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공동의 미래? 이번엔 나도 트럼프의 '베이스'가 되고 싶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12일 북·미 싱가포르 정상회담 도중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아이패드로 보여주었다는 동영상. 회담 뒤 트럼프 대통령의 기자회견장 모두에 각국 취재진들에게 방영됐다. 한국어로 시작한 탓에 많은 기자들은 북한의 선전물로 착각했다. EPA연합뉴스

“어, 저건 뭐지?”

역사적인 북·미 싱가포르 대좌가 끝난 지난 12일 싱가포르 카펠라호텔의 기자회견장.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기자회견을 기다리던 각국 취재진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느닷없이 연단 옆의 대형 스크린에서 막 방영된 동영상에서 한국어 육성이 나왔기 때문이다.

“데스티니 픽처스(Destiny Pictures)가 내놓는 기회의 이야기. 하나의 새로운 이야기, 하나의 새로운 시작. 하나의 평화, 두 명의 지도자, 하나의 운명(Two leaders, one destiny).” 잠시 혼란이 지난 뒤 기자회견장에는 묵중한 바리톤의 영어 내레이션이 흘러나왔다. 바로 트럼프 대통령이 정상회담 도중 자신의 아이패드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보여주었다는 동영상이었다.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 중에서 소수만이 지속적인 영향을 남긴다. 마찬가지로 아주 소수만이 자신들의 조국을 새롭게 하는, 또는 역사의 경로를 바꾸는 결정을 내린다. 행동을 취한다.” 실제 LA에 있는 데스티니 픽처스는 동영상과 무관하다고 밝혔다. 일각에서 한국이 만들어 제공했다는 말도 있지만 공식적인 제작 주체는 엄연히 백악관이다.

“역사는 세대에 걸쳐 반복된다.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순환으로 보인다. 비교적 평화로울 때가 있는가 하면, 막중한 긴장감이 감돌 때도 있다. (하지만) 역사는 늘 진화한다.” 잠깐 보고 지나가는 엘리베이터 동영상처럼 화면 진행속도가 빨랐다. 4분 정도의 분량에 수십개의 이야기를 담았지만 서스펜스 영화 같은 배경음악 덕분에 지루하지 않았다. 제목은 ‘북한의 기회 이야기(A Story of Opportunity for North Korea)’.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을 보도한 지난 13일자 북한 노동신문 1면. '조미(북미)관계의 새역사를 개척한 세기의 만남'이라는 헤드라인을 달고 여러장의 사진과 함께 대서특필했다. 노동신문 캡처

북한이 고립된 과거(또는 현재)에서 풍요로운 미래로 나아가는 비전을 보여준다. 미국은 조지 W 부시 행정부 때부터 기회 있을 때마다 밤에 한반도를 촬영한 위성사진을 대단한 발견인 양 내보였다. 불빛으로 가득한 남한과 암흑이 지배하는 북한을 대비시키는 도구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뒤집어 보면 남한이 대륙과 분리된 섬임을 확인시킨다). 동영상은 예의 그 위성사진을 잠깐 보여준 뒤 곧바로 남한처럼 불빛으로 가득한 북한의 미래상을 압축적으로 담았다. 압권은 북한이 해변가에서 발사한 미사일들이 화면 되돌리기 기능을 통해 다시 발사대로 빨려들어가는 장면이었다. 순간 크레인이 스카이라인을 이루고, 붐비는 고속도로와 첨단 공장 및 드론이 보인다. 북한이 직면한 흑백의 현재와 총천연색의 미래를 한 영상에 담았다. 

할리우드 영화의 예고편과 같은 동영상은 속이 빤히 들여다 보이는 선전물이다. 북한을 상대로 ‘핵무기를 포기하면 밝고, 풍요로운 미래가 보장된다’는 1차원적인 메시지를 담았을 뿐이다. “투자자들을 설득하기 위해 제작한 부동산 개발업자의 홍보물 같았다”는 워싱턴포스트의 비아냥이 무리도 아니다.

