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의 현란한 원맨쇼가 글로벌 외교무대에서 다시 한번 벌어졌다. 지난달 캐나다 샤를부아의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 이어 이번엔 브뤼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정상회의가 그 장이 됐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스타일에 적응할 때도 됐건만, 늘 즉흥적인 카드를 내놓는 변덕 탓에 세계는 또다시 경악하고 있다. 국제정치의 무대가 부동산업자 흥정 장소로 변했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게다. 터무니없는 말을 던지고, 당황한 상대로부터 양보를 끌어내는 것이 트럼프가 좋아하는 ‘거래의 기술’이다. 하지만 한발 떨어져서 보면 거래는 추상적인 담론이 아니다. 사거나, 팔아야 할 부동산이라는 실체가 있는 게임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거의 일상화된 장광설 속에서도 트럼프의 최종 과녁을 가려내고, 대응 전략을 구상하는 게 전략적인 접근일 게다. 그가 심중에 둔 거래물건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고, 적정 가격을 뽑아 협상에 나서야 할 것이다. 물론 묘안을 찾기는 쉽지 않다. 멋대로 ‘골대’를 옮기는 그의 스타일 탓에 헛발질을 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모든 분야에서 미국이라는 큰 톱니바퀴와 맞물려 움직여야 하는 세계의 고민이 머무는 지점이다. 그럼에도 ‘트럼프 현상’의 실체와 거품을 가려내는 안목은 필요할 것 같다.
G7 땐 공동선언 합의도 않더니
나토정상회의땐 방위비 논쟁
기껐 합의 뒤엔 더 올리라 하고
메르켈엔 ‘러시아 포로’라 지탄
사실 독일은 유로 경제권에서
이익 챙기지만 ‘의무’엔 소홀
이때문에 동구가 트럼프 선호
그는 거칠고 즉흥적인 듯하나
견해가 틀린 것 만은 아니다
동맹을 얕잡아 보는 트럼프
러시아와 관계는 어떻게 할까
16일 미·러회담이 궁금하다
이번엔 트럼프도 정상회의 공동선언에 동의했다(트럼프가 79항의 긴 선언문을 다 읽어보았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지난달 G7 정상회의에서는 공동코뮈니케에 서명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유럽이 가장 경계하는 트럼프 외교의 3종 세트가 유감없이 발휘됐다. 월터 러셀 미드 미국 존스홉킨스대 교수가 지적한 세 가지는 기질적으로 충동적인 트럼프의 성격과 연기하는 듯한 스타일 및 대서양 동맹을 쓸모없는(obsolete) 존재로 보는 그의 세계관이다. 이 부분이 바로 흥정과 거래만으로 트럼프의 미국과 머리를 맞대기 어려운 한계다. 트럼프가 나토 회원국들의 국방예산을 국내총생산(GDP) 대비 2%로의 인상을 촉구한 것은 전혀 새롭지 않다. 나토 회원국들도 성의를 보였다. 공동선언에서 모든 회원국들이 2024년까지 GDP 2%로 국방예산을 책정하는 노력을 시작했고, 3분의 2 정도의 회원국이 목표 달성 계획을 세운 점을 평가했다. 나토 통계에 따르면 미국 국방예산이 GDP의 3.57%(트럼프의 주장은 4.2%)로 가장 많고, 29개 회원국 중 15개국이 1.5% 이하다. 올해 중 8개국이, 2024년까지 모두 18개국이 2%에 도달할 예정이다.
트럼프는 11일 만찬장에서만 해도 화기애애했다. 뜬금없이 싱가포르 대좌 이후에도 자신이 북한 비핵화에 낙관적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할애했다. ‘로켓맨’이 포함된 엘턴 존의 CD앨범을 김정은 위원장에게 전달할 것이라고도 떠벌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동맹국들의 뒤통수를 때렸다. 느닷없이 “2025년까지가 아닌, 지금 당장 2%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면서 동맹국들을 윽박질렀다. 선언문에 명시된 2024년을 잘못 말한 것은 고사하고, 이를 당장 하라는 것은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격이었다. 더 나아가 “모든 회원국들이 국방예산을 GDP의 4%로 올려야 한다”는 폭탄선언을 내놓았다. 공동선언문에 합의한 다음에 벌어진 일이라 공식적인 제안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대서양동맹을 한없이 가볍게 여기고 있음을 재차 확인시키기에 충분했다. 트럼프의 4% 돌발 제안은 백악관 참모들조차 당황케 했다고 월스트리트 저널이 전했다.
