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풍댐 인근 북한 마을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 단둥과 마주한 북한 신의주, 의주군, 삭주군, 창성군은 강폭에 따라 서로 개짖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깝다. 수풍댐 인근 북한 마을의 전경이다. 강가에는 뗏목을 거두는 녹슨 장비가 설치돼 있다. 김일성 주석 3대의 이름이 들어간 구호가 산록에 보인다.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북의 선택, 개성보다 신의주인 이유 ‘남북경색 경험’
한반도에서 황해로 흐르는 강의 물줄기는 독립적이지 못하다. 더 ‘큰물’에 따라 역류한다. 압록강도 마찬가지였다. 조수간만의 차에 따라 밀려가고, 밀려온다. 겨울엔 임진강처럼 유빙(流氷)이 떠다닌다. 북·중 국경의 쌍둥이 도시, 단둥(丹東)과 신의주의 운명과 같다. 지난 7일 오전 단둥시내에서 80여㎞ 떨어진 수풍댐 위쪽 호수. 물이 빠진 산록에 흑갈색 선이 그어져 있었다. 여름이 짙어가는 압록강 양안의 풍경은 지극히 평화로웠다. 댐 아래쪽의 조선족 동포가 운영하는 ‘새마을식당’에선 건너편 북한 마을의 개짖는 소리, 뻐꾸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댐 왼쪽 경사면의 북한 마을에는 압록강을 따라 흘러온 뗏목을 건져올리는 레일이 깔려 있었다. 낡은 건물, 낡은 시설일지언정 오래전부터 익숙한 일상이 이어지고 있었다. 터널로 들어가는 화물열차 위에는 목재가 그득 실려 있었다. 김일성 주석 3대의 이름이 담긴 붉은 구호가 풍경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다. 댐으로 연결된 평안북도 삭주군과 창성군에는 ‘풍’자 지명이 많다. 수풍, 인풍, 부풍, 신풍….
■ 평화로운 압록강 양안
수풍으로 가는 길의 북한 어적도는 단둥과 그야말로 한 발자국 거리였다. 좁은 수로의 중국 쪽 기슭에 ‘일보과(一步跨)’와 ‘지척(咫尺)’을 새겨 넣은 표지석이 북한과의 거리를 말해주고 있었다. 인근의 대형 유람선은 한국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북한 쪽에 최대한 접근해 달러나 인민폐, 먹을 것을 던져주곤 했었다. 하지만 이날 찾아간 선착장은 철책문으로 닫혀 있었다. 카드놀이를 하던 직원들에게 묻자 “정부가 운항을 중단시켰다”는 답이 돌아왔다. 북한 측의 항의로 단둥 시정부가 운항을 금지한 것이었다. 압록강을 찾아와 끊임없이 북한 쪽을 바라보는 한국인들이 중국인들에게는 어떻게 비칠까. 혹여 돈이나 먹을 것을 던져주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지는 않을까. 중국인인 렌터카 운전기사 ㄱ씨(55)는 그러나 “같은 민족끼리 도와주는 게 당연한 것 같다”고 답했다. 만주족은 대부분 팔기군(八旗軍) 계보를 분명히 밝힌다. 그는 자신을 “황기군(黃旗軍)의 후예”라고 소개했다.
중국인·한국 교포·북한 노동자들…모두가 ‘단둥인’
유엔 제재 이전엔 압록강 너머 음식도 배달시켜 먹어
단둥은 인구 구성 면에서 여느 중국 도시와 다르다. 2016년 현재 주민 245만명의 다수가 한족이고 30% 정도가 만주족이다. 조선족은 1만5000여명으로 북한 노동자들(1만5000~2만명)보다 적다. 여기에 남·북·중 3각 무역을 하기 위해 건너온 한국 교포들이 어울려 살고 있다. 압록강 경제권을 공유하는 사람들을 ‘단둥인’ 또는 ‘변방인’이라고 통칭해도 무방할 듯했다. 유엔 안보리 제재 이전에는 압록강 너머로 먹을거리를 배달시키기도 했다. 교포 사업가 ㄴ씨는 “중조우의교를 오가는 빵통(컨테이너)차 운전기사에게 부탁해 신의주 개장국을 주문하거나, 신의주에서 단둥 음식을 배달시키기도 했다”고 전했다.
단둥인들에게 압록강을 건너올 북한의 변화는 무엇을 의미할까. 설렘의 성격은 다소 달랐다.
