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이 무지막지하게 밀어붙이고 있는 마약과의 전쟁이 남긴 장면. 지난 10월 30일 마닐라에서 열린 희생자 추도식에서 가족들이 고인의 영정 앞에 하얀 장미꽃을 놓고 있다. 경찰은 물론 자경단을 동원해 마약사범 또는용의자들을 살해하는 두테르테 대통령의 잔인한 정책에 피살당한 사람들은 대부분 빈민가 주민들이다. 마닐라/AP연합뉴스
필리핀 마닐라 한복판에서 흡연에 어려움을 겪게 될 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1990년대 중반 웬만한 항공기에서 금연을 실시할 때도 필리핀 국적기에서는 흡연이 허용됐을 만큼 흡연에 관대한 나라였다.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73)의 급진적인 금연정책을 사전에 파악하지 못했다. 그 결과 지난 8일 저녁 근사한 레스토랑과 카페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마닐라의 가로수길’ 마카티에서 무심코 담배를 빼어물었다가 기겁을 해야했다. 지나던 행인이 근처의 ‘제복’을 가르키며 황급히 제지했기 때문이다. 이방인을 걱정하는 마음이 담긴 몸짓언어였다. 노천 흡연장소는 식당에서 족히 30m나 됐다. 두테르테는 마약과의 전쟁만 시작한 게 아니었다. 지난해 5월부터 필리핀 전역의 공공장소는 물론 인도에서 담배를 피우다 적발되면 누적 횟수에 따라 최장 4개월 징역형에 처해진다.
2016년 6월 두테르테 취임 이후 마약 복용 또는 거래 혐의를 빌미로 2만명 이상이 피살된 것으로 추산된다. 상당수 사법절차 없이 자경단원들이 현장에서 집행했다. 이를 밝히려는 법조인들도 사적 처형 대상이다. 두테르테 취임 이후 이달 초까지 의문의 암살을 당한 법조인만 35명이다. 공권력은 단 한명의 용의자도 찾아내지 않았다.
금연정책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담배에 관대했던 사회분위기를 급작스레 돌려놓은데는 정치적 의도가 담겨 있기 십상이다. 담배와 마약으로부터 자유로우면 맑고 깨끗한 나라가 될까. 깨끗함에 대한 강박이 정치권력과 잘못 만나면 국가폭력이 된다. 순수와 민족이 만나 인종청소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두테르테에게 마약범죄자들은 치워야 할 쓰레기에 불과하다. “마약거래인들의 시체를 마닐라만에 내다버리면 물고기들을 살찌울 것”이라면서 “취임 6개월 내 마약범죄인 수만명을 죽이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집권 2년 반이 되지만 필리핀이 깨끗해졌다는 증거는 별로 없다.
범죄에 대한 두테르테의 ‘살인 해법’은 그가 대선출마 전까지 22년 동안 시장을 지낸 다바오시에서 이미 허실이 드러난 바 있다. 자경단원들을 동원해 1400여명의 ‘범죄 혐의자’들을 살해했지만 2010~2015년 살인범죄 발생률 1위, 성폭행 2위로 종합 범죄지수가 필리핀에서 4위를 기록했다. 그럼에도 두테르테는 “다바오가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도시”라는 주장을 태연하게 내놓고 있다. 기실 두테르테에게 마약은 조작된 공포를 부추기기 위한 도구였다. 필리핀 정치학자 리처드 헤이다리안은 저서 <두테르테의 부상>에서 두테르테는 마약과 범죄에 포위된 국가라는 공포심리를 조성, 강력한 지도자의 등장이 절실하다는 점을 선전했다고 지적했다.
필리핀을 국빈방문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20일 마닐라 말라카낭 궁에서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의 영접을 받으며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시 주석은 “비온 뒤에 무지개가 뜬다”면서 2012년 스카보로 암초를 강점하면서 악화됐던 양국 관계의 복원을 다짐했다. 마닐라/로이터연합뉴스
두테르테의 정치적 성공은 전형적인 포퓰리스트의 교본을 충실히 따른 결과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뺨친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 제1의 원칙은 국외자의 이미지다. 필리핀의 정치, 경제는 소수의 유력 가문들이 좌지우지하는 패밀리 비즈니스다. 다바오시에 뿌리를 둔 대표적 유력가문 출신인 그는 엉뚱하게도 스스로를 기성 제도권 밖의 아웃사이더로 포장했다. 페이스북을 기반으로 열성 지지자들을 동원해 살포한 가짜뉴스로 가능했다. 트럼프가 ‘워싱턴’을 겨냥해 ‘워싱턴 밖’의 민심을 대변하는 것처럼 위장했듯 두테르테는 ‘마닐라 황실(Imperial Manila)’을 손가락질 하면서 표를 챙겼다.
