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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의 흑산, 몬테네그로의 '창'으로 내다본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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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no's 2018. 7. 27.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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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16일 핀란드 헬싱키에서 정상회담을 시작하면서 악수를 하고 있다. 트럼프는 이날 회담 뒤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몬테네그로 국민들은 공격적”이라면서 세계 3차대전으로 나토를 끌어들일 수있다고 발언해 평지풍파를 일으켰다.  헬싱키/AP연합뉴스


전라남도보다 약간 넓은 영토(1만3812㎢)에 제주도보다 약간 더 많은 인구(64만2000명, 2017년). ‘흑산(黑山)’이라는 국명대로 산에서 뜨는 해를 보며 하루를 열고, 산으로 지는 해를 보고 하루를 닫는 전형적인 산악국가. 해발 1000m가 넘는 두르미토르산맥이 아드리아해를 향해 직각에 가깝게 추락하면서 위태롭게 형성된 생활공간에 고래로 용맹한 남슬라브인들이 모여 살았다. 바로 몬테네그로다.  주요 외신의 여행 섹션에 주로 등장하던 ‘발칸의 흑산’이 느닷없이 국제뉴스의 초점으로 떠올랐다. 지난 10~11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렸던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정상회의 이후의 일이다. 지난해 5월 나토의 29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한 것이 뒤늦게 부각됐다. 이번에도 뇌관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입이었다.


공교롭게 미국이 발을 빼려는 나라에 중국이 들어간다. 사진은 중국이 일대일로 프로젝트(BRI)의 일환으로 건설하고 있는 몬테네그로 비오체의 고속도로 건설 현장이다. 중국은 최근 동유럽에서 인프라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비오체/로이터연합뉴스

나토 정상회의에서 유럽연합(EU)을 ‘적(foe)’이라 칭하고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를 잇달아 모욕했던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16일 핀란드 헬싱키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만난 뒤 내놓은 말이었다. 트럼프는 64만 몬테네그로 국민들을 공격적이라면서 나토를 3차 세계대전에 끌어들일 위험한 나라로 지목했다. ‘몬테네그로 망언’을 유도한 것은 폭스뉴스의 인터뷰 진행자 터커 칼슨이었다. 미군의 해외 개입을 반대해온 그는 트럼프에게 “작년에 나토에 가입한 몬테네그로가 공격을 받는다고 치자, 왜 내 아들이 달려가 그 나라를 지켜야 하는가”라는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다. 트럼프는 기다렸다는 듯이 “무슨 말인지 알겠다. 나도 같은 질문을 던졌었다”고 답했다. 이어 “몬테네그로는 작은 나라지만 사람들이 매우 공격적이다. 그들이 공격적이 되면, 축하한다. 당신은 3차 세계대전에 휘말려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29번째 나토 회원국 되고도
군사동맹의 ‘방기’ 위협 직면
“작은 나라지만 사람들 공격적”
트럼프 발언은 소신에 가까워
동맹국 공동방위와 다른 생각

국제질서를 흔드는 트럼프의 망언이 나올 때마다 서방언론은 그 말이 왜 틀렸는지, 사실은 무엇인지를 장황하게 설명한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다. 한 회원국이 무력에 의한 공격을 받을 경우 모든 회원국이 공동대응하는 것은 나토의 근간이다. 나토를 탄생시킨 1949년 워싱턴조약(북대서양조약) 5조의 공동방위 조항에 명백히 박혀 있다. 미국이 설계한 국제질서의 역사에 관심이 없는 그에겐 공동방위 의무 역시 수입과 지출의 이해타산이 맞아야 하는 장부상의 문제에 불과하다.