공교롭게 G7에 맞물려 북·미 정상의 싱가포르 대좌가 있었다면 이번엔 1주일 상관으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첫 정상회담이 16일 핀란드 헬싱키에서 예정돼 있다. 북한과 러시아는 모두 유럽 동맹국들로부터 지탄을 받아온 나라들이다. 샤를부아-싱가포르-브뤼셀-헬싱키로 이어지는 트럼프의 외교 행보에는 대체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피아 간 구분이 흐릿하다. 백악관 참모들도 헷갈려하는 정도다. 트럼프는 G7 정상회의 주최국 캐나다의 저스틴 트뤼도 총리를 “매우 약하고, 정직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악담을 퍼붓더니 곧이어 싱가포르에서 만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재능 있는 사람”이라고 치켜세웠다. 이번엔 트럼프가 교역, 국방예산, 이민정책을 놓고 사사건건 비난했던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제물이 됐다. 독일이 러시아산 천연가스를 수입하는 것을 두고 ‘러시아의 포로’라고 지탄했다. 옌스 스톨텐베르크 나토 사무총장에게 “우리는 러시아에 맞서고 있는데 독일은 한 해 수십억달러를 러시아에 지불하고 있다”면서 “이점을 설명해보라”고 다그쳤다. “나토가 뭐가 좋은가”라는 트위터를 날리기도 했다. 이번에도 “독일은 미국에 이어 나토의 두번째 국방비 분담국가”라는 메르켈 총리의 조리 있는 반박은 트럼프의 허풍에 묻혔다. 여기까지만 보고 “트럼프는 역시 미치광이”라고 단정한다면 오산이다.
나토 회원국들의 GDP 2% 국방예산 증액은 버락 오바마 행정부 시절인 2014년 웨일스 나토 정상회의에서 결정된 가이드라인에 따른 것이다. 자국 국방예산을 줄여 복지에 쏟아부은 유럽 회원국들을 상대로 탈냉전 이후 역대 미국 행정부가 요구해온 것의 연장이기도 하다. 무역도 마찬가지다. 미국이 대서양동맹을 유지하기 위해 가장 많은 재원을 투입하는 동안 독일을 비롯한 유럽 각국은 유럽연합(EU)의 보호망 안에서 수출산업을 육성해왔다. 트럼프는 요구만 하지 않고 거칠게 유럽을 몰아붙이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유럽이 혐오하는 것은 트럼프의 기질과 스타일만이 아니다. 가장 불길한 것은 기존 질서를 뒤흔드는 그의 ‘전복적 세계관’ 때문이다.
서구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민주주의와 자유무역을 두 기둥으로 자유주의 세계질서를 신봉해왔다. 그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미국이 가장 많은 재력과 인력을 투입해온 게 사실이다. 고도로 통합, 보호된 경제권을 공유하는 유럽연합(EU)은 기울어진 저울의 가장 무거운 ‘추’이다. 유로화를 사용하는 유로존의 탄생은 특히 독일에 또 다른 화수분을 안겨주었다. 독일은 지난해 미국을 상대로 640억달러의 무역흑자를 거뒀다. 마르크화가 유지됐다면 교역흑자는 화폐절상 압력으로 이어지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독일은 유로화의 우산 밑에서 이를 피하고 있다. 독일의 수출품은 가격이 낮아지고, 수입품은 가격이 올라가게 된 것이다. 독일 제조업은 EU 내에서 임금수준이 현격하게 낮은 불가리아는 물론 슬로베니아·폴란드·헝가리에 공장을 열었다. 자동차의 경우 해당 국가에서 조립, 미국 시장에 판매하면서 막대한 이익을 챙겨왔다. 그럼에도 독일 내 많은 여론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메르켈 정부가 지출한 유로존 구제금융에 길길이 날뛰었다. 독일이 얻은 반사이익에 대해선 함구했다. 시장경제 전환의 우등생으로 꼽혔던 중·동부 유럽의 포퓰리스트들이 독일과 EU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트럼프를 좋아하는 까닭이다.
