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항공모함 로널드 레이건호 전단이 지난 8일 필리핀 근해에서 일본 해상자위대 소속 군함·항공기들과 합동훈련을 하고 있다. 이번 훈련은 예정된 것이었지만, 지난 9월30일 중국 구축함이 미국 구축함을 향해 공격적으로 위협항진 한 뒤 실시돼 주목을 받았다. 로이터연합뉴스 



 “인도네시아는 남중국해 영유권 다툼에서 ‘비분쟁(non-claimant)’국이다. 평화적 해결의 중재국이자 중립국을 표방한다. 최대한 자유로운 대화창구를 늘리려고 노력한다. 어쩌겠는가. 단독적인 외교대응에는 한계가 있고, 그렇다고 중국과 맞대결하는 것도 녹록지 않다. 정부 입장은 두 가지다. 지역안정을 추구하되 인도네시아의 영유권과 식량(수산물) 안보를 지키자는 것이다.” 지난 5일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에서 만난 외교안보 전문가들의 견해를 기자가 종합한 말이다. 밖에서 본 동남아 국가들은 모두 중국과의 해상분쟁에 들끓고 있었지만, 정작 자카르타 엘리트들의 반응은 애매했다.


 우리에게 아시아 국가들은 많은 경우 숫자 속에 존재한다. 교역액과 방문객의 규모가 주 관심이다. 고민의 결을 들여다보기 전에 목표를 숫자로 설정하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대상으로 여긴다. 지난주 자카르타와 브루나이 다루살람, 필리핀 마닐라를 둘러보며 새삼 되돌아보게 된 우리의 ‘동남아 근시안’이다. 북핵 문제와 중첩된 우리의 최대 화두는 미·중 사이의 활로 모색이다. 고고도미사일방어체제(사드) 파동에서 입증됐듯이 미·중이 충돌하면 불똥이 엉뚱하게 튀기 때문이다. 동남아시아국가연합(아세안) 국가들의 고민도 그 구조가 크게 다르지 않다. 각각 처한 안보 및 경제 상황에 따라 고민의 성격과 깊이가 다를 뿐이다. 주한 미국대사관이 주선한 3개국 연구여행의 주제는 ‘미국과 동남아시아 관계’였지만, 가는 곳마다 화두는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이었다. 그 태풍의 눈은 미·중 간 군사적 대치다.  


 인도네시아 북서부의 나투나 제도는 중국이 일방적으로 선포한 남해구단선과 배타적경제수역(EEZ·200해리)이 겹친다. 2014년 봄 취임한 조코 위도도 대통령은 어업주권을 강조하면서 불법조업하는 타국 선박에 대한 ‘침몰(Sinking Ships) 정책’을 공표했다. 이후 중국과 베트남, 말레이시아, 필리핀 어선 60여척을 침몰시켰다. 외교적 갈등이 있었지만 강행하고 있다. 태평양과 인도양을 끼고 있는 인도네시아의 미래 국가비전을 ‘글로벌 해상강국’으로 제시한 위도도 대통령이다.



남중국해 스플래틀리군도(중국명 난사군도)의 한 무인도의 지난 4월21일 항공촬영사진. 남중국해에 산재한 50개의 섬과 암초는 중국과 동남아 각국 간의 영유권 분쟁 대상이다. 중국은 3개의 암초를 매립, 공군비행장을 비롯한 군사기지화해 미국과 주변 국가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2016년에는 “주권에는 타협이 있을 수 없다”면서 나투나 제도 근해의 해군함상에서 각료회의를 열었다. 그럼에도 인도네시아는 한사코 분쟁 당사국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나투나 제도 인근을 자신들의 ‘전통적 어장’이라고 주장하는 중국과 부딪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국내 지도에서 나투나 제도 근해를 ‘치나슬라탄(남중국해)’에서 ‘북나투나해’로 바꾼 게 그나마 위도도 정부가 취한 가시적 조치였다. 한 현지 언론인은 “인구의 64%가 자바섬에 거주한다. 궁벽한 변방인 나투나 제도는 어선 침몰이나 외국 어선의 침탈이 아니면 거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고 말했다. 