유럽연합(EU) 본부건물을 방문한 밀로 듀카노비치 몬테네그로 대통령(오른쪽)이 장 클로드 융커 EU집행위원장의 환영을 받고 있다. 2017년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가입에 성공한 듀카노비치 대통령은 친 서방 성향의 지도자이다.  브뤼셀/AFP연합뉴스 


트럼프의 발언은 우발적으로 나온 게 아니다. 몬테네그로의 나토 가입을 반대했던 푸틴의 의중을 고려해 내놓은 입 발린 말도 아니다. 일종의 소신 비슷한 무엇이다. 2016년 미국 대선 유세 도중 “나토 동맹국이 공격을 받는다고 해도 자동적으로 방어하지 않겠다”면서 “공격받은 동맹국이 우리에 대한 의무를 다했는지에 따라 참전 결정을 내릴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모든 군사동맹은 ‘연루’와 ‘방기’의 위험을 안고 있다. 나토 역시 예외는 아니다. 역대 미국 행정부가 새 나토 회원국의 가입을 앞두고 신중을 기해온 까닭이다. 조지 W 부시 행정부와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 국방부 장관을 지낸 로버트 게이츠는 2008년 “나토는 말이나 주고받는 사교클럽이 아니다. (북대서양조약) 5조는 반드시 이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바로 그 때문에 신규 회원국을 받아들일 때 주의해야 한다는 경고였다. 같은 해 러시아와 전쟁을 치른 그루지야(현 조지아)가 나토 가입을 강력하게 희망하던 시점이었다. 나토는 아직도 조지아를 가입시키지 않았다. 하지만 게이츠가 강조한 ‘신중한 검토’는 가입시키기 전에 하는 것이다. 대통령의 말, 특히 미국 대통령의 한마디가 몰고 올 파장 따위를 고려하지 않았다. 나토는 러시아를 상대하고 있다. 몬테네그로와 같은 작은 나라들은 물론 EU의 어떤 큰 나라들 역시 러시아에 맞설 자체 방위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결국 말 한마디로 전 나토 회원국들을 ‘방기’의 위협에 직면하게 만든 것이다.


키신저 “한 시대 끝낼 인물…”
트럼프 현상에 의미심장 발언
훌륭한 경쟁자 관계인 푸틴과
미·러 군사 대치 허물지 궁금


트럼프의 실언은 전혀 새로운 뉴스가 아니다. 하지만 몬테네그로의 경우처럼 극적인 아이러니는 드물었던 것 같다. 나토 창설 이후 트럼프가 그토록 증오하는 공동방위 조항이 발동된 것은 단 한 번이었다. 바로 미국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나토는 2001년 9·11테러가 발생하자 북대서양조약 5조를 발동해 미국과 나란히 아프가니스탄에 군대를 보냈다. 몬테네그로 파문은 빙산의 일각일 뿐 그 밑에는 나토의 동진을 둘러싼 러시아와 서방의 알력이 놓여 있다.


탈냉전 뒤 러시아는 미국 및 나토와 우호적인 삼각관계를 희망했다. 2002년 나토-러시아협의회(NRC)를 구성하고 협력을 타진했다. 이듬해 EU와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경제와 안보 등 4개의 공동 공간(common space)을 설정했다. 러시아와 서방 간의 짧은 평화가 깨진 것은 양쪽 모두에 책임이 있다. 러시아는 2008년 조지아를 침공하고, 2009년 우크라이나로 연결된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을 잠갔다. 2014년에는 결국 우크라이나를 침공, 크림반도를 병합했다. 러시아의 군사행동은 거의 예외없이 나토의 동진과 관련돼 있다. 러시아의 망토 안에 있던 나라들이 서방으로 달려갈 조짐을 보일 때마다 예방적인 조치를 취했다. 작용이 낳은 반작용이었다. 심사에 신중을 기했다고 하지만, 나토는 기회 있을 때마다 몸피를 불렸다.

지난 17일 백악관 앞에서 한 여성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러시아의 술수에 놀아났다면서 ‘당신은 강아지’라고 쓴 손팻말을 들고 반 트럼프 시위를 벌이고 있다.  워싱턴/AP연합뉴스 


