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10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 집무실에서 열린 한 회의 도중 상대의 말을 심각한 표정으로 듣고 있다. AP통신이 연말특집으로 작성한 '트럼프가 워싱턴을 바꾸었다'는 기사에 딸려 올린 사진이다. AP연합뉴스
‘트럼프의 엔진’은 멈추지 않는다. 지난 11월 중간선거에서 ‘예상대로’ 하원 주도권을 민주당에 내주고, 상원 과반수를 유지했지만 백악관 주인의 세계 다시 만들기는 더딤 없이 이어지고 있다. 안으로 연방정부 셧다운(일시 업무정지)을 불사하면서 멕시코 국경장벽 건설예산을 내놓으라고 의회를 윽박지르고 있다. 금리 인상을 단행하는 제롬 파월 연방준비제도(연준·Fed) 의장과도 각을 세우고 있다. 그 탓에 매년 성탄절에 월스트리트의 주식시장에 돈뭉치를 선물했던 ‘산타’가 올해는 오지 않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72)은 2019 회계연도에 트럼프 행정부가 의회에 요구한 장벽 건설 예산(50억달러)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연방정부 문을 열지 않겠다는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트럼프가 연말에 승부수를 던진 것은 내년 1월3일 민주당이 하원을 주도할 제116대 연방의회 개원일 전에 통과시키기 위해서다. 이래저래 어수선한 연말이다.
■ 새해 닥쳐올 더 큰 태풍
여기까지가 눈에 보이는 2018년도 세밑 풍경이다. 올 하반기 세계경제를 격랑에 몰아넣은 미·중 무역전쟁이 지난 1일 90일간의 휴전에 돌입한 덕에 태풍의 강도가 약해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눈에 덜 띄는 곳에서 더욱 거대한 태풍이 조성되고 있다. 멕시코 장벽 건설 과정에서 읽어야 할 것은 트럼프의 강력한 실행의지다. 기실 지난 2년간 좌충우돌로 보인 트럼프의 대외행보는 유세 때부터 이어진 ‘신념’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고 보는 게 안전하다.
대통령 트럼프의 정치스케줄로 보면 올 연말은 임기 4년의 중간지점이다. 다음 달이면 집권 후반기에 돌입한다. 전반기가 시도하는 시기였다면, 후반기는 달성하는 시기다. 대통령 취임식이 있었던 지난해 1월20일자로 연방선거관리위원회(FEC)에 2020년 재선 캠페인을 공식 접수한 트럼프다. 현직 대통령으로선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속보였다. 민주당 유력주자들은 아직 등록조차 하지 않았다. 이후 기회 있을 때마다 집회와 선거자금 모금행사를 진행해왔다. FEC가 9월30일자로 공시한 그의 선거자금 모금총액은 6060만1310.67달러(682억원)다. 2020년 대선 슬로건은 ‘위대한 미국의 유지(Keep America Great)’다. 2016년 대선 슬로건대로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드는 일을 향후 2년 내에 완수하는 것을 전제로 한 다짐이다. 이를 위해 트럼프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이쯤 해서 트럼프의 각본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콜린 칼 스탠퍼드대 연구원과 핼 브랜즈 존스홉킨스대 교수가 지난해 2월 포린 폴리시에 발표한 트럼프의 ‘대전략(Grand Strategy)’은 여전히 유효하다.
■ 심화되는 아메리카 퍼스트
칼과 브랜즈는 아메리카 퍼스트의 4개 기둥을 경제민족주의·급진적인 국토안보·비도덕적 거래주의·근육질이면서 냉담한 군사주의로 정리했다. 형용사를 빼고 보는 게 좋다. 경제민족주의는 취임사에서 밝힌 바, “오늘부터 아메리카 퍼스트를 위해 무역과 세금, 이민, 대외관계에서 모든 결정을 미국 노동자와 미국 가정에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내리겠다”는 약속이다.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무효화하고, 북미자유무역협정(FTA) 및 한·미 FTA를 재조정한 것은 그 일부분이다. 급진적 국토안보는 취임 초 무슬림 입국 금지령과 멕시코 장벽으로 추진되고 있다. 거래주의는 미국 군사력의 도움을 받으려면 제값을 내라는 말이다. 유럽 동맹국들에게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분담금을 4%로 올릴 것을 압박하고 있다. 한·미 방위비 분담금협상(SMA)도 진행 중이다. SMA에서는 ‘제값’이 넘는 액수를 요구하는 게 문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26일 이라크 바그다드 부근 알 아사드 공군기지를 전격 방문, 미군 장병들을 상대로 연설을 하고 있다. 취임 2년 만에 처음으로 분쟁지역 전선 방문이었다. 바그다드/로이터연합뉴스
새해 가장 주목되는 것은 군사주의 노선이다. 시리아 전면 철군과 매티스 장관의 전격 사임이 이와 직결돼 있다. 트럼프는 후보 시절 “이제는 다른 나라에서의 ‘국가건설’을 끝내고 미국 국내로 눈을 돌려야 한다”고 강조해왔다. 하지만 취임 뒤 전방위적인 군사개입을 택했다. 트럼프 독트린의 정체를 ‘비자유주의적 헤게모니’로 간파한 MIT대 배리 포센 교수의 분석(포린 어페어즈)이다. 취임 1주일 만에 예멘 대테러작전을 성급하게 지시하더니, 석달 뒤에는 화학무기 사용을 빌미로 시리아 정부군 공군기지에 공습을 명령했다. 오바마 행정부가 그어놓은 레드라인을 트럼프가 실행에 옮긴 건 아이러니였다. 작년 1월 아프가니스탄 주둔군을 5500여명 늘렸다.
