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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오늘

시진핑은 왜 하필 그날, 서해를 응시했을까

by gino's 2018. 9. 7.

 

역사적인 북·미 싱가포르 정상회담이 열린 지난 6월12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산둥성 류궁도에 들러 서해를 응시하고 있다. 신화연합뉴스

  #한 장의 사진

지난 6월12일 중국 산둥성 류궁(劉公)도. 세계의 이목이 싱가포르에서 열린 북·미 정상회담에 쏠려 있던 그날, 시진핑 주석은 산둥성 류궁도에 있었다. 상하이협력기구(SCO) 정상회의가 전날 끝났지만 하루 더 머물며 주변의 옛 청나라 북양함대의 유적지를 돌아봤다. 그날 신화통신이 배포한 사진 속에서 점퍼 차림의 시 주석은 해안가 언덕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상 첫 북·미 싱가포르 대좌에 예민해진 탓이었을까. 의도적으로 연출한 사진이 분명했지만 숱한 생각을 자아내게 했다. 그가 바라보던 서해 건너에 한반도가 있기 때문이다.

#두 번의 중국 탓

싱가포르 대좌를 앞둔 지난 5월22일, 백악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한·미 정상회담 기자회견 자리에서 느닷없이 중국 탓을 늘어놓았다. “시진핑 주석과 두번째 만난(5월7~8일, 다롄 북·중 정상회담) 뒤 김정은의 태도에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나는 그걸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중국이 김정은의 싱가포르 정상회담 참석을 막으려고 한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시 주석은 세계적인 수준의 포커꾼이라고 생각한다”고도 답했다. 이틀 뒤 트럼프는 싱가포르 회담의 취소를 발표했다.

취소를 다시 번복해 회담은 성사됐지만 그 며칠 동안 미국 언론은 ‘중국 변수’에 현미경을 들이댔다.

트럼프의 중국 탓은 잊을 만하면 다시 등장했다. 싱가포르 회담의 성사를 둘러싸고 나온 데 이어 북·미 협상이 답보상태인 것을 두고 제기됐다. 지난 7월9일 “우리는 북한의 비핵화에 타협했다. 하지만 중국은 다른 한편으로 그 타협안에 부정적인 압력을 행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중국과의 무역에 대한 우리의 태세 때문이다”라는 트위터 메시지를 날렸다. 지난달 29일에는 몇 개의 트위터 메시지를 띄웠다. 미·중 무역갈등에 불만을 품은 중국이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를 훼손하고 있다는 비슷한 뉘앙스였다.

‘백악관으로부터의 성명’이란 제목의 트위터 메시지는 구체적으로 “중국이 돈과 연료, 비료 및 여러 가지 생활용품을 북한에 실어나르고 있다”고 썼다. 같은 날 자신을 3인칭으로 지칭하며 “‘도널드 트럼프는 '북한이 중국으로부터 엄청난 압력을 받고 있다’고 강하게 느끼고 있다. 우리와 중국 간의 주요한 무역분쟁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다. 스티브 비건 대북정책 특별대표와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방북을 취소한 뒤 내놓은 발언들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11월 중국 베이징의 인민대회당에서 시진핑 주석과 공동성명을 발표하면서 손을 흔들고 있다. 베이징/로이터연합뉴스

중국은 강하게 반발했다. 화춘잉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브리핑 도중 트럼프 발언에 대한 코멘트를 요청받고 “미안하다. 우리는 미국 측에 의한 온갖 현란한 책임전가를 받아들일 수 없으며, 받아들이지도 않을 것이다”라고 못박았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화 대변인은 “미국 측(트럼프)은 사실관계를 왜곡하는 무책임하면서도 마술적인 논리를 동원하는 데 있어 세계 1위”라고 말했다. 공식 브리핑 대화록에선 “싱가포르 회담 이후 실천과 진전이 아마 순조롭지 않은 것 같다. 관련국은 반드시 성실하게 자신으로부터 원인을 찾아야지 반복적으로 흔들거나 남에게 잘못을 전가해서는 안된다”라며 표현을 순화했다.

