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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읽기

제재와 대화의 두줄타기 하는 이란과 북한, 중동의 '모래바람'이 한반도에까지 불어올 것인가

by gino's 2018. 8. 9.

이란 수도 테헤란 거리에서 한 여성이 벽그림 옆에 무심한 표정으로 서 있는 모습. 미국이 지난 7일부터 대 이란 제재를 재개함에 따라 한동안 평화의 기운이 무르익어가던 이란에 먹구름이 몰려들고 있다. 테헤란/EPA연합



 “누군가 상대방 또는 적의 팔에 칼을 꽂아 놓고 협상할 용의가 있다고 말한다면, 우선 칼을 뽑고 협상 탁자로 오라고 말하겠다. 협상엔 기본이 있다. 양측이 신뢰할 수 있는 정직성은 가장 중요한 기본이다. 정직성이 있다면 우리는 늘 협상을 환영한다. 현 (트럼프) 미국 행정부와도 협상을 해보았지만 그들이 협상 탁자를 떠났다. 그들은 이란 국민과 국익에 반하는 짓을 하고 있다. 제재와 동시에 협상을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제재는 이란의 어린이들과 국민을 겨냥하고 있다.”(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 6일 밤 TV 회견)

 “지금 미국은 다른 나라의 기업들과 개인들이 대조선 제재 결의를 위반하면 제재 명단에 오를 것이라고 협박하는 ‘주의보’까지 내리면서 국제사회의 제재 결의 리행을 강박하고 있다. (…) 앞에서는 대화판을 펼쳐놓고 뒤에서는 제재굿판을 벌려놓는 수화상극의 이 괴이한 태도를 과연 어떻게 보아야 하겠는가. 미국의 정객들에게 묻건대 ‘미국은 남에게 줄 줄은 모르고 받기만 좋아하는 철부지처럼 행동하고 있다’고 비평하는 세계 여론의 따가운 비난에 낯뜨겁지 않은가.”(노동신문, 6일자 논평 “‘압박외교’로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면 놀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설마하는 마음에 시간을 보내다가는 어느 순간 전혀 새로운 현실을 직면해야 한다. 도널드 트럼프 시대에 접어들어 세계가 여러 차례 겪어온 과정이다. ‘경악→반신반의→현실화’의 단계마다 변수는 늘 있다. 북핵 문제처럼 핵전쟁 직전까지 몰고갔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평화국면으로 돌아선 ‘말의 전쟁→긴장의 최고조→대화국면 전환’의 3단계도 있다. 두 가지 모두 트럼프 대외정책의 과정이되 전자는 이란, 후자는 북한과의 관계를 요약한다. 물론 현재까지의 진행상황일 뿐이다. 이란 핵문제는 “미국은 사자의 꼬리를 갖고 놀면 안된다. 영원히 후회하게 될 것이다”(로하니 대통령)는 말과 “미국을 위협하면 역사가 경험하지 못한 사상 최악의 결과를 맞게 될 것”이라는 트럼프의 말이 부딪치는 ‘말의 전쟁’ 단계다. 북·미는 협상과정에서 밀고 당기는 ‘숙성기간’을 보내고 있다.


이 대 이란 제재를 시작한 지난 7일 이란 수도 테헤란의 옛 미국 대사관 건물 담벼락 앞을 한 여성이 걸어가고 있다. 자유의 여신상을 패러디한 그림이 이란인들의 반미감정을 말해준다. 테헤란/AFP연합뉴스


 북핵과 이란핵에 대한 트럼프의 접근 방식은 다르면서 비슷하고, 비슷하면서 다르다. 하지만 북한과 이란 모두 미국과 상대하면서 대화와 제재의 두 줄 위에 올라서 있다는 점에서 비슷한 처지다.

 트럼프 행정부가 7일 이란에 대한 제재를 발동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역사상 최강’이라고 강조한 제재는 2단계다. 이날부터 1단계로 이란 정부의 달러화 구매 및 이란 리알화 거래, 귀금속·흑연·알루미늄·석탄 거래를 금지시켰다. 11월5일 발효되는 2단계 제재 대상은 이란산 원유 및 가스 금수와 이란의 항만운영·선박·조선·에너지 산업이다.


 대선 유세 때부터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이란 핵합의(포괄적 공동행동계획·JCPOA)를 두고 ‘최악의 합의’라고 비난해온 트럼프였다. 취임 뒤 이란 제재를 현실화하는 데까지 짧지 않은 숙성기간이 있었다. 지난 과정을 복기해보면, 몇 가지 흐름이 읽힌다. 