 얼핏 어정쩡해 보이는 인도네시아 정부의 입장은 비동맹 원칙과 무관치 않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자유롭고 개방된(Free and Open) 인도-태평양 전략’을 환영하면서도 그 핵심이자, 군사적으로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일본·인도·호주의 4국 안보대화(Quad)에 선뜻 손을 내밀지 않는다. 중국을 경계하면서도 비동맹 원칙을 유지하는 것은 어찌 보면 미·중 사이에 낀 인도네시아의 합리적인 선택지일지도 모른다. 분쟁국들을 각개격파하려는 중국의 ‘양자 해결 원칙’에도 반대하지 않는다. 분쟁의 당사자이면서도 중재자의 역할을 자임하는 아이러니는 인도네시아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다만 대륙세력과 해양세력 간에서 양자택일의 강박감을 갖고 있는 반도국가와 영토·인구 면에서 해양대국의 사고에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현지 전문가의 말이 정곡을 찔렀다.


 “왜 꼭 미·중 사이에서 한쪽만 선택해야 하나. 양쪽에서 모두 이해를 추구하는 게 외교 아닌가. 일본이나 미국, 옛 소련은 물론 어떤 강대국도 세력 확대기에 같은 길을 밟았다. 이번엔 중국일 뿐이다. 중국은 자신들이 구축한 인공섬에서 당분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사이 아세안 주요국의 지위를 활용, 중국이 ‘선(군사행동)’을 넘지 않도록 최대한 외교적 대화채널을 넓히는 것이 우리의 복안이다.” 



미국 항공모함 존 C. 스테니스호가 지난 11월13일 해상보급을 받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남중국해 분쟁은 중국이 1990년대부터 남중국해에 본격 진출, 인공섬을 조성해 군사기지화하면서 불거졌다. 중국과 베트남, 필리핀, 인도네시아, 브루나이, 대만 등 7개국이 관련된 양자·다자 간 영유권 다툼이다. 가장 큰 원인은 중국이다. 2000년 전 한나라 때 남중국해와 섬을 발견했다는 역사적 권원(權原)을 주장하면서 1953년 일방 선포한 남해구단선을 실효화하면서 악화됐다. U자형의 남해구단선은 남중국해 전체 해역의 90%를 포함, 다른 동남아 국가들의 200해리 EEZ와 겹친다. 50여개의 섬과 암초 등의 영토와 EEZ를 둘러싼 분쟁이 진행 중이다.


 필리핀은 베트남과 함께 남중국해 분쟁에서 중국과 정면으로 맞서는 대표적인 국가다. 1990년대 중반 한국전 참전용사 출신 피델 라모스 대통령은 “일전불사”를 다짐했다. 베그니노 아키노3세 대통령은 중국이 주장하는 역사적 권원의 합법성을 네덜란드 헤이그의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에 제소, 2016년 7월12일 승소를 이끌어냈다. PCA는 중국의 역사적 권원을 부정하고, 중국이 개발 중인 인공도서 지형들은 EEZ와 대륙붕 개발권을 확보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다만 남중국해 섬과 암초들의 영유권 및 영해에 대해서는 판결을 내리지 않았다.


 필리핀의 명백한 승리였지만, 공허한 승리였다. PCA 판결 12일 전에 취임한 로드리고 두테르테 정부의 정책 선회 때문이다. 중국과 갈등을 빚는 대신 양자협의메커니즘(BCM)을 설정, 공동 자원탐사를 모색하고 있다. 지난 9일 마닐라에서 만난 외교 관계자 및 현지 언론인들은 두테르테의 대중국 포용정책에 대한 생각이 엇갈렸다.


 친두테르테 성향의 학자는 “아키노는 안 했고, 두테르테가 하는 것을 볼 필요가 있다”면서 스플래틀리 군도(중국명 난사군도) 내 인프라 개발과 필리핀 군 현대화를 높이 평가했다. 두테르테 취임 2년 만에 아키노 집권 6년 동안의 중국 투자액을 초과했다는 사실도 강조했다. PCA판결문은 향후 협상 칩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두둔했다. 하지만 많은 전문가들은 두테르테의 남중국해(필리핀명 ‘필리핀 서해’) 정책에 대해 “전략은 옳지만 전술이 아마추어적”이라고 비판했다. 중국과 경제협력을 하는 한편으로 PAC 승소 판결문을 지렛대로 유엔총회 결의안이라도 도출해냈어야 한다는 아쉬움을 표출했다. 지난해 아세안 의장국이었으면서 필리핀 서해와 관련한 어떠한 어젠다조차 올리지 못한 점도 실책으로 꼽았다.