트럼프는 기회 있을 때마다 “시 주석과 매우 강한 관계와 유대를 유지하고 있다”거나 “김 위원장과 매우 좋고 따뜻한 관계”라고 강조한다. 그러면서도 시 주석을 비난하거나, 김 위원장을 겨냥해 “미국은 언제라도 한국, 일본과 합동훈련을 재개할 수 있으며 그 경우 과거보다 훨씬 큰 규모일 것”이라고 위협한다. 트럼프가 내놓은 혼란스러운 메시지의 의미를 어떻게 파악해야 할까.

#“세계적인 수준의 포커꾼” 대 “사실을 왜곡하는 마술의 세계 1위”

싱가포르 대좌 이후 3개월이 다 되도록 북·미 협상은 ‘순서(sequencing)의 덫’에 빠져 있다. 북한은 핵·미사일 실험을 중단하고 풍계리 핵실험장을 폐쇄한 양보를 한 만큼 미국이 종전선언에 성의를 보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동시행동이 북한의 주장이다. 미국은 북한 핵무기 및 미사일의 목록과 함께 비핵화 시간표를 먼저 제시하라고 맞서고 있다. 서로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왜 자꾸 ‘중국 탓’이 나오는 것일까.

 수(手)가 읽히지 않을 때는 복기하는 것도 방법이다. 트럼프가 지난 3월 500억달러 규모의 중국산 수입품에 관세부과를 명령함으로써 포문을 연 미·중 무역전쟁은 트럼프 행정부의 핵심 국정 어젠다이다. 지난해 핵전쟁 위기로 치달았던 북핵 문제는 가장 시급하면서도 중대한 현안이었다. 트럼프가 두 개의 현안 가운데 덜 시급한 미·중 무역전쟁에 화력을 집중할 수 있는 여유는 역설적으로 김 위원장이 제공했다.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트럼프에게 중국은 북핵 문제 해결의 최대 원군이었다. “북핵 문제를 중국과의 큰 거래(grand bargain)로 풀겠다고 다짐했다(2017년 4월3일자 파이낸셜타임스 인터뷰).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발사를 통해 미국 본토를 타격할 능력을 갖추고, 6차 핵실험으로 수소폭탄 능력까지 확인하는 동안 미·중은 발을 맞췄다. 유엔 안보리 대북 제재안 협력은 물론, 조지프 던퍼드 미국 합참의장은 같은 해 8월 중순 북·중 국경을 관할하는 랴오닝성 선양의 북방전구지휘부를 방문, 인민해방군의 훈련을 사상 처음 참관했다. 미·중의 압박은 북한이 올해 초 대화국면으로 전환하는 데 어느 정도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주도권을 행사한 것은 김 위원장이었지만 ‘싱가포르 대좌’라는 눈부신 외교 업적의 주인공으로 비친 것은 트럼프였다. 핵전쟁의 불안을 해소했기 때문이다. 화급한 북핵 문제가 대화국면으로 전환됨으로써 트럼프에게는 미·중 무역 문제에 과감하게 접근할 공간이 열렸다.

문제는 미국의 대중 태세가 단순한 무역역조 해결 차원을 떠나 ‘시진핑의 중국’이 국가적 명운을 걸고 있는 발전전략의 해체까지 겨냥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트럼프는 시 주석이 지난해 가을 제19차 중국 공산당 전국대표대회(당대회)에서 국가발전 전략으로 내놓은 국영기업 중심 발전과 2025년까지 첨단기술 대국을 목표로 설정한 ‘중국 제조 2025’를 정조준하고 있다. 그 정점이 중국을 미국 주도 세계질서에 도전하는 ‘수정주의 세력’이자 ‘전략적 경쟁자’로 낙인찍은 지난해 12월, 트럼프 행정부의 새 국가안보전략(NSS)이었다.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6일 베이징의 인민대회당에서 포스탱 아르샹주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대통령과 악수를 하고 있다. 시 주석은 아프리카 국가들과의 분주한 외교행보를 보이면서 9일 북한의 건국절에는 참석하지 않기로 했다. 베이징/신화연합뉴스

