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코르 와트를 파괴하는 나무. 왕성하게 성장하는 나무가 사암으로 건축된 사원 건물을 위협하고 있다.
김진호 국제전문기자
한여름 작열하는 태양 아래 앙코르와트를 처음 찾은 것은 1996년이었다. 무척이나 후덥지근했다. 곡창지역인 바탐방을 중심으로 크메르 루주의 잔당이 준동했고, 남자들이 집 앞 평상에 앉아 태연하게 M16 소총을 분해하고 소지하던 시절이었다. 그때 구입한 론니 플래닛 국가안내서 캄보디아편은 123쪽에 불과했다. 당시만 해도 캄보디아 현장답사가 어려웠기에 많은 내용을 담지 못했음을 말해준다.
재작년 꼬박 20년 만에 앙코르와트를 다시 찾았다. 최신 론니 플래닛은 족히 400쪽이 돼 보였다. 하지만 20년 전 현지에서 구입한 옛날 책을 버리지 않았다. 낡은 책의 갈피에 앙코르와트 1일 입장권이 꽂혀 있었다. 가격은 20달러. 놀랍게도 20년 뒤에도 같은 가격이었다. 캄보디아 관광당국이 하루 입장료를 37달러(3일 62달러·1주일 72달러)로 올린 지난해 1월 전까지 유지한 가격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을 찾는 탐방객을 배려한 국가 차원의 서비스였을까. 아니면 그대로 방치한 결과일까.
20년의 세월을 두고 방문한 앙코르와트는 입장권 가격과 함께 또 다른 의문을 남겼다. 입장권 판매 수입이 고스란히 베트남에 간다는 말이 끊이지 않았다. 적어도 현지인들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국회에서 야당 의원들이 이를 집요하게 쟁점화하기도 했다.
지난 7월29일 총선에서 여당인 캄보디아인민당(CPP)이 압승했다. CPP는 하원 125석을 모두 석권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33년간 총리직을 유지해온 ‘스트롱맨’ 훈센 총리(66)가 다시 5년 임기를 더 하게 됐다는 소식을 듣고 떠오른 기억들이다.
캄보디아의 역사는 태국과 베트남 사이에서 생존을 모색해온 과정이었다. 앙코르와트가 있는 시엠레아프(Siem Reap) 지역의 지명 자체가 시엠, 즉 ‘태국에 대한 승리’를 뜻한다는 학설도 있다. 크메르인들은 12세기 시엠을 몰아낸 자리에 장엄한 신의 나라를 건설했다. 하지만 앙코르 제국의 영광은 비옥한 캄보디아를 ‘밥주발’ 정도로 여긴 태국과 베트남의 경쟁적인 침탈에 의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메콩 델타의 옥토는 베트남 영토가 됐다. 앙코르와트의 입장료가 20달러로 책정됐던 1990년대는 캄보디아 현대사에서 중요한 시기였다. 크메르 루주 이후의 혼란이 국제사회의 중재로 간신히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른 뒤 그 안정의 의미는 자유 총선과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가 보장되는 민주주의 국가와는 거리가 멀다. ‘훈센에 의한, 훈센을 위한, 훈센의 국가’로 퇴행했기 때문이다.
훈센 캄보디아 총리가 지난 1일 수도 프놈펜에서 측근들에 둘러싸인채 양 손의 검지를 들어 보이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훈센 총리의 집권여당 CPP는 지난 달 29일 총선에서 압승을 거뒀다. 프놈펜/AP연합뉴스
앙코르와트의 수입이 베트남으로 간다는 소문은 전혀 근거없는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베트남계 캄보디아인이 창업한 소키멕스(Sokimex)그룹이 1999년부터 17년 동안 입장권 판매사업을 독점했다. 캄보디아 공기업 압사라와 이익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운영했다. 소키멕스는 석유사업으로 시작해 호텔, 리조트 운영은 물론 군 납품업에도 손을 댔다. 그 창업주 속콩(63)은 캄보디아 태생이지만 부모가 모두 베트남 사람이다. 크메르 루주의 킬링필드 당시 3년간 베트남에서 피난살이를 했다. 베트남군이 캄보디아를 전면 침공한 1978년 말 돌아온 23세 청년 속콩은 국영 석유판매소를 매입하면서 사업을 키웠다. 처음부터 정·경 유착의 결과물이었다. 10년간 캄보디아를 점령한 베트남군 치하에서 민간기업의 사업은 베트남 또는 베트남이 내세운 훈센 정부와의 거래 없이는 불가능했다. 짧은 베트남 체류(2년) 뒤 역시 베트남군 치하에서 성공가도를 달렸던 훈센과 비슷한 이력이다. 훈센의 친베트남 성향은 2012년 작고한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의 말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그는 훈센을 두고 ‘외눈박이 베트남의 머슴’이라고 지칭했다.