포퓰리즘은 증오와 공포를 숙주로 한다. 하지만 100% 조작은 있을 수없다. 많은 사회구성원들이 오랫동안 직면해온 집단적 절망이 없다면 싹을 틔울 수없기 때문이다. 구미 포퓰리즘은 주로 이민자로 인한 경제적 박탈감과 정체성 위기에서 비롯됐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심화된 헝가리와 폴란드 등 동유럽의 포퓰리즘은 여기에 반서방의 프리즘을 덧씌웠다. 현실의 고단함을 대변해왔던 중도좌파 정당들은 이미 세계화의 포로가 된지 오래다. 연대와 통합의 좌파 가치를 말하지만, 정권을 잡고 내놓는 것은 하나 같이 신자유주의 정책이다.
기댈 언덕을 잃은 민심을 채가는 것이 포퓰리즘이다. 표면적인 경제실적은 문제가 아니었다. 전임 베니그노 아키노 대통령 재임 6년 동안 평균 경제성장률은 6%를 넘었다. 두테르테 집권 이후에도 6%대의 성장률을 보이고 있다. 이민 문제 역시 중요치 않다. 필리핀은 역으로 해외 인력송출로 국가경제를 지탱하는 나라다. 가톨릭 국가이지만 이슬람과의 갈등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포퓰리즘이 먹혔을까.
그 답은 40대 유력가문들이 권력과 재력을 과점하는 필리핀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서 찾아야할 것 같다. 헤이다리안 박사는 필리핀과 같은 신흥국가에서 포퓰리즘이 발흥하는 원인으로 기존 시스템에 실망한 중산층의 집단 좌절을 꼽고 있다. 기대는 높아지지만 국가기관들의 구조적 비효율성 탓에 더이상 나아갈 곳이 없는 현실이 주는 좌절감이다.
필리핀은 아직 산업혁명을 경험하지 않았다. 제조업 기반이 없는 소비 주도 경제이다. 중국이 ‘세계의 공장’이라면 필리핀은 ‘세계의 비서(백 오피스)’라고 할만하다. 비즈니스 프로세스 아웃소싱이라고 부르는 콜센터 사업이 국내총생산(GDP)의 10%를 차지한다. 의사와 기술자에서 가사도우미까지 해외취업자들이 보내오는 송금액도 10% 정도다. 경제적 이권을 틀어쥔 유력가문들은 굳이 리스크가 따르는 제조업을 일으키지 않는다. 콘도와 주택을 지어 임대료를 받거나, 대형 쇼핑센터를 지어 소비자들의 지갑을 터는 것으로 만족한다. 필리핀 공기업(GOCC)은 대대로 권력과 결탁한 유력 가문들이 부를 나누는 빨대였다. 마닐라 외교가에선 해외 가족이 돈을 보내오면 쇼핑센터에 들고가서 쓰는 게 필리핀 경제라고 요약한다.
트리클 다운은 필리핀에도 없었다. 국가경제가 성장하고 집값이 오르지만 정작 내 주머니는 늘 허전하다. 2013년의 경우 40대 가문이 성장 과실의 76%(세계은행)를 폭식했다. 불만의 정서는 출구를 찾고 있었다.
지난 20일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정상회담을 하고 있는 마닐라 말라카낭궁 밖에서 학생 시위대가 중국 오성홍기를 든 채 두 지도자를 희화화한 마스크를 쓰고 반중시위를 벌이고 있다. 여론은 남중국해의 영토주권을 위협하는 중국을 반대하지만 두테르테 대통령은 인프라 건설을 명분으로 차이나 머니에 손을 내밀고 있다. 마닐라/로이터 연합뉴스
아시아에서 가장 오랜 민주주의 국가의 하나이지만 민주주의 역시 희망이 되지 못했다. 피플파워를 통해 세차례나 정권을 교체했지만 늘 도돌이표였다. 1986년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의 21년 독재를 무너뜨렸지만 한 유력 가문에서 다른 가문으로 정권을 옮긴 데 지나지 않았다. 코라손 아키노 모자와 피델 라모스 모두 유력 가문의 일원이었다. 유일한 서민대통령으로 분류됐던 조지프 에스트르다 대통령은 부패혐의 탓에 재임 3년이 안돼 피플파워에 실각했다.