지난 6일 저녁 조선족 동포들과 북한 출신 화교들이 모여 사는 단둥시내 주택가의 한 식당. 한국 교포들과 가슴에 붉은 초상휘장을 단 북한 사람들이 저마다 상을 차지하고 밥을 먹는 곳이다. 화교들은 중국 국적을 취득할 수 있지만 단둥 호구는 4년 정도 체류하고 일정 조건을 갖춰야 얻는다. 북한과 중국에서 이중살림을 하기도 한다. 며칠 전 해서지방의 친정집을 다녀왔다는 중년의 화교 여성 ㄷ씨에게 물었다.
- 북한 사정은 어떤가.
“우리는 배급을 타지 않아 모르지만, 사정이 나쁘지 않다. 아파트 생활도 괜찮다. 시내에서는 모두 아파트 생활을 한다.”
“북 주민들, 조·미 회담 등 보며 경제적 기대감 가져”
보수 정권·사드 등 거치며 소수만 남은 한국인도 ‘희망’
“북 인프라 구축 시간 필요…‘대동강의 기적’ 가능할 것”
- 최근 변화에 대해 북한 주민들이 알고 있나.
“물론이다. TV로 방영해서 다 알고 있다. 북남 간이나, 조·미 간이나 수뇌회담하고 그러니까 앞으로 경제적으로 좀 편안해지겠다는 기대들을 갖고 있다.”
하지만 북·미관계 개선을 바라보는 심정은 다소 복잡했다. “조선(북한) 사람들은 그리 간단하게 생각하지 못한다. 수뇌회담을 했다고 해도 전쟁 때 미국에 의해 너무 많은 피해를 입지 않았나. 앞으로의 희망은 주지만, 지나온 역사는 어쩔 수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식당 앞마당에서 한담을 나눈 서너 명의 화교들은 모두 다가올 변화에 대해 “글쎄요. 두고 봐야죠”라며 즉답을 피했다. 경쟁논리 때문이었다. 60대 여성 ㄹ씨는 “예를 들어 지금은 사과 장수가 두세 명밖에 없는데 많아지면, 경쟁이 더 심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 국영기업이나 한국 대기업이 북한과 직거래를 하면 단둥의 중개기지 역할이 줄어들 것을 우려했다.
■ 5·24조치가 끊은 ‘밥줄’
전환기에 기대와 걱정이 교차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만주족 ㄱ씨는 “변경무역이 활발해져 단둥 경제가 좋아질 것 같다”고 말했다. 화제가 부동산 경기로 옮겨지자 활기를 띠었다. 1990년대 중반 북한에서 이주했다는 40대 초반의 남성은 “랑터우(浪頭) 집값이 두 배로 뛰었다”면서 “하지만 병원이나 유치원이 없어서 우리는 안 산다”고 말했다. 단둥시는 랑터우에 명문 알중(제2중학교)을 이전해 놓았지만 아직 편의시설이 턱없이 부족한 것 같았다.
가장 소수의 ‘단둥인’은 400~500명 정도밖에 남지 않은 한국인들이다. 이명박 정부가 2010년 내린 5·24 조치가 가장 치명적이었다. 3000~4000명에 달했던 교민들이 하나둘 떠나갔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의 한국 배치를 빌미로 중국 정부가 취한 유·무상의 조치는 중국인을 상대하는 소상공인들에게 철퇴를 내렸다. 북한의 핵개발이 안보리 제재를 야기한 것은 물론이다. 그나마 개성공단 사업자들은 정부 보상이라도 받지만, 신의주나 평양 등지에서 임가공을 하던 사업자들의 피해는 외면받고 있다. 가끔 공격적인 선교활동을 벌이는 종교인들이 말썽을 빚지만, 단둥에서 남과 북은 큰 충돌 없이 지내고 있었다. 한국인 사업가 ㅁ씨(54)는 “남북 주민들 간에는 별다른 갈등이 없다”고 전했다.
단둥의 한국인들에게 북한은 중요한 사업 파트너다. 5·24 조치로 밥줄을 끊은 이명박 정부조차 무시하지 못한 특수사정이다. 2011년 말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사망 당시 정부의 동의를 얻어 ‘단둥 한인회’ 명의로 조의를 표했다. 그러나 5·24 조치→사드→안보리 제재의 삼각 쓰나미를 맞은 교포들은 절망의 세월을 보내왔다. “쌀이 탄약보다 더 귀하다”고 선언한 김정은 국무위원장 시대에 북·중 교역이 늘었지만 ‘그림의 떡’이었다. ㅁ씨는 “아직 뚜렷하진 않지만 그래도 이제는 희망의 구도라도 그리게 됐다”고 말했다. 북한과의 교역이 재개되면 5·24 이전 평양 공장에서 했던 의류 임가공 사업을 재개할 계획이다.