앙코르와트는 캄보디아인들의 민족적 자랑이다. 국기에도 그려넣었다. 관광산업이 섬유산업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수입원인 나라에서, 더구나 국가 상징의 수입이 베트남의 호주머니로 들어간다는 의혹은 민족 감정을 건드리기 십상이었다. 캄보디아 사람들 사이에 베트남인에 대한 증오심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크메르 루주의 킬링필드(1975~1979년) 기간 동안 가장 큰 피해를 본 소수민족이 베트남계인 까닭이다. 무고한 캄보디아인들도 ‘베트남의 첩자’라는 누명을 쓰고 죽어갔다. 이러한 민족적 반감에도 불구하고 훈센 정부는 2016년 앙코르와트의 입장권 판매를 국영기업 앙코르 엔터프라이즈에 맡길 때까지 소키멕스에 사업독점권을 허용했다. 속콩은 2008년 베트남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과거에는 여러 이유로 내가 베트남 사람이라는 게 알려지는 걸 원치 않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나는 베트남 사람이고, 그 사실이 자랑스럽다”고 밝혔다. 소키멕스는 지금도 캄보디아군에 군복과 일용품을 납품하고 있다.
앙코르와트의 입장권 판매 수입은 지난해 1억달러(1억800만달러)를 돌파했다. 프놈펜포스트에 따르면 일각에서 입장권 가격 인상 탓에 방문객이 줄어들 것을 우려했지만 기우였다. 전년 대비 12% 늘어나 총 250만명이 방문했다. 하지만 캄보디아 사회는 여전히 부패가 판을 친다. 관광수입이 베트남에 가지는 않더라도 국가경쟁력을 높이거나, 1600여만 국민의 복지에 사용된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사진기자는 허투루 앵글을 잡지 않는다.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의 콕피치에 걸려 있는 집권 캄보디아 인민당( CPP)의 홍보물을 굳이 창살에 비치게 찍었다. 프놈펜/로이터연합뉴스
1993년 국제사회 감시하에 치른 총선에서 CPP가 패배했음에도 끝내 권력을 놓지 않았던 훈센이다. 이번 총선을 앞두고 야당과 독립언론, 시민단체 등 민주주의 제도들을 조직적으로 파괴했다. 지난해 제1야당 캄보디아구국당(CNRP)을 정부 전복 혐의로 강제해산하고 그 대표를 구금했다. 전혀 정권에 위협이 되지 않을 군소 야당도 좌시하지 않았다. 한때 훈센과 공동총리를 지냈던 시아누크 국왕의 아들 라나리드(74)는 선거를 한 달여 앞둔 지난달 의문의 자동차 충돌사고로 병석에 누웠다. 언론에 재갈을 물린 것은 물론이다. 지난 5월엔 사실상 유일한 독립언론인 프놈펜포스트의 사주를 바꿨다. 양식 있는 유권자들이 투표를 거부하는 것도 녹록지 않았다. 정부가 나서 “투표 안 하면 반역자”라고 압력을 가했기 때문이다. 이례적으로 총선 무효표가 8.6%(60만표)에 달한 배경이다. 권력욕은 결코 그 끝을 모른다.
“74살 때까지 권력을 잡겠다”고 공개 선언한 훈센은 지난달 30일 아들 훈마네트 중장(40)을 군 요직에 배치했다. 미국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뉴욕대를 거쳐 브리스톨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훈마네트에 대한 우상화 작업이 시작된 지는 오래다. 훈센은 “아들이 태어난 날 지붕 위로 밝은 빛이 지나갔다”면서 초자연적인 존재로 부각시켜왔다. 훈센이 압승한 날은 각국 언론에 ‘슬픈 날(sad day)’로 기록됐다.
