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살의 현장 스레브레니차에서 2012년 520여구의 유해가 새로 발견됐다. 그해 7월9일 보스니아 무슬림 여자들이 친척의 유해를 담은 관 앞에서 추모하고 있다. 라트코 믈라디치에 대한 ICTY의 판결 하루전인 지난 21일 AP통신이 다시 내보낸 자료사진이다. AP연합뉴스
사람은 언제 가장 잔인해질까. 현대사의 비극을 보면 많은 경우 스스로 공포감에 휩싸일수록 더 잔인해졌다. 극도의 잔인함은 극도의 두려움의 뒤틀린 표출인 셈이다. 최대 150만명이 희생된 캄보디아 킬링필드에서 크메르루즈 병사들이 학살의 광기를 벌인 이유의 하나는 “베트남이 침략한다”는 소문이었다. 캄보디아내 베트남 주민이 학살당하면서 결국 1979년 베트남이 실제 침공했지만, 그 몇년전부터 베트남 침공에 대한 공포가 간첩 또는 잠재적 부역 혐의자들에 대한 학살의 광기에 석유를 부었다.
■조작된 공포→증오→학살의 악순환
‘형제애와 단합(Brotherood and Unity)’의 깃발 아래 2개의 자치주(보이보디나, 코소보)와 6개의 공화국(세르비아·크로아티아·보스니아·슬로베니아·마케도니아·몬테네그로)이 평화로이 어우려져 살던 유고슬라비아 연방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 역시 정치적으로 조작된 ‘거짓 공포’였다.
2017년 현재, 세계 곳곳에 만연하고 있는 포퓰리즘은 1990년대 초 보스니아 내전에 그 원형이 있었다. 바로 민족주의와 ‘거짓 공포’에 젖줄을 대고 있는 증오의 감정이다. 무슬림이 일자리는 물론 국가정체성마저 위협한다는 거짓 공포가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은 물론, 프랑스와 독일, 이탈리아, 헝가리, 폴란드 등 유럽을 휩쓸고 있지 않은가. 다른 점이 있다면 아직 구미 각국의 포퓰리즘이 물리적 내전으로 번지지 않았다는 점 뿐이다. 사회적으론 이미 내전상태다. 큰 틀에서 진행순서 및 경로는 동일하다. 정치적 의도→미디어를 통한 거짓 공포의 확산→공포의 증오화→충돌로 이어지는 메커니즘인 것이다. 라트코 믈라디치 전 세르비아계 총사령관에게 종신형을 선고한 지난 11월22일 국제유고전범재판소(ICTY) 판결을 계기로 보스니아 전쟁을 되돌아 보는 이유다.
주말 저녁 베오그라드 대학 구내 카페는 젊은이들이 독차지하는 공간이 아니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편안하게 식사와 와인, 커피를 즐기는 공간이었다. 그곳에는 보스니아계 무슬림들도 섞여 있었다. 당시 베오그라드 최고 인기곡 역시 보스니아 여가수의 노래였다. 1995년 11월이면 보스니아 스레브레니차의 인종청소가 일어난지 4달이 된 시점이다. (전쟁은 최악을 겪은 뒤 사그라든다. 보스니아 전쟁은 같은해 12월 데이턴협정 체결로 종식됐다.) 세르비아계가 인종청소를 위해 학살은 물론 무슬림 여성들을 집단 강간했다는 뉴스로 세계가 분노하던 시점이다. 하지만 세르비아 수도 한복판에서 보스니아계가 활보를 하는 것은 물론 서로 어울려 춤을 추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가. 기자가 이야기를 나눈 주민들은 모두 “전쟁은 전쟁으로 재미를 보는 사람들이 일으켰을 뿐, 보통사람들과는 관계가 없다”는 말을 내놓았다. 전쟁의 참화에 휩싸인 보스니아 내에서도 무슬림,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계가 아무런 이질감 없이 섞여 살았다는 말도 전해주었다. 실제로 전쟁 발발 전까지 ‘형제애와 단합’은 2차대전 이후 유고연방의 핵심가치였다. 류블라냐(슬로베니아)-자그레브(크로아티아)-베오그라드(세르비아)-스코페(마케도니아)로 남북을 잇는 고속도로의 이름이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을 바꿔놓은 것은 정치였으며, 이에 복무한 나쁜 언론이었다.
