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도 섬마을의 소녀가 울산에서 수소산업을 공부하여 남포에서 창업하고, 몽골과 시베리아로 친환경차를 수출하는 나라. 회령에서 자란 소년이 부산에서 해양학교를 졸업하고 아세안과 인도양, 남미의 칠레까지 컨테이너를 실은 배의 항해사가 되는 나라. 농업 전공한 청년이 아무르 강가에서 남과 북, 러시아의 농부들과 대규모 콩농사를 짓고 청년의 동생이 서산에서 형의 콩으로 소를 키우는 나라.”
문재인 대통령이 올해 8·15 경축사에서 펼쳐 보인 ‘우리가 원하는 나라’였다. 문 대통령은 그즈음 ‘북한의 몇차례 우려스러운 행동’에도 불구하고 남과 북, 미국이 이어온 대화 분위기가 흔들리지 않는 것을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큰 성과로 꼽았다. 올해 광복절 경축사로 큰 그림을 제시한 ‘평화경제’는 만능 열쇠였다. 한반도 통일로 8000만 단일시장을 만들고, 세계 6위권의 경제 규모와 2050년 국민소득 7만~8만달러 시대 등을 예측한 연구 결과를 소개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지난 15일 관중 없이 텅 빈 평양 김일성경기장을 보고 난 뒤 새삼 문 대통령 연설문을 다시 꺼내 읽었다.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가 다음날 원색적인 비난을 내놓은 연설이었다. 조평통은 대변인 담화를 통해 “우리는 남조선 당국자들과 더 이상 할 말도 없으며 다시 마주 앉을 생각도 없다”고 단언했다. 공교롭게 광복절은 한·미 연합 지휘소훈련이 벌어지던 시점이었다. 국방부는 광복절 하루 전 2020~2024 국방중기계획을 발표했다. 북한은 한·미 훈련을 전쟁연습이라고 비난하며 단거리 미사일을 수차례 발사하던 끝에 문 대통령의 경축사를 비난한 것이다. 조평통 담화가 발표된 16일 아침에도 북한은 강원도 통천 일대에서 동해상으로 단거리 미사일로 추정되는 발사체를 쏘았다.
북한의 공개적인 면박에도 불구하고 문 대통령은 지난 9월24일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다시금 평화 제안을 내놓았다. 유엔의 모든 회원국들에 동서 250㎞, 남북 4㎞의 비무장지대를 국제평화지대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북한과 공동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겠다고도 선언했다. 하지만 아무런 메아리가 없었다. 지난 2년간 제안과 합의는 넘쳐났다. 이벤트 역시 모자람이 없었다. 평화는 ‘새로운 시작’이었다가 ‘새로운 미래’로 바뀌었다. 이쯤 되면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무언가 대안이 나와야 하건만 외교부, 통일부, 국가정보원과 청와대 국가안보실 등 관련 부처들은 침묵하고 있다. 어떤 생각들을 하며, 어떤 전략을 준비하는지 참으로 궁금하다. 남북관계 맥락을 보면 다음달 부산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에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초청 가능성은 생뚱맞기 짝이 없는 ‘아이디어’였다.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이 대북 군사공격을 심각하게 검토했던 지난해 초 남북관계가 위기 국면에서 평창 평화올림픽을 계기로 남북, 북·미 대화 국면으로 전환했다면, 올해 남북관계에는 단 하나의 일관성만 두드러진다. 바로 대화와 교류의 단절이다. 10·15 텅 빈 김일성경기장은 그 현주소를 극적으로 노출시켰다. 평창 올림픽,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6·12 싱가포르 대좌, 도보다리 산책의 서정적인 장면을 남긴 4·27 판문점선언과 9·19 평양공동선언, 능라도경기장에 모인 15만 평양 시민들을 상대로 했던 문 대통령의 연설. 숨가쁘게 진행되던 대화와 화해 선언들은 이제 과거가 됐다.
6·30 판문점에서의 북·미 정상회동을 끝으로 북·미 간 현란했던 외교 이벤트의 계절 역시 끝났다. 트럼프가 기획하고 김 위원장이 출연한 ‘판문점 드라마’에서 문 대통령의 출연시간은 짧았다. 북한 외무성의 권정근 미국담당 국장은 판문점 북·미 회동 사흘 전 “협상을 해도 조·미가 마주 앉아 하는 것인 만큼 남조선 당국을 통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며 남측을 철저히 배제했다.