가장 극단으로 치달은 군사적 움직임은 취임 첫해 한반도 주변에서 벌어졌다.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발사와 핵실험을 거듭하자 장거리 전략폭격기들을 한반도 상공에 수시로 전개시켰다. 실제로 대북 군사공격을 심각하게 검토케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첫 아시아 순방기간 3개의 항모전단을 한반도 해역에 전개했다. 올해 5월을 기점으로 남중국해에서 영유권을 주장하는 중국을 위협하는 미 해군의 항행의 자유(FON) 작전 횟수를 부쩍 늘렸다. 11월엔 유럽 동맹국들의 반대에도 이란 핵합의(JCPOA)를 기어코 파기했다.
■ ‘세계의 경찰’은 노, ‘세계의 지배자’는 예스
트럼프는 지난 26일 취임 뒤 처음으로 이라크 바그다드 외곽의 미군기지를 방문한 자리에서 “미국은 더 이상 세계의 경찰일 수 없다”고 거듭 밝혔다. 그렇다고 세계 위에 군림하는 리더십을 포기하겠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국방예산을 대폭 늘린 것이 그 방증이다. 2019 회계연도 국방예산 요구액은 7160억달러로 이라크 및 아프간에서 두개의 전쟁을 수행하던 2011년 예산(8050억달러)을 제외하고 사상 최대 수준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해 12월 국가안보전략(NSS)과 올 2월 핵태세검토보고서(NPR)를 통해 핵전력의 현대화와 우주전 역량의 획기적 강화를 예고한 바 있다.
동맹을 배신할 수 없다는 매티스 장관과의 결별로 이어진 시리아 철군은 이러한 전방위 무력전개 정책의 명백한 U턴을 시사한다. 취임 후 전방위 개입 정책을 정리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트럼프가 육상·해상·공중에 이어 우주공간에서까지 미국의 압도적인 무력을 강화하려는 전략을 바꿨을 리는 만무하다. 이슬람국가(IS)와의 전쟁 승리를 선언하고 미군을 빼기로 한 건 오히려 집권 후반기 군사력 행사와 군비경쟁에서 선택과 집중을 하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취임 초 강조했던 러시아와의 전략적 관계 재정립으로 회귀하는 신호로도 읽힌다. 미·러 간 충돌의 무대였던 시리아를 떠남으로써 러시아에 다시 우호의 손길을 내밀었다는 해석이다. 리처드 닉슨 행정부가 데탕트를 통한 중국 카드로 러시아를 견제했다면, 트럼프는 ‘러시아 카드’로 중국을 압박하는 ‘닉슨 거꾸로 하기(Reverse Nixon)’ 구상이 되살아났다는 분석이 일각에서 제기되는 배경이다.
성탄절이었던 지난 25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 집무실에서 미군 장병들과 화상통화를 하는 도중 두 손을 잡고 있다. 워싱턴/로이터연합뉴스
■ 모든 길의 종착점은 베이징
트럼프가 집중할 대상은 단연 중국이다. 중동에선 이란을 조준하고 있지만, 트럼프 글로벌 군사·외교·통상 정책의 굵은 흐름은 중국으로 수렴된다.
지난 18일 트럼프는 11번째 군사령부인 우주사령부의 부활을 명령했다. 우주군 창설을 위한 준비조치다. 마이크 펜스 부통령은 창설의 명분으로 “중국이 인공위성을 파괴할 미사일 시험발사를 했고, 중국과 러시아가 우주에 직접 신무기를 배치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앞서 트럼프가 지난 10월20일 밝힌 러시아와의 ‘중거리 핵전력(INF) 폐기조약’ 파기 방침 역시 중국을 겨냥한 것이다. 겉으론 러시아 탓을 했지만 INF에서 자유로운 중국이 구축해온 탄도미사일망을 무력화하겠다는 의도라는 게 지배적인 분석이다.