 트럼프는 유리한 협상을 위해 기존 협상을 깨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그사이 ‘최대 압박(maximum pressure)’을 통해 상대가 먼저 숙이고 들어오기를 기다린다.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 전까지 유지하겠다는 대북 제재가 ‘최대 압박’이라면, 이란에는 ‘최대의 경제적 압박’을 가하고 있다. 물론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이나 파리 기후협정처럼 파기한 뒤 뒤돌아보지 않는 조약도 있다. 북핵과 이란핵의 경우엔 협상을 통해 최대 성과를 이끌어내겠다는 의도가 읽힌다.


이란 호라산 라자피 지역의 마샤드 시내에서 한 성직자가 시위군중들에게 발언을 하고 있다. 이란에서는 최근 혁명수비대를 비롯한 강경보수파가 시리아와 예멘 등 외국의 시아파 무장조직에 자금을 지원하면서 정작 이란 주민들의 생계를 어렵게 하고 있다는 비난이 높아지고 있다. 그동안 강경보수파를 지지해왔던 이슬람 성직자나 보수성향 국민들이 주축이 되어 전국 곳곳에서 정치권의 부패와 무능을 비난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마샤드/AFP연합뉴스


 두 번째는 아웃소싱이다. 트럼프는 지난해 10월 먼저 의회에 이란 제재검증법(코커-카딘법) 개정을 요구했다. 의회가 응하지 않자 지난 1월 이란 핵합의 파기를 120일 내에 결정하겠다고 공표했다. 그다음 트럼프는 이란 핵합의를 공동조인한 ‘P5+1(안보리 상임이사국+독일) 중 영국, 독일, 프랑스에 임무를 발주했다. 이란이 2030년 이후에도 핵개발을 못하도록 합의안의 일몰조항을 없애고, 24시간 상시사찰 및 이란의 탄도미사일 개발과 외국 테러단체 지원 금지 조항을 넣으라고 주문했다. 공동조인국들은 보충 협약 형식으로 트럼프의 요구를 담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애당초 트럼프의 복안은 설계변경 뒤 재건축이 아니라 전면 철거 뒤 재개발이었을 가능성이 짙다. 트럼프는 시한을 나흘 앞둔 지난 5월8일 이란 핵합의 파기를 일방선언한 데 이어 지난 6일 기어코 이란 제재를 발표했다.


 유럽연합(EU) 외교안보 고위대표와 영·불·독 외교장관은 지난 6일 공동성명을 내고 미국의 제재로 피해가 예상되는 유럽 기업들의 보호를 다짐했다. 이란산 석유·천연가스를 계속 수입하겠다고 결기도 세웠다. 중국과 러시아, 인도도 거래를 계속할 방침이다. 하지만 이란과 거래한 기업은 미국과 거래할 수 없게 한 세컨더리 제재를 무릅쓰고 나설 기업은 지구상에 없다.


 트럼프는 ‘포괄적 합의’라는 말을 좋아한다.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뒤 체결한 공동합의문을 두고 ‘포괄적 합의’라고 강조했다. 이란에 대해서도 “우리가 최대의 경제적 압박을 계속하고 있지만, 포괄적 합의에 열려 있다”고 강조했다. 지난주 조건 없는 대화를 제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탄도미사일 프로그램과 테러단체 지원 등을 포함한 이란 정권의 악의적 행동 금지가 포괄적 합의에 포함돼야 한다고 못 박았다. 오는 9월 유엔 총회를 계기로 미국과 이란의 정상회담 또는 고위급 회담이 시작될 가능성도 꾸준히 나온다. 


이란 수도 테헤란 거리에는 벽그림이 많다. 지난 22일 한 여성이 비둘기가 그려져 있는 벽그림 앞을 지나가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란 핵합의를 파기한데 이어 제재를 발동해 비둘기가 상징하는 평화의 전망이 더욱 어두워졌다.  테헤란/EPA연합뉴스


 이란이 대화에 응할지는 불확실하다. 하지만 내부사정이 녹록지 않은 만큼 대화국면으로 전환할 가능성도 있다. 이란은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를 정점으로 로하니 대통령의 중도파와 혁명수비대 및 바시즈 민병대의 보수강경파가 양축을 이루는 신정(神政)체제다.


