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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읽기

브라질 월드컵의 사회학, 러시아 월드컵의 정치학

by gino's 2018. 7. 10.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월드컵 대회 기간 중인 지난 6월28일 모스크바 붉은 광장의 축구공원에서 열린 어린이 축구 시합에 앞서 시축을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잉글랜드팀이 월드컵 결승전에서 독일을 누르고 우승을 차지한 것은 1966년의 일이다. 하지만 챔피언의 자리를 지키는 것은 녹록지 않았다. 4년 뒤 잉글랜드는 월드컵 준결승전에서 독일에 고배를 마셨다. 월드컵에서 날개가 꺾인 국민적 사기는 종종 정치판에 영향을 미친다. 잉글랜드의 패배는 당시만 해도 별문제가 없어 보였던 노동당 내각의 해럴드 윌슨 총리가 총선에서 보수당에 패하는 이변으로 연결됐다. 정치는 유권자들의 마음을 토양으로 성장한다. 그 마음에 집단 트라우마가 생긴다면 결코 우호적인 환경이 아니다. 축구, 그것도 월드컵에서의 승패는 국민 사기에 영향을 미친다. 현직 리더십이 그 파장에서 자유롭지 못한 연유다. 파이낸셜타임스가 지난달 29일자 톱사설 ‘독일의 패배가 메르켈의 사기를 떨어뜨린다. (예선) 탈락까지는 아니더라도’로 제기한 월드컵과 정치의 함수관계다.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57위인 한국이 독일(1위)을 꺾은 6·27 러시아 ‘카젠 대첩’은 우리뿐 아니라 다른 나라 국가대표팀의 팬들에게도 기쁨이다. 너무나 오랫동안 화가 날 정도로 탁월한 성적을 거둬온 독일 전차군단에 저마다 수모를 당했던 쓰라린 기억들이 있는 나라일수록 더 그럴 것이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이를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라는 뜻의 독일어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를 동원해 표현했다. 챔피언 자리는 쟁취하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더 어렵다. 독일팀(디만 샤프트) 역시 챔피언으로서 부담감이 작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국전 참패는 여기에 나이 많은 선수들과 낡은 전략의 3가지 악재가 겹쳐서 일어났다는 평가다. 독일이 러시아 월드컵에서 고전을 치를지도 모른다는 분석은 있었지만, 예선 탈락을 내다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월드컵 러시아 대표팀이 16강전에서 승부차기 끝에 스페인을 꺾은 지난 1일 저녁 모스크바 도심에서 시민들이 자동차마다 헤드라이트를 켜고 경적을 울리며 자축하고 있다. 2인 이상 거리 시위 또는 집회를 불법으로 규정한 러시아에서는 월드컵 기간 동안 예외적으로 집단 집회를 허용하고 있다. 모스크바 | EPA연합뉴스


독일의 패배는 그렇지 않아도 안팎으로 만만치 않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정치 운명과 무관치 않다. 독일의 요하임 뢰브 감독과 메르켈 총리는 여러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우선 오랜 리더십과 눈부신 성공의 전력이 비슷하다. 뢰브 감독은 12년 동안, 메르켈은 13년째 현직을 지켜왔다. 뢰브는 2014년 월드컵 우승뿐 아니라 2006년, 2010년 월드컵에서도 4강 진출을 성공시켰다. 메르켈 총리는 비록 난민 및 이민 문제로 정치적, 외교적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재직기간 중 독일을 유럽 최강의 경제대국으로 이끌었다. 2015년 타임지 ‘올해의 인물’ 겸 ‘자유세계의 지도자’로 국제적인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기도 하다.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위협하는 극우 포퓰리즘에 맞서 리더 역할을 한 지 오래다. 하지만 두 사람은 모두 과거 영광의 기억이 아득할 정도로 잔인한 ‘현재’를 만나고 있다.

예선 탈락 전망 깨고 잇단 승리
서방 상대 이미지 반전 기회로
“승자는 푸틴” “별로 도움 안돼”
평가 엇갈리지만 푸틴 ‘쏠쏠’
월드컵 개최로 외교 수세 상쇄

축구와 정치는 밀접하게 연결돼
독일, 예선 4위로 탈락 악재에
안팎 시련 메르켈 주름살 깊어져
4년 전 7대 1 참패 맛본 브라질
일상 불운에 “7대 1” 속어 유행

뢰브는 예선 탈락의 책임을 지고 사퇴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다. 메르켈은 지난해 총선 이후 9개월 만에 간신히 구성한 연정이 다시 붕괴될 위기를 가까스로 넘겼다. 지난 1일 집권 기민당(CDU)의 70여년 연정파트너인 기사당(CSU) 출신 호르스트 제호퍼 내무장관이 더 강력한 난민정책을 요구하면서 사의를 표명했다. 다행히 다음날 제3국에 망명신청을 했던 난민들을 해당 국가로 되돌려보내는 ‘환승센터’를 건립하자는 타협안을 수락했지만 메르켈로선 십년감수를 한 셈이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오른쪽)가 지난 7월5일 베를린에서 정상회담을 갖기 위해 방문한 테레사 메이 영국 총리를 영접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로이터연합