하지만 한반도 거주민에겐 섬광처럼 지나가버린 화면 중에서 긴 여운을 남기는 대목을 놓칠 수 없었다. “과거가 꼭 미래가 될 필요는 없다. 공동의 풍부한 문화유산을 갖고 있는 하나의 국민이 하나의 공동의 미래를 갖는 것은 어떤가.” ‘공동의 미래’라…. 역대 어느 미국 행정부가 북한의 변화와 통일 한반도의 미래상을 저리 호소력 있게 보여준 적이 있었던가. 딱 트럼프 수준의 얄팍한 동영상일지언정, 분명 감동이었다. 트럼프도, 김정은도 과거와의 작별을 강조했다.

트럼프 북·미 대좌 후 1시간 공들인 기자회견...핵심 오디언스는 자신의 베이스

“주한미군 고국 데려가고 싶다” 미 중서부 출신 본국 귀환 희망 담은 듯

트럼프 지금은 주한미군 철수 할때 아니라는데도 우리 안의 '안보 마마보이들은 ‘안보 공백’ 걱정

트럼프는 “북한 및 한반도와 미국의 모든 관계가 과거와 아주 많이 다른 상황이 될 것”이라고 했고, 김 위원장은 “우리는 역사적인 회담을 했고 과거를 뒤에 남겨두기로 했다”고 답했다. 공동성명 서명을 앞두고는 “세상은 이제 중대한 변화를 보게 될 것”이라고도 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오른쪽)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6월12일 정상회담 가진 싱가포르 센토사 섬의 카펠라 호텔 건물 밖에서 산책을 하고 있던 도중 김 위원장이 웃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미국의 제도권 정계, 재계, 언론계는 이구동성으로 트럼프를 미치광이라고 폄하한다. 미국적 가치는 물론 서구의 가치를 파괴하고 있다고 지탄한다. 그럼에도 2016년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를 뽑은 콘크리트 지지층(Base·베이스)은 견고하다. 트럼프는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는 트위터는 자신의 베이스와 끊임없이 소통한다. 트위터와 공식, 비공식 언급 역시 베이스와 소통하는 통로다. 트럼프와 베이스 사이의 소통기제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미국과 세계에서 벌어지는 온갖 ‘사상 최초 사건’들의 뿌리를 이해할 수 없다.

북·미 대좌 이후 1시간여 동안 트럼프가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진행한 기자회견의 핵심 오디언스는 한반도도, 세계도 아니었다. 자신의 베이스였다. 트럼프는 “주한미군 3만2000명(한·미 간 합의한 숫자는 2만8500명)을 고국에 데려오고 싶다”고 말했다. 조국의 방위를 외국에 의존해온 우리 안의 ‘안보 마마보이’들은 트럼프가 “지금은 아니다”라고 여러 차례 반복해서 말했음에도 방위공백을 앞질러 걱정한다. 하지만 트럼프는 베이스에 대한 애정에 무게를 더 실었다고 본다. 주한미군의 상당수는 바로 지역적으로 트럼프의 베이스인 미국 중서부 지역과 산업이 황폐화한 러스트벨트 출신들이다. 그들을 고국으로 불러오고 싶다는 희망을 말한 것으로 읽혔다. 6000구가 넘는 유해의 반환 문제를 성과로 내세우면서 단순히 숫자로 말하지도 않았다. 대선 유세과정에서 여러 명의 지지자들이 자신들의 아들과 아버지의 유해 송환을 호소할 때마다 즉답을 못했던 안타까움을 내비치면서 “이제 우리는 그걸 한다”고 말했다. 유해 송환 문제가 북·미 싱가포르 공동성명 4개항 중 하나인 이유다. 북핵 해결 역시 오디언스는 그들이다. 

북한을 여러차례 방문해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친분을 맺고, 2016년 미국 대선에서 일찌감치 트럼프 지지를 공식 표명했던 미국의 전 프로농구 선수 데니스 로드먼이 두 사람의 만남을 축하하며 트위터에 올려놓은 합성사진.   데니스 로드먼 트위터

미국은 지난 70여년 동안 통일을 염원하는 한반도 거주민의 목소리에 그다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공화당이건 민주당이건 워싱턴 기성권력은 팔을 걷고 나섰다가도 북한 탓을 하며 슬그머니 물러섰다. 한·미 연합훈련을 두고 ‘도발적’이라고 말한 미국 대통령도 없었다. “트럼프는 자신의 광기 속(In his madness)에서 한반도 상황을 (오히려) 순수하게 바라본다”는 브루스 커밍스의 말(네이션 인터뷰)은 그래서 옳다. 그 미치광이가 북한이 장사정포 여러 문을 동시에 발사한 해변 풍경에서 콘도와 호텔 건립의 비전을 읽고, 이를 김 위원장에게 권했다.