당장 러시아 미사일의 사정권 안에 있는 유럽이 불안해지겠지만 트럼프에겐 동맹의 고통보다 중국 견제가 더 중요하다. 나토 회원국들에겐 일찌감치 분담금 확대를 통한 자력갱생을 촉구해놓은 상태다. 남중국해 항행의 자유작전은 중국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강화하겠다는 게 미국의 공식 방침이다. 트럼프가 지난 10월 서명한 ‘개발로 이어지는 보다 나은 투자의 활용(BUILD·빌드)법’ 역시 중국의 아프리카 영향력을 제한하기 위한 포석이다. 빌드법은 국제개발재정공사(IDFC)를 창설하고, 600억달러의 신흥국 인프라건설 지원 펀드를 만드는 게 요체다. 일대일로(RBI)를 내세워 신흥국 인프라 건설에 차이나 머니를 뿌리는 중국의 접근방식을 ‘약탈경제’ 또는 ‘포식자 경제’라고 비난해온 트럼프 행정부다.
■ 녹록지 않은 미·중 무역전쟁 전망
미국은 1월7일부터 베이징에서 중국과 무역협상을 재개할 것으로 전해지지만 미·중 무역전쟁이 휴전기간 안에 극적인 타결점을 찾을 가능성은 적다. 단순한 교역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중국의 지적재산권 침해와 기업 인수·합병 및 합작투자 등을 미끼로 벌어지는 첨단기술 약탈이 핵심이다. 2001년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한 이후에도 계속되는 비관세장벽과 사이버 기술침투 및 절도 문제도 해결을 요구하고 있다. 이 모든 관행을 중국이 내년 3월2일 0시(미국 동부시간 기준) 이전까지 개선해야만 중국 수출품 2000억달러에 25%의 관세를 철회하겠다는 게 휴전조건이었다. 중국이 미국 상품을 대거 사들이는 것만으론 해결이 안된다. 중국 정책에 관한 한 의회 민주당도 지지를 보내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부인 멜라니아가 지난 24일 워싱턴의 내셔널 커시드럴에서 열린 성탄 전야 예배에 참석하고 있다. 집권 후반기로 들어가는 내년 1월부터 트럼프 대통령의 세계 질서 재편작업은 속도를 높일 것으로 관측된다. 워싱턴/AP연합뉴스
트럼프 행정부의 중국관을 여실히 드러낸 것은 10월4일 펜스의 허드슨 연구소 연설이었다. 펜스는 “중국이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도구는 물론 온·오프라인에서의 선전 도구 등 국가 역량을 총동원해 미국의 리더십에 도전하고 있다”고 적시하며 ‘중국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거듭 다짐했다. 기업은 물론 미국 내 싱크탱크와 대학까지 회유와 압박의 대상으로 삼고, 미국 선거에 개입하는 중국과의 신냉전을 예고했다. 미국의 ‘중국 길들이기’가 새해 더 거세질 것이라는 전망을 하게 되는 까닭이다.
■ 한반도는 여전히 미·중 대치의 최일선
트럼프의 중국 견제는 한반도 사안과 구조적으로 연결돼 있다. 작년처럼 한반도 사안이 위태로워지면 ‘유사시 군사협력’ 및 추가 제재를 위해 중국의 협력이 긴요해진다. 반대로 지금처럼 대화국면이 유지되면 중국의 관여가 거추장스러워진다. 올 한해 미·중관계가 돌변한 변곡점은 6·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이었다. 트럼프는 싱가포르 회담을 전격 취소(5월22일)했다가 번복하고,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방북을 취소(7월29일)하면서 모두 중국을 이유로 들었다. 5월에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다롄 북·중 정상회담(5월6~7일) 뒤 태도가 바뀌었다”고 트집을 잡았고, 7월엔 미·중 무역전쟁을 빌미로 중국이 북한에 가하는 엄청난 압력을 비난했다. 미국의 강한 반발은 지난 7월 초 평양 북·미 고위급회담 자리에서 북측이 ‘중국이 포함된 종전선언’을 제안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조성렬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미국은 중국이 한국전쟁 당사자로 평화체제 협상의 마지막 단계에 들어오는 것은 몰라도 북·미 협상 초기부터 숟가락을 얹으려는 것을 막고 있다”고 짚었다. 중국이 유엔사 및 주한미군의 지위와 관련해 사사건건 끼어들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중국은 트럼프의 잇단 경고 이후 한반도 사안과 거리를 두고 있다. 중국 입장에서 한반도 문제보다 국가발전의 명운이 걸린 미·중 무역전쟁이 훨씬 중요하다. 이는 한반도 평화협정 논의 과정에서 예상되는 걸림돌의 일부를 치우는 효과로 이어질 수 있다. 새해 북-(남)-미 간의 논의가 북한 비핵화의 진전에 따라 급진전할 가능성을 열어두게 하는 근거다. 중국 변수가 적어지고 오롯이 ‘북한의 선택’만 남겨둔 셈이다.
국제전문기자 j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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