 총평하자면.
“키신저는 유럽사의 경험에서 얻은 ‘세력균형(Power of Balance)론’을 아주 신봉한다. 세력균형을 위해 동맹국을 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키신저를 처음 만난 것은 아니다. 여러 번 만났다. (그렇다면 트럼프는 키신저의 세력균형론을 신뢰하는가.) 모른다.”
“그 장애물은 치워졌다. 중국 측은 사드 레이더의 반경을 바꾸기 쉽지 않고, 중국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탐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북한 미사일 방어용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베이징에서 벌어지는 토론을 간과하면 실수를 하게 된다. 중국 집권당은 2개가 아니지만, 주요이슈에 대해서는 늘 다른 의견이 있다. 대부분의 이슈를 놓고 강·온파 간에 토론을 벌인다. 강경론자들은 사드를 완전히 철수시키도록 한국을 압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사람들은 제한적인 숫자와 제한적인 레이다 반경을 유지한다면 괜찮다고 생각한다. 중국은 또 사드 레이다가 일본을 비롯해 다른 나라와 연계되는 것을 반대한다. 하지만 나는 문재인 대통령이 다음달 베이징 때 사드와 관련해 중국 측과 ‘궁스(共識·공감대)’를 이룰 것이라고 낙관한다.”
-트럼프는 너무 자주 돌발적인 발언을 내놓는다. 여느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듣지 못했던 말들이다. 이 모든 것이 상대를 당황케한 뒤 그 반응을 보고 전략을 구상하는 거래방식에서 나온 것인가.
“맞다. <거래의 기술>을 비롯한 그의 책들을 보면 상대를 ‘예측불가능하게’ 하는 것이 그가 사업에서 터득한 방식이다. 트럼프의 방식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와의 관계에서 먹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유세과정에서 ‘나토는 쓸모없는 기구’라고 비난했다. 지난 4월 트럼프가 나토 회의에 참석했을 때 나토 규정대로 국내총생산(GDP)의 2%가 안되게 분담금을 내는 국가들을 지목하자 달라졌다. 분담금을 더 내기 시작했다. 이를 바라본 유권자들은 좋아하지 않았겠나.”
-트럼프는 전혀 새로운 세계관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이 역시 종래의 미국 대통령들과는 사뭇 다른 스타일이다. 특히 TPP를 비롯한 다자간 자유무역협정(FTA)에 반대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유·공정·상호 호혜적인 양자 FTA를 맺겠다고 한다.
트럼프가 어떻게 대선에서 이겼는지를 되돌아봐야 한다. 힐러리 클린턴은 워싱턴의 낡은 정치인이다. 유권자들이 낡은 정치인을 거부한 것이다. 그들은 세련되고 합리적인 정치인들이다. 하지만 많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트럼프는 다르다. 이전에 어떤 공직도 맡아본 적이 없다. 평생 사업만 하다가 곧바로 백악관으로 온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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