유럽연합(EU) 정치무대에서는 이번 월드컵에 진출하지 못한 이탈리아(19위)와 헝가리(51위), 슬로베니아(56위)가 반난민, 반이민의 극우 포퓰리즘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메르켈은 독일이 한국에 충격적인 패배를 당한 지난달 27일 경기 뒤 “독일 축구의 검은 날”이라면서 “오늘 밤 우리 모두는 매우 슬프다”고 한탄해야 했다. 축구와 정치는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그 관계가 어떻게 풀려나갈지 예측하기 어려울 뿐이다.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는 브렉시트(EU 탈퇴)를 둘러싼 국내의 불안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팀(12위)의 4강 진출 효과를 기대할 만하다. 타블로이드 신문 선이 메이 총리에게 다우닝가 관저에 잉글랜드팀의 세인트 조지 깃발을 걸 것을 제안하자 곧바로 수용한 까닭일 게다. 하지만 메이는 물론 잉글랜드 축구협회 회장인 윌리엄 왕세손을 비롯한 왕족과 고관들은 일제히 월드컵 관전을 위한 러시아 방문을 보이콧하고 있다. 영국에 체류하던 러시아의 전 스파이 세르게이 스크리팔 부녀의 독살 기도 사건의 여파 때문이다. 지난달 말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렸던 EU 정상회의에서는 메이와 샤를 미셸 벨기에 총리 간에 ‘유니폼 접전’이 먼저 벌어졌다. 선제골을 날린 것은 미셸 총리였다. 메이에게 예고 없이 백넘버 10번이 찍힌 벨기에 레드 데블팀(3위)의 유니폼을 전달했다. 메이는 뒤늦게 잉글랜드팀의 유니폼을 미셸에게 전달하면서 “동점골”이라는 조크를 던졌다. 지난달 28일(현지시간) 예선 G조 마지막 경기 결과는 벨기에의 1 대 0 승리였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축구를 축구로만 보는, 또 다른 의미의 정치를 하고 있다. 지난해 프랑스 대선에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승리를 거둔 마크롱 대통령은 월드컵 개막전인 지난 5월 말 언론 인터뷰에서 “성공한 시합은 승리한 시합”이라면서 40세 지도자의 젊은 패기를 내보였다. 유니폼의 푸른색을 빗대어 레블뢰(les Bleus)라고 불리는 프랑스팀(7위)이 4강에 진출하면 러시아로 날아가 직접 경기를 관전할 것이라고 밝혀 인권단체들의 반발을 야기하고 있다. 프랑스 인권단체들은 시리아 내전에서 벌어지고 있는 러시아군의 잔혹행위를 빌미로 러시아 월드컵을 보이콧하고 있다. 축구광이기도 한 마크롱은 “레블뢰 뒤에는 우리 모두가 있다”면서 “국가와 국민의 사기를 위해 (월드컵 승리가)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정확히 말하면 축구 자체의 승리보다 레블뢰의 선전이 가져올 반사효과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독일에 7대1로 패한 4년 전 브라질 월드컵과 마찬가지로 러시아 월드컵은 브라질 국민들에게 기쁨이 되지 못하고 있다. 루이스 이냐시오 룰라 다 실바 전 대통령의 이름이 새겨진 브라질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입은 지지자들이 지난 8일 브라질 추리티바의 연방경찰본부 앞에서 집회를 하고 있다. 브라질 법원은 3개월 동안 구금됐던 룰라 전 대통령의 석방을 명했다. 로이터연합뉴스


“매일매일이 새로운 7 대 1이다.” 브라질에선 국가대표팀 선수를 ‘선택받은 사람들(셀레상)’이라고 한다. 펠레와 호나우두, 카카를 이은 대표적인 셀레상은 네이마르. 그가 이끄는 브라질팀(2위)은 16강에서 멕시코(15위)를 상대로 마음껏 실력을 발휘했다. 세 경기만 더 이기면 통산 6번째 월드컵 우승국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4강 진출에 실패했다. 4년 전 브라질 월드컵 4강전에서 독일에 맛본 7 대 1 참패는 짙은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지우마 호세프 당시 대통령은 같은 해 재선에서 결선투표까지 가는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서민층의 경제적 어려움을 외면한 무리한 준비 탓에 국내 반발을 산 데다 대표팀의 끔찍한 패배 때문이다.