1999년 폴란드·헝가리·체코를 받아들였고 5년 뒤 불가리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등 10개의 중·동유럽 국가들을 포함시켰다. 2009년엔 알바니아와 크로아티아를 가입시켰고 마지막 가입국이 몬테네그로다. 나토 회원국이 늘어날 때마다 러시아는 민감한 반응을 보여왔다. 몬테네그로에서는 나토 가입 1년 전 쿠데타 기도가 적발됐다. 정부를 전복하고 친서방 성향의 총리를 암살하려던 계획이었다. 러시아는 공식 부인했지만, 배후 국가로 의심을 받았다. 미국은 중앙정보국(CIA)을 동원해 옛 바르샤바 조약국 또는 독립국가연합(CIS) 국가들을 러시아로부터 떼어내는 작업을 해왔다. 많은 경우 해당 국가의 민주주의 지원을 명분으로 시작해 피플파워를 거쳐 친서방화로 귀결되는 수순이었다. 2003년 조지아의 장미혁명과 2년 뒤 키르기스스탄의 튤립혁명이 좋은 예다. 부시 행정부는 2008년 체코와 폴란드에 미사일방어(MD) 기지 건설을 추진, 러시아와의 신냉전을 자초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 들어 백지화된 계획이지만, 이미 미·러 갈등에 휘발유를 부은 뒤였다. 3차 세계대전의 불길한 분위기를 조성해온 것은 이처럼 미국과 러시아였다.


유고슬라비아연방이 해체되면서 발생한 보스니아 전쟁 당시 몬테네그로는 피난처 역할을 했다. 세르비아와 함께 신유고연방에 남았지만, 세르비아와 교전했던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 난민들을 모두 받아들였다. 몬테네그로는 세르비아, 러시아와 함께 동방정교의 전통을 공유한다. 러시아 기업들의 투자가 활발했고 아름다운 풍광의 아드리아 해변은 부유한 러시아인들의 휴양지로 인기가 높았다. 2006년 세르비아와의 분리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가 불과 0.5%(2300표) 차이로 종결된 것은 친서방과 친러시아가 공존하는 소국의 정체성을 말해준다. 외부의 바람에 따라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휘발성이기도 하다. 푸틴은 몬테네그로의 나토 가입 뒤 공개적으로 ‘보복’을 다짐했다.

          몬테네그로 국가 문장

몬테네그로 정부는 폭스뉴스의 트럼프 인터뷰 방영 다음날인 18일 공식 성명을 통해 “미국과의 우호는 강력하고 영원하다”고 확인했다. 어쩌겠는가. 하지만 “몬테네그로는 전쟁보다는 관광을 좋아한다. (발칸반도) 지역의 안정화 국가로서의 역사와 전통, 평화적인 정치를 자랑스럽게 여긴다”면서 평화국가임을 강조했다. 성명은 “오늘날의 세계에서 나라가 얼마나 큰지, 작은지는 중요하지 않다. 자유와 연대 및 민주주의의 가치를 얼마나 아끼느냐가 중요할 뿐”이라는 뼈 있는 한마디로 결어를 맺었다. 나토 정상회의에서 트럼프로부터 ‘러시아의 포로’라는 모욕적 평가를 들었던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몬테네그로가 나토 회원국인 게 기쁘다”고 거들었다. “조약 5조는 모든 회원국들에 적용되며 큰 나라나 작은 나라 또는 일부 나라들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라고도 못 박았다.


몬테네그로가 나토의 동진을 둘러싼 서방과 러시아의 갈등이라는 빙산의 일각이라면, 트럼프 현상 역시 그를 당선시킨 시대의 일각에 불과하다. 그 점에서 헨리 키신저(95)의 최근 발언에 귀 기울일 만하다. 키신저는 지난 20일자 파이낸셜타임스 인터뷰에서 “트럼프에 대해선 너무 많은 말을 하지 않겠다. 한다면 언젠가 조리 있게 하겠다”며 논평을 비켜갔다. 하지만 의미심장한 침묵 뒤에 한마디를 내놓았다. “트럼프는 아마도 역사에 종종 등장하는 인물일지도 모른다. 한 시대의 종언을 고하고, 그 시대의 낡은 가식(pretences)을 포기하도록 몰아가는 인물 말이다. 트럼프가 꼭 이런 것을 이해하고 있거나, 다른 훌륭한 대안을 고려하고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것은 ‘사고(accident)’일 수도 있다.” 키신저는 무엇이 사고인지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트럼프가 한반도에서 추구하는 바, 비핵화와 항구적인 평화를 위한 성격의 ‘사고’라면 나쁠 것도 없을 것 같다. 미국과 러시아 간 군사적 대치를 종결시킨다면, 오히려 환영할 만한 사고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염천에 이 글을 쓰면서 든 단상이다. 트럼프에게 푸틴은 적이기는커녕, “훌륭한 경쟁자(good competitor)”가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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