싱가포르 기자회견장에서 동영상이 댓바람에 한글 내레이션과 함께 흘러나왔던 해프닝은 당초 트럼프가 김 위원장용으로 만든 한글본을 실무진의 실수로 잘못 튼 것이다. 동영상의 내용은 물론, 김 위원장을 위해 한글본을 만들었다는 배려 자체가 중요하다. 비핵화-체제 보장이라는 현실의 무거움 속에 한없이 가벼운 성격의 동영상이 북한을 상대로 어떤 효과를 거두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하지만 트럼프의 미국이 보인 진심의 일단은 이미 전달된 것과 다름없는 것 같다. 북·미 간에 산소처럼 절실한, 한 모금의 신뢰가 됐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싱가포르 북·미 대좌는 두 편의 필름을 탄생케 했다. 북한 조선중앙TV는 지난 14일 ‘경애하는 최고 영도자 김정은 동지께서 미합중국 대통령과 역사상 첫 조미 수뇌 상봉과 회담 진행 주체107(2018). 6.10~13’이라는 제목의 기록영화를 방영했다. 42분 분량이다. 북한 특유의 전형적인 체제 선전의 냄새를 풍긴다. 중요한 것은 내용이다. 싱가포르의 번쩍이는 스카이라인과 붐비는 항구, 센토사섬의 실내 정원도 방영했다. 김 위원장이 마리나 베이 샌즈의 옥탑 수영장에서 수영객들 사이를 걸어다니는 장면도 보여주었다. 철저하게 통제를 받는 북한 매체들이 자본주의 국가의 발전상을 보여주는 것은 지극히 이례적이다. CNN은 “주목할 만한 결(tone)의 변화”라고 짚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비디오는 김이 실제로 변화에 열려 있거나, (비핵화로 인한)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무릅쓰고 있음을 시사한다”고 평가했다. 다른 무엇보다 셀카 찍는 모습의 ‘북한 최고 존엄’은 신선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왼쪽)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머리카락 색깔과 헤어스타일로 북·미 정상의 만남을 표현했다. | 박순찬화백

맞다. 그래도 트럼프는 불안하다. 북한 역시 ‘핵 없는 미래’를 받아들일지 미지수다. 동상이몽일 수도 있다. 북한과 미국이 각각 말하는 비핵화의 정의조차 분명치 않다. 동영상 한두 편 놓고 무작정 싱가포르 대좌의 결과를 환영하자는 게 아니다. 검증해봐야 할 것이 한두 개가 아니다. 하지만 한걸음 떨어져서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면 분단 70여년 동안 언제 한번 불안하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트럼프 역시 “내가 틀릴 수도 있다, 6개월 뒤에 여러분 앞에 서서 ‘내가 틀렸었다’고 말해야 할지 모른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는 “김 위원장과 정직하고 직접적이며 생산적인 회담을 가졌다”고 했다.

그래서 수년 전부터 북·미 정상의 만남을 예견하고 열망했던 ‘선지자’의 말에 귀가 기울여진다. “그냥 최선을 희망하자. 우리에게 기적이 필요한 건 아니다. 다만 문을 열 필요가 있다. 그래서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도록. 이곳을 더 나은 세계로 만들 수 있도록. 바로 그거다(that’s it).” 트럼프와 김정은을 모두 ‘좋은 친구’로 두고 있는 미국 프로농구의 전설, 데니스 로드먼이 CNN 인터뷰에서 내놓은 말이다. 트럼프가 그토록 챙기는 ‘잊힌 그들’의 자리에 ‘잊힌 한반도’를 놓는다면 그의 베이스가 되지 않을 이유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