월드컵에 더해 2016년 하계올림픽을 준비하면서 생활물가까지 들썩이자 브라질 전국에서는 대회 시작 전부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월드컵이 아니라, 병원과 학교”라는 원성이 쏟아졌다. 그 끝에 얻은 독일전 ‘7 대 1’은 브라질인들의 일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속어로 굳어졌다. 일터에서 기분 나쁜 일을 겪거나, 일이 안 풀릴 때, 또는 형편없는 대중교통 서비스에 불만을 표현할 때도 “신이 내게(우리에게) 7 대 1을 주셨다”고 말한다고 허핑턴포스트가 지난 1일 전했다. 비행기를 놓치거나 무례한 손님을 만났을 때, 커피를 쏟았을 때도 “7 대 1”을 외친다고 한다. 매일매일 다른 이유에 같은 표현을 쓰는 것이다. 


이번 월드컵에서 정치적, 외교적으로 횡재를 끌어안은 지도자는 단연 주최국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다. 러시아(70위)는 스페인(10위)을 제치고 8강전에 진출한 것 만으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한국의 독일전 승리 못지않은 이변이었다. 푸틴 대통령은 사우디아라비아(67위)와의 개막전 직전 이례적으로 러시아팀(스보르나야)을 칭찬한 데 이어 자국 선수들이 골을 넣을 때마다 대놓고 기뻐했다. 러시아의 5 대 0 승리. 옆자리에 앉아 관전하던 무함마드 빈 살만(MBS) 사우디 왕세자에 대한 무례를 불사하고 자국 국민의 사기를 챙겼다. 스페인전에 승리한 지난 1일 저녁, 모스크바의 연방보안국(FSB) 사무실 앞거리에서까지 시민들이 자동차 경적을 울리고 집단으로 환성을 지르는 ‘소란행위’가 벌어졌다. 엄격한 1인 시위만 허용하는 러시아에선 지극히 이례적이라고 뉴욕타임스가 전했다. 월드컵 기간 동안 거리행사를 용인한 당국의 방침 덕분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가운데)이 지난 7월6일 모스크바 크렘린 궁에서 국제축구연맹 회장인 지아니 인판티노(왼쪽 두번째)와 전설적인 축구 영웅들인 독일의 마테우스, 멕시코의 캄포스 나바레테들과 함께 자신의 이름이 적인 유니폼을 들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AP연합뉴스


당초 예선 탈락이 예상됐던 러시아팀의 잇단 승전고는 푸틴에게 망외의 선물이 됐다. 물론 지난 3월 대선에서 4선에 성공, ‘차르’로 등극한 푸틴에게 월드컵 승리가 국내정치에 주는 의미는 적다. 하지만 2014년 우크라이나 침공 및 크림반도 병합 이후 제재를 가하고 있는 서방을 상대로 국가 이미지를 제고할 절호의 기회인 것은 분명하다. 푸틴은 대회 전부터 “사람들이 (월드컵을 계기로) 방문하면, 러시아가 어떤 나라인지 알게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월드컵 준비에 110억달러를 쏟아부어 국제사회의 제재로 어려운 나라살림이 더 어려워질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되지만, 적어도 푸틴에게는 그것을 상쇄하고도 남을 반사이익을 안겨주고 있다. USA투데이가 “무슨 일이 일어나건 (월드컵의) 승자는 푸틴”이라고 지적한 까닭이다. 하지만 영국 국제전략관계연구소(IISS)의 정치학자이자 <축구제국>의 저자인 파스칼 보니파스는 프랑스24 인터뷰에서 “서구인들에게 자신의 평판을 개선하려는 푸틴의 힘겨운 노력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짚었다.

축구는 민족주의를 가장 자극하는 스포츠다. 이번에도 각국 지도자들의 정치적 행보와 혼재돼 진행되고 있다. 승패의 희비를 국민과 함께하려는 순수한 마음도 있겠지만 정치적 포석을 한시라도 잊을 수 없는 것이 정치인의 숙명이다. 어떤 경우라도 월드컵에서 자유롭지 않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일본(61위)과 콜롬비아(16위)의 경기 직전 국가대표팀의 푸른색 유니폼 셔츠를 입고 격려하는 비디오를 트위터에 올렸다. 다카마도 공주는 일본 왕족으로 100년 만에 러시아(예카테린부르크)를 찾아 세네갈(27위)전을 지켜보았다. 이란 최고 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는 스페인에 0 대 1로 패하자, 오히려 자국팀(37위)의 나아진 경기 수준을 상찬하는 트위터 메시지를 날렸다. 월드컵의 정치학, 멀리 갈 것도 없다. 동아시아의 한 분단국에서는 16년 전, 월드컵 4위 성적을 등에 업고 축구협회장이 유력한 대선후보가 됐었다. 각국 국가대표팀의 FIFA 랭킹은 6월7일 현재 순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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