중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EU는 2001년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이후 중국의 지식재산권 침탈과 불공평한 교역 관행에 불만을 표해왔다. 한편으론 국가별로 대중국 수출을 늘리기 위해 경쟁하는 이중성을 보여왔다. 트럼프는 EU처럼 중국에 불평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중국의 불공정 관행을 잡겠다고 팔 걷고 나섰다. 기질과 스타일이 다소 거칠지만, 본질이 틀린 건 아니다. 독일 주간신문 디 자이트의 정치담당에디터 요헨 비트네르가 최근 “유럽은 트럼프의 영혼을 껴안아야 한다”면서 들춰낸 불편한 진실의 일단이다. 비트네르는 뉴욕타임스에 “트럼프를 비난하기에 앞서 어떻게 이 지경에 이르렀고, 어떻게 빠져나갈지를 고민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주요 7개국 정상회의 첫날인 지난 6월 8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왼쪽)가 기념사진 촬영에 앞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메르켈과 마크롱(메르켈 왼쪽) 프랑스 대통령, 메이 영국 총리 등 서방 지도자들이 트럼프를 따지듯 내려다보면서 항의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반면에 트럼프는 자리에 앉아 팔짱을 낀 채 바라보고 있는 이 사진은, 이번 G7 정상회의의 실패를 상징하는 사진인 동시에 세계가 전혀 새로운 연대기를 시작하고 있음을 알리는 상징으로 남게됐다. 역시 팔짱을 낀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입을 벌리고 있는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무대의 극적인 디테일을 더한다. 로이터연합뉴스
나토는 냉전 시절 옛 소련 블록으로부터 유럽을 방위하기 위해 만든 군사동맹이다. 과거 바르샤바 조약기구 회원국들을 가입시키는 확대정책으로 러시아를 위협해왔다. 한동안 약해진 러시아 때문에 존재의 이유가 흐릿해졌다. 하지만 2014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및 크림반도 병합으로 본래의 명분을 회복하고 있다. 이번 정상회의의 또 다른 초점은 러시아 견제였다. 러시아가 꺼리는 마케도니아의 나토 가입을 가승인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 시점에 제기된 트럼프의 분담금 증액 요구는 타당성을 갖는다. 문제는 트럼프의 세계관이다. 트럼프는 국가 간의 관계를 철저하게 필요와 이익으로만 바라본다. 미국이 유럽을 필요로 하는 것에 비해 유럽이 미국을 훨씬 필요로 한다는 셈법이 기저에 깔려 있다. 트럼프는 나토뿐 아니라 유럽 자체를 허약하고 믿지 못할 파트너로 보고 있다. 유럽과 안보 및 교역관계를 조정하려는 트럼프의 의도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오랫동안 방관해온 모순을 뜯어고쳐야 할 필요도 있다. 러셀 미드 교수는 그러나 트럼프가 동맹관계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미국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경고했다.
한반도 거주민으로 간과할 수 없는 대목은 서구 일각에서 캐나다 G7과 싱가포르 북·미 대좌를 대비한 것과 마찬가지 논리로 나토 정상회의와 미·러 정상회담을 대비하고 있다는 점이다. 트럼프가 자유주의 세계질서가 끝난 곳에서 권위주의 국가들과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지 않느냐는 의구심을 표출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오른쪽)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6월12일 정상회담 가진 싱가포르 센토사 섬의 카펠라 호텔 건물 밖에서 산책을 하고 있던 도중 김 위원장이 웃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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