1991년 6월25일 크로아티아가 유고연방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면서 먼저 정정이 불안해진 곳은 크로아티아다.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계가 독립을 선포, 크라이나 공화국을 표방했다. 크로아티아계와 세르비아계 민병대 사이에 전운이 짙어졌다. 1991년 10월15일 보스니아 의회가 독립선언(공식 독립선언은 1992년 4월7일)을 하자 이번에는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계와 크로아티아계가 각각 독립 공화국을 표방했다. 크로아티아 수도 자그레브와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에서는 각각 소수민족으로 전락한 동족이 위험에 처했다는 소문이 급속히 퍼지기 시작했다. 바탕에는 1991년 3월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세르비아 대통령과 프란요 투지만 크로아티아 대통령이 보스니아를 분점, 각각 자국에 통합키로 한 밀약이 있었다.
보스니아계는 크로아티아계와 세르비아계의 공격을 과장 선전하고, 크로아티아계는 세르비아계와 보스니아계의 공격을, 세르비아계는 보스니아계와 크로아티아계의 공격을 선전했다. 그 결과 보스니아 내 동족들을 돕기 위한 기금이 걷히고 무기와 민병대가 속속도착했다. 이와중에 방화와 약탈을 통해 거액을 축재한 이들이 있었다. 실제로 3개의 종족 간에 자행된 광범위한 인종청소와 집단강간은 상당부분 민병대에 의해 이뤄졌다. 지난 11월22일 국제유고전범재판소(ICTY)가 라트코 믈라디치 세르비아계 스르프스카 공화국 사령관에게 인종청소 및 전쟁범죄, 반인도적범죄 등의 혐의를 물으면서도 보스니아 6곳에서 자행된 인종청소에 대해서 무죄를 선고한 이유다.
일례로 보스니아 무슬림과 크로아티아계 매체들은 세르비아계가 6만명의 무슬림 여자들을 강간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유엔 주도하에 국제사회가 조사에 나서자 보스니아 무슬림 정부가 제출한 증거에는 피해자가 126명에 불과했다. 조사결과 전체 2400명이 강간피해를 당했으며, 무슬림은 물론 크로아티아계와 세르비아계 여성들도 포함됐다. 민족청소 및 전쟁범죄 역시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 자행된 혼란의 도가니였다. 이 와중에 특정 정파의 선전에 넘어간 서방 주류매체들의 과장, 허위보도가 불투명성을 더했다. 전쟁이 끝나고 세르비아계 뿐 아니라 무슬림계와 크로아티아계 군지지휘관들도 민족청소 또는 전쟁범죄, 반인도적 범죄 혐의로 ICTY에 기소돼 종신형 또는 수십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투즈만은 1999년에 사망함으로써 기소를 피했다.
보스니아를 분할하려는 밀로셰비치와 투즈만의 정치와 이에 복무한 나쁜 미디어가 주범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혼란을 틈탄 범죄집단이 구성한 민병대가 피해를 키웠다. 영국 사학자 노엘 말콤은 1994년 “지난 15년 동안 보스니아의 무슬림, 크로아티아계, 세르비아계 마을을 여행하면서 민족 간 증오가 들끓고 있었다는 주장을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1991~1992년 기간 동안 베오그라드에서 라디오와 TV를 지켜본 뒤에야 왜 보스니아 세르비아계 주민들이 ‘(크로아티아의)우스타샤와 (보스니아의)이슬람 원리주의 지하드 전사들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다’고 믿게 됐는지 알게 됐다”고 기술했다. 같은해 저서 <보스니아, 약사>에서 내린 결론이다. 종교분쟁설도 마찬가지다. 스탠퍼드 대학 글로벌환경 개발윤리학(EDGE)의 ‘유고분쟁의 역사 및 분쟁 분석’ 보고서는 “종교갈등의 어떠한 근거도 없었다”면서 “보스니아 전쟁은 과거의 민족 간 증오의 결과가 아닌, 극단적인 정치인들에 의한 날조(fabrication) 때문이었다”고 결론지었다. 전쟁을 조작했던 정치인과 군인들은 대부분 죽거나 감옥에 있다. 밀로셰비치는 네덜란드의 ICTY 감옥(2006년)에서, 투지만(1999년)과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 보스니아 대통령(2003년)은 자연사했다. ‘형제애와 단합’의 고속도로는 끊겼다. 그 폐해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몫이다. 라트코 믈라디치는 조연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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