또다른 유력가의 글로리아 아로요 대통령은 부정선거와 횡령 혐의로 퇴임 1년 남짓 지나 선거부정과 공금유용 등의 혐의로 구속됐다. 환자복 차림으로 종종 외신에 등장했던 아로요는 지난 7월 하원의장으로 날씬하게 변신, 두테르테 찬가를 부르고 있다. 구순을 바라보는 마르코스의 부인 이멜다(89)는 현역 하원의원으로 가문의 영광을 잇다가 지난 9일 철퇴를 맞았다. 필리핀 반부패 특별법원으로부터 최고 징역 77년을 선고받았다. 촛불도 여러번 들면 맥이 빠진다. 이쯤되면 유권자들이 피플파워에 피로를 느끼는 것도 이상할 게 없다.
두테르테의 정치는 포퓰리즘의 동의어처럼 사용되는 애국주의 또는 민족주의와도 거리가 멀다. 오히려 남중국해 분쟁을 계기로 증폭된 필리핀 사람들의 반중정서에 역행하고 있다. 지난 20~21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필리핀 국빈방문을 ‘역사적인 이정표’라면서 우호관계를 다짐했다. 남중국해 석유·가스 탐사를 비롯한 29개 프로젝트에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의기양양했다. 미국의 든든한 군사동맹국에서 중국에 추파를 던지는 이중 국가로 변모하는 것이다. 중국과 체결한 양해각서 중 4개가 과거 미국 해·공군 기지였던 수빅과 클라크 지역 개발과 관련됐다. 미국이 비운 자리를 중국이 메우는 모양새다.
필리핀은 피플파워로 세차례나 정권을 교체했다. 그때마다 미국과 세계의 찬사를 받은 필리핀 민주주의가 바꿔놓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말라카낭궁의 입주자만 한 유력가문에서 다른 가문으로 바꿨을 뿐이다. 사진은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의 21년 장기독재를 무너뜨린 1986년 2월 피플파워의 상징적인 장면으로 마닐라시 에피파니오 델로스 산토스 거리를 가득 메운 시위 군중들이다. 위키페디아
포퓰리스트 정치인의 유일한 덕목은 공약을 성실하게 실현한다는 점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과 동시에 양자·다자간 자유무역협정(FTA)를 파기 또는 재협상하고, 이슬람 국적자의 입국금지령이나 최근 군대를 동원해 멕시코 불법이민 행렬을 제지하는 조치는 모두 공약 이행의 일환일 뿐이다. 두테르테는 ‘6개월 내 수만명’까지는 아니었지만 마약사범 용의자 살해 약속을 지키고 있다. 마약정책과 함께 두테르테의 양대 공약은 인프라 건설이었다. 특히 민주화 이후 역대 정부가 외면해온 교통 인프라 개선과 신도시 개발이 중심이다. 이른바 ‘토건, 토건, 토건(Build, Build, Build)’정책이다.
지하철과 마닐라의 교통지옥을 개선하기 위한 통근 철도 클라크 그린시티 개발 및 투투반-마닐라-클라크-파판가를 잇는 통근 철도망 등이 포함됐다. 2018년도 정부예산 3.77조 필리핀페소(80조8431억원)의 3분의1을 투입했다. 두테르테가 차이나 머니를 위해 남중국해 영토주권 다툼을 미뤄놓은 것은 바로 중국의 인프라 투자를 받기 위해서다.
하지만 중국은 필리핀의 더 많은 정치적 양보를 요구하며 쉽게 지갑을 열지 않고 있다. 2016년 두테르테의 방중 당시 240억달러 규모의 직접투자(FDI)와 공적개발원조(ODA)에 합의했다. 지난 3월 현재 중국 및 홍콩 자본의 실제 투자액은 10억4000만달러(필리핀 중앙은행)에 불과하다. 마카오에서 밀려난 카지노 건설에 대부분 들어갔다. 이번에 시진핑 주석과 합의한 29개의 프로젝트 중 실제 집행의지가 담긴 것은 2개 밖에 없다는 분석이 나온다. 그 중 한개는 두테르테의 고향인 다바오의 고속도로 건설사업이다. 아시아 포퓰리즘의 현장, 필리핀 방문 후기다.
국제전문기자 j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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