 제재 아래서도 특권을 누려왔던 강경파가 호르무즈 해협에서 무력을 행사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민생고와 부패, 경제파탄을 규탄하는 반체제 시위가 미국의 제재 발동으로 확대되고 있어 강경대응이 녹록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작년 말을 고비로 반미시위가 아닌, 정부의 무능과 부패를 비판하는 반체제 시위가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장지향 아산정책연구원 중동센터장은 “최근 반체제 시위의 주도 그룹이 전통적인 강경파 지지세력이라는 점이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짚었다. 강경파는 시리아와 예멘 내전에 돈을 퍼부으면서 정작 민생은 챙기지 못한다는 비난에 직면해 있다. 


 트럼프 외교에서 드러나는 몇 가지 굵직한 흐름은 기실 이전부터 있어왔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로스 다우댓은 이를 ‘역외균형(Offshore Balancing)’ 개념으로 풀어냈다. 역외균형은 탈냉전 이후 미국이 걸머져왔던 ‘헤게모니의 부담’을 덜어내기 위한 전략이다. 헤게모니를 포기하겠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돈을 덜 쓰고, 역할을 아웃소싱하되 여전히 패권을 유지하겠다는 복안이다. 오바마와 트럼프는 스타일과 화법, 세계관이 정반대이지만, 대외정책은 겹치는 대목이 적지 않다. 적과 타협하고, 친구를 불편하게 하는 것 역시 이미 오바마가 이란 핵합의와 쿠바와의 관계정상화를 하면서 시도했던 관행이다.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테러와의 전쟁’을 나란히 대물림했으면서도 많은 예산과 인원을 투입해야 하는 해외 직접개입은 피했다. 하지만 역외균형 전략에 따라 지정학적 힘의 균형이 무너지는 위협을 간과해선 안된다. 정확히 오바마 2기 행정부에서 벌어진 일이다.


미국의 대 이란 제재가 시작된 지난 7일 테헤란을 방문한 리용호 북한 외무상이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을 예방하고 있다.  테헤란/EPA연합뉴스



 이라크에서 미군을 철수시킨 뒤 국가급 테러조직 이슬람국가(IS)가 힘의 공백을 메웠다. 이란 핵합의 성사에 우선순위를 둔 오바마는 이란의 예멘 및 시리아 내전 개입을 경시하는 우를 범했다. 최소 1000억달러에 달하는 해외 동결자산이 풀리면 이란이 해외 테러단체를 지원할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게임 체인저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 오판했다. 


 다우댓은 북한이 미국의 궤도권에 합류할 경우 중국과 러시아의 반발로 동아시아에도 지정학적 변고가 생길 것을 우려했다. 아직 비핵화는커녕 종전선언도 매듭짓지 못한 한반도 입장에선 사치스러운 고민이다. 이란 핵합의를 파기한 뒤 트럼프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중동의 친미 국가 지도자들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었다. 미국이 9·11테러 이후 중동에 7조달러(지금까지 실제 전비는 1조8800억달러)를 지출했음을 강조하면서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연합(UAE), 바레인 등에 역할과 기여 증대를 촉구했다.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도 향후 북한에 제공될 경제적 지원은 한국과 중국, 일본이 맡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군사력과 달러화를 양대 축으로 하는 미국의 헤게모니는 여전히 견고하다. 미국이 몽니를 부리면, 협상 탁자에서 피해 최소화를 도모하는 것이 각국이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의 최대치다. 하지만 북한과 이란에는 수십년 동안 미국과 서방을 상대해온 전문가들이 포진하고 있다.

 이란 외교가 북한 외교보다 세련되고 집요한 면에서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있지만, 미국과의 대치국면에선 잃을 것이 많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북한이 지난해 11월 핵무력 완성을 선포한 뒤 화해국면으로 전환한 것은 집권 이후 경제개혁으로 잃을 것이 많아졌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제기된다. 


 북한은 이스라엘을 백안시하고 이란 및 시리아와 우호관계를 유지해왔다. 북한과 탄도미사일 기술 및 핵 기술의 이전 의혹을 강하게 받고 있는 나라도 두 나라다. 트럼프 행정부의 이란 제재 첫날 리용호 북한 외무상은 테헤란으로 달려가 자바드 자리프 이란 외교장관의 손을 잡아주었다. 북한은 이미 핵무력을 확보했고, 이란은 단 1개의 핵탄두를 만들 핵물질도 없다. 하지만 북핵과 이란핵 협상이 좌초될 경우 각각 지역안보에 심각한 악재가 될 수 있다. 중동에서 이는 모래바람이 한반도까지 영향을 미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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