카를리토 갈베스 필리핀 육군참모총장(왼쪽)이 지난 10월29일 필리핀 북동부 케손시티 교외의 아귀날드 기지에서 존 리처드슨 미해군 제독과 공동기자회견을 하기에 앞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미 해군은 지난 9월30일 미·중 구축함의 충돌위기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매립한 인공섬 근해로 해군함정을 들여보내는 항행의 자유작전을 계속할 방침을 분명히 했다. 

케손시티/AP연합뉴스 


 인도네시아가 나투나 제도 EEZ 내 중국의 군사행동을 레드라인으로 설정했다면 필리핀은 스카보로 암초(중국명 황옌다오)에 대한 중국의 인공섬 군사기지화를 금지선으로 여기고 있다. 필리핀 역시 미·중 갈등 사이에서 양자택일이 아닌, 양다리 걸치기를 선택한 듯했다. 한 안보 전문가는 “근본적으로 미·중 간 선택의 문제라기보다 선택범위(spectrum)의 문제”라고 정리했다. “지난해 과도하게 중국에 경도됐던 두테르테가 올해 들어 대미 관여를 넓히는 등 위험분산(hedging)을 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취임과 동시에 ‘독자(independent) 외교노선’을 표방한 두테르테 대통령은 군사동맹을 맺고 있는 미국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대중국 포용(engagement) 정책을 시작했다. ‘필리핀의 트럼프’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그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입에 발린 러브콜을 보내면서도 중국과 러시아에 다가갔다. 2016년 베이징 방문에선 “시진핑 국가주석의 중국과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러시아가 필리핀과 함께 세계에 맞서는 세 나라”라는 말까지 내놓았다.


 오는 20~21일로 예정된 시진핑 주석의 필리핀 방문 및 양국 정상회담 뒤 두테르테의 대중 정책이 포용과 헤징 사이에서 어디를 향할 것인지 가늠할 수 있을 것으로 관측된다.


 인구 42만명의 석유 부국 브루나이는 인도네시아와 마찬가지로 이슬람국가이자 비동맹국가다. 특정 국가가 아닌 모든 나라들과 친구가 되고 싶어 한다. 중국의 남해구단기선과 EEZ가 일부 겹치지만 심각한 문제로 삼지 않고 있었다. 석유 및 가스 채굴·생산 시설이 대부분 남해구단기선과 겹치지 않는 EEZ 50해리 안에 있기도 하지만, 중국의 투자자본을 적극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브루나이는 중국 정부의 일대일로 프로젝트(BRI)에서 기회를 보고 있다. 중국 헝이(恒逸)그룹이 정유 인프라 건설에 35억달러를 투자했으며, 향후 200억달러 이상을 쏟아부을 계획이다. 현지 언론인들은 그러나 “결국 중국이 브루나이를 빼앗아갈 것이라는 불안이 SNS상에 확산되고 있다”고 전했다.


 남중국해 분쟁은 미 해군이 ‘항행의 자유(FON)’ 작전을 개시한 2015년을 기준으로 ‘중국 대 동남아 특정국’의 대립구도에서 미·중 간 해양 패권다툼으로 판이 커졌다. FON은 특정국 영해 안이라도 해당국의 평화와 안전을 저해하지 않는 한 무해통항(innocent passage)권을 갖는다는 국제법적 근거를 두고 있다. 하지만 미국은 중국의 인공섬 영유권 주장을 무시하기 위한 무력시위의 일환으로 삼고 있다. 충돌 위험은 상존한다. 지난 9월30일 중국 구축함 란저우가 미국 구축함 디케이터 앞으로 근접 항진했다. 미국 군함을 먼거리에서 경계하던 아웃복싱에서 인파이팅으로 교전수칙을 바꿔 위협을 가한 것이다. 길이 150m가 넘는 대형 군함 간의 거리가 40m까지 좁혀들자 결국 디케이터함이 선수를 돌려 충돌을 피했다. ‘치킨게임’에서 중국이 승리한 셈이지만 위기가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음을 새삼 상기시켰다. 풍부한 어장과 원유·가스 등 천연자원, 세계 주요 무역항로의 안전 등 3가지 과실이 달린 남중국해는 미·중 패권다툼 속에 출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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