서방 각국 정부들은 이번 총선을 불법선거로 규정했다. 미국과 유럽연합(EU) 등은 캄보디아 정부의 선거참관인 초청에도 응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훈센은 결코 외롭지 않았다. 영국 독립당과 이탈리아의 포퓰리즘 정당 프라텔리 이탈리아, 벨라루스의 친정부 정당 등 각국의 포퓰리즘 정당들이 총선 감시인단을 파견해주었다.
국제사회가 주도한 1993년 총선 이후 훈센은 억지로라도 민주주의 제도들을 유지해왔다. 미국과 EU, 일본 등의 원조를 받으려면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미국 정부는 이번 총선을 비난했지만, 훈센에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등장은 복음이었던 것 같다. 2016년 미국 대선 전에 트럼프 공화당 후보를 공개 지지한 데 이어 선거 뒤 당선을 축하했다. 이후 언론 탄압을 하면서 제도권 언론 보도를 “가짜뉴스”라고 매도하는 트럼프를 본받고 있다. 지난 3월 국내 연설 중 돌연 영어로 “피스 퍼스트(Peace First)”를 외치기도 했다. “도널드 트럼프가 말한 ‘미국 퍼스트(America First)’와 비슷하지만, ‘피스 퍼스트’는 캄보디아에 매우 귀중하다”는 말이었다.
앙코르와트의 1일 입장권. 왼쪽이 1996년, 오른쪽이 2016년 티켓이지만 20달러로 같은 가격이었다.
그러나 훈센의 빅 브러더는 트럼프도, 미국도 아니다. 그에게 권좌를 안겨준 베트남과도 과거에 비해 뜨악해졌다. 바로 중국이다. 중국은 훈센이 서방의 질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압제를 강화할 수 있게 해주는 버팀목이다. 시아누크 국왕 시절부터 시작된 중국과의 전통적 우호관계는 훈센 정부의 정치적·재정적 무게추가 되고 있다. 캄보디아가 유치한 외국의 산업투자 중 중국 자본이 70%를 점한다. 캄보디아의 ‘정치적 안정’과 값싼 노동력, 시장 선점 효과, 지정학적 이점을 노린 다목적 투자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캄보디아를 일대일로(BRI)의 주요 거점으로 삼으면서 인프라 건설을 위한 뭉칫돈도 쏟아붓고 있다. 75억달러 규모의 수력발전소 건설, 2040년까지 2230㎞의 고속도로 건설사업 등이 진행 중이다. 중국 국영기업들이 제2, 제3의 소키멕스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훈센은 ‘중국 모델’을 발전의 목표로 설정한 지 오래다. 지난 1월 베이징을 방문, “우리는 메콩강에 더 많은 다리와 더 많은 도로, 철도가 필요하다”면서 시 주석을 상대로 투자 및 원조 확대를 요구했다. 외교적으로 주고받는 거래관계도 있다. 캄보디아는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에서 노골적으로 중국 편을 들고 있다. 남사군도 영토분쟁에서 아세안이 통일된 입장을 정리하지 못하는 이유다.
앙코르와트와 바이욘 등 수많은 사원들이 있는 시엠레아프 지역은 캄보디아 내전 당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더욱 심각한 피해를 주는 것은 나무와 바람이다. 땅밑에서 솟아오르는 우람한 열대수목들이 사원을 파괴하고 있다. 핵심 건축재가 사암(沙巖)이어서 풍화작용에 의해 닳고 있는 것도 위협이다. ‘스러짐의 미학’을 간직하고 있기에 더욱 귀한 인류의 문화유산이다. 하지만 훈센의 철권통치는 결코 닳지 않고 있다. 독재정권을 밑에서부터 뒤흔들 국민의 힘도 가까운 미래에는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다.
입장권 가격을 갑자기 2배 가까이 올린 건 정상적이지 않다. 특혜 기업에 맡긴 채 방치했던 것이 분명하다. 캄보디아는 2016년 기준 5732만달러(무상 3693만달러)의 유·무상 원조를 한국으로부터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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