■ 단둥은 친북, 둥항은 친한
단둥은 총면적이 서울의 25배(1만5222㎢)이다. 그 안에 단둥시와 둥항(東港)시가 있다. 북·중 교역의 70% 이상을 점하는 단둥시 주민들은 북한을 호의적으로 바라본다. 인천~단둥 페리가 운항하는 둥항시 주민들은 반대로 한국을 더 우호적으로 본다. 한 교민은 “몇 년 전 단둥을 방문한 주중 한국대사가 시정부로부터 현장(縣長)급 푸대접을 받아 논란이 일었었다”고 전했다. 지난달 22일 취항 20주년을 맞은 ‘단동훼리’는 연평균 10만명을 실어날랐다. 인천에선 백두산을 비롯한 동북 3성 관광객들이, 단둥에선 다이궁(代工·보따리상)들이 이용했다. 들깨나 고추기름, 견과류 등을 실어나르던 다이궁 역시 300여명이었지만 최근 수십명으로 줄었다.
압록강 지역을 답사하면서 김정은 위원장이 왜 개성이 아닌, 신의주 일대를 먼저 찾았을까 하는 의문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남북관계의 마중물이었던 개성공단은 2013년 멈춰섰지만, 재가동이 어렵지 않다. 나대지와 빈 건물만 있는 비단섬과 비교할 게 아니다. 남과 북은 4·27 판문점선언에서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을 위해 적극 노력하자는 합의를 하기도 했다. 4박5일의 취재를 마치면서 만난 랴오닝성(遼寧省) 지방정부 관계자 ㅂ씨가 그 의문을 풀어주었다.
그는 “조선(북한) 입장에선 한국이 불안했을 것”이라면서 “반북 보수세력도 있지만, 한국 뒤에는 미국이 있지 않으냐”고 되물었다. 북한은 이명박·박근혜 보수정부에 의해 남북관계가 하루아침에 얼어붙었던 경험을 잊지 않을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중국은 핵무기만 포기하면 조선의 경제발전을 적극 도울 것이다. 조선이 한국과 미국에 다가가기 위해 열 발자국을 옮겨야 한다면, 중국에는 한 발자국만 옮기면 된다”고 강조했다.
■ ‘한반도 해빙’ 기다려야
오랜 세월 동안 남북한을 상대해온 그는 북한 경제개발에 필요한 재원을 1000억달러(100조원)로 추산했다. 북·중 간에 교류가 활발해졌느냐는 질문에 “물적 교류는 안보리 제재 때문에 안 풀렸지만 인적 교류는 많이 풀렸다. 조선에서 비자 발급받는 것이 아주 까다로웠지만 최근 필요한 조선 사람들이 다 중국에 건너온 걸 보면 바뀐 것 같다”고 말했다. 북·중관계에 대해서는 중국이 국경지역에 군대가 아닌 경찰만 배치한 점을 지적했다. 양국 관계를 내부 문제로 본다는 말이다. “조선의 핵개발로 한동안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래봐야 사회주의권 집안 문제”라고 말했다. 일각에선 비핵화와 관계개선에 뚜렷한 진전이 없다는 비판이 새나온다.
ㅇ씨는 “중국어에는 파빙(破氷)이라는 단어가 없다”면서 “얼음은 녹여야지 깨뜨릴 수 없다”고 역설했다.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말이었다. “큰일은 작게 만들고, 작은 일은 없애는 게 외교”라는 말도 소개했다. 북한을 상대로 댓바람에 다 내놓으라고 하기보다 단계적으로 가야 한다는 견해였다. 중국 정부의 입장을 대변한 것이었지만, 새겨들을 대목이 있었다. 당초 미팅 주선을 약속한 선양(瀋陽) 총영사관 관계자들은 아무 연락이 없었다.
오랜 대북사업 경험에서 얻은 교훈일까. 교포 사업가 ㅁ씨는 “제재가 풀리면 중국 국영기업이나 한국 대기업들도 들어가겠지만 북한이 자본을 축적하고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최소 몇 년이 걸릴 것”이라고 짚었다. 답사 일정을 함께한 강석승 21세기 안보전략연구원장은 “압록강 너머 북한의 현실은 우리의 60년대처럼 암울하지만 그들도 노력하면 ‘대동강의 기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낙관했다. 다만, “민주주의 국가가 아닌 만큼 경제협력의 대상이나 범위는 철저하게 북한 당국이 결정할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단둥에서의 남북협력사업을 다룬 소설, <압록강 블루>의 이정 작가는 “과거 대북사업자들은 숱한 시행착오를 겪었다”면서 “교류가 재개되면 남북이 70여년 분단 세월 동안 서로 무엇이 바뀌었는지 꼼꼼히 헤아리는 작업부터 먼저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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