미·중 관계는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서기 전에도 수없이 부침을 겪어왔다. 하지만 적어도 북핵 문제에 관한 한 협력해왔다. 트럼프는 그걸 깨기 시작했다. 북핵 협상의 답보상태를 두고 내놓는 중국 탓은 그 명확한 증좌인 것이다. 이는 단순히 미·중 간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김흥규 아주대 교수는 “트럼프는 북핵 문제를 협력이 아닌, 미·중 간의 전략적 경쟁의 틀에서 보기 시작했다”면서 “북핵 문제와 관련해 중국을 비난함으로써 오히려 중국을 압박하는 행태”라고 말했다. 트럼프가 미·중 간 묵계와 관계의 패턴을 바꾸면서 한반도 문제가 공동의 협력대상이 아니라 전략적 경쟁 수단의 하나로 전락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김 교수는 “트럼프의 ‘중국 탓’에 근거와 내용이 있다면, 해결방안을 찾을 수 있겠지만, 밑도 끝도 없다는 게 중국이 처한 딜레마이다”라고 분석했다.

김동엽 경남대 교수는 “중국에는 미국이 북한보다 중요하고, 미국에는 중국이 북한보다 중요하다”면서 “미·중이 서로의 이익을 위해 다른 걸 희생할 수 있는 카르텔구조로 바뀐다면 북핵 문제가 자칫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시 주석이 올해 세차례나 김 위원장의 방문을 받았으면서도 북한의 건국절인 9·9절에 답방을 하지 않는 연유에는 미·중관계의 지각변동이 반영됐기 때문일 게다.

트럼프는 북핵 문제에 관한 한 “다른 대통령들이 벌써 수십년 전에 풀었어야 할 문제다. 내가 풀겠다”는 적극적인 의지를 내보였다. 하지만 미·중 간 강대국 정치의 소용돌이에 한반도 문제가 빨려들어간다면 해결은 더욱 요원해질 수밖에 없다.

한때 동아시아 최강의 위용을 자랑하던 북양함대는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 연합함대에 궤멸당했다.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2021년)과 인민공화국 건국 100년(2049년) 등 두 개의 백년을 화두로 내세운 시 주석은 종종 역사에서 정치적 메시지를 찾아낸다. 영국군과 일본군에 잇달아 점령당했던 굴욕의 땅, 류궁도에서 “항상 경종을 울리고 역사의 교훈을 되새겨야 13억 중국인이 분발해 강성해질 수 있다”고 말한 것도 그 때문일 게다.

#세번째 남북정상회담

김 위원장은 올해 3차례 정상회담을 통해 북·미관계 개선에 앞서 중국과 생길 수 있는 마찰을 예방하는 한편, 그 과정에서 북·중이 함께 꾸려갈 대화의 보따리를 만들었다. 트럼프의 표현이 저속해서 그렇지 으르고 달래는 것은 기실, 국가 간 협상의 기본이다. 북·중·미의 공통점은 모두 상대를 으르고 달랠 카드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카드가 가장 빈약한 것은 한국이다. 그 와중에 한·중관계 역시 아직은 기반이 튼튼하지 못하다.

지난 6월 말 서울을 다녀간 그레고리 트레버턴 전 미국 국가정보위원회(NIC) 의장에게 ‘류궁도 사진’의 의미를 묻자 “자국민을 오디언스로 한 민족주의 메시지일 것”이라고 답했다. 김 위원장이 세 번이나 중국으로 달려간 연유에 대해서는 “북한이 일부 시장경제를 도입했다고 해도 임금이 시장 가격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이라면서 “중국과의 솔리대리티(연대)가 필요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중 경쟁구도에서 북한을 바라보기 시작한 미국, 민족주의 정서 속에서 미·중 전략의 새로운 설계도를 고민하는 중국, 미·중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면서 국익을 최대화하려는 북한. 오는 18~20일 올 들어 세번째 남북정상회담을 앞둔 한반도 외교안보 기상도의 밑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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