평화 역시 과학적으로 구축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동안 평화를 구축하려는 노력이 있었는가. 여기서 중대한 시간적 편차가 생긴다. 평화경제는 중장기 과제이지만, 남북관계의 악화는 현재 상황이다. 북측에 평화는 청사진에만 있는 ‘그림의 떡’일 뿐이다. 북이 목전의 현실을 말하는데 남은 머나먼 중장기만 말한다면, 당연히 대화가 이뤄질 수 없다. 조건에 따른 전시작전권 전환을 위해서는 북이 반발하는 한·미 연합훈련을 계속해야 한다. 두 개의 서로 다른 목표를 추구하려면 그 사이에 정밀한 전략과 치열한 조율이 필요하다. 그 과정이 생략된 채 평화 메시지만 발산한다면 그것은 정책이 아니다.
내친김에 문 대통령의 올해 3·1절 기념사도 다시 읽었다. 기념사는 이념과 진영의 시대를 끝내자면서 ‘신한반도체제’를 비전으로 제시했다. 그런데 3·1절 기념사에 있었다가 8·15 경축사에서 사라진 대목이 눈길을 끈다.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의 재개 방안도 미국과 협의하겠다”는 약속이다. 작년 9월 평양공동선언에도 ‘조건이 마련되는 데 따라’ 우선적으로 정상화하기로 합의한 사업들이다. 북한의 비핵화가 ‘돌이킬 수 없는 수준’에 도달하기 전 남측이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 대열에서 이탈하는 건 물론 어렵다. 하지만 관광을 비롯해 제재 대상이 아닌 분야에서 남북 간 합의를 부분 실천하려는 최소한의 노력은 필요했다. 시간이 갈수록 북측의 변화라기보다는 남측의 변화로 읽힌다. 3·1절과 광복절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북한의 불만은 4월12일 김 위원장의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 담겨 있다. 그는 “남조선 당국은 추세를 보아가며 좌고우면하고 분주다사한 행각을 재촉하며 오지랖 넓은 ‘중재자’ ‘촉진자’ 행세를 할 것이 아니라 민족의 일원으로서 제정신을 가지고 제가 할 소리는 당당히 하면서 민족의 이익을 옹호하는 당사자가 돼야 한다”고 꼬집었다. 비난을 위한 비난은 아니었다. 한·미가 합동군사연습 중단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을 거론하며 “미국의 시대착오적인 오만과 적대시 정책을 근원적으로 청산하지 않고서는 북남관계에서의 진전이나 평화번영의 그 어떤 결실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때늦기 전에 깨닫는 것이 필요하다”며 여지를 남겼다. 북한 체제에서 ‘최고 존엄’의 한마디는 아래로 내려올수록 표현이 거칠어진다.
지난 5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북·미 실무협상을 전후해 정부는 북·미 대화의 진전에 기대를 걸었음직하다. 하지만 북·미 협상의 ‘낙수효과’는 없었다. 북측은 결렬 성명을 미리 준비할 정도로 애초 큰 기대를 하지 않았음이 확인됐다. 정부로선 그 끝에 기대한 이벤트가 월드컵 남북 축구였을지도 모른다. 이를 간파한 북한이 무관중, 무중계 경기를 강행한 것은 남측의 기대에 우악스럽게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김일성경기장의 무관중 경기는 지난해 이후 쌓아온 북한의 국가이미지에도 타격을 입혔다. 어떠한 정치적 포석이 있었더라도 북한 체제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텅 빈 경기장과 북측이 건설하겠다고 밝힌 ‘사회주의 문명’을 겹쳐보면 도저히 맞지 않는 그림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북측이 이런 결정을 한 배경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지난해 대화의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가볼 필요가 있다. 북한은 4·27 판문점 남북정상회담 1주일 전 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3차 전원회의를 열어 기존의 핵·경제 병진노선의 승리를 선언하면서 ‘경제건설’에 집중할 것을 결정했다. “더 이상 인민이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한 김 위원장이다. 북한이 경제를 최우선시한 것은 그만큼 사정이 어려움을 역설적으로 말해준다. 내년은 북한이 정주년으로 중시하는 노동당 창건 75주년이다. 판문점선언 다음달 김 위원장이 당 7차 대회 중앙위 사업총화 보고에서 “철저히 수행해야 한다”고 다짐한 국가경제발전 5개년 전략의 마지막 해이기도 하다. 하지만 당장 올 12월이면 안보리 대북 제재 2397호에 따라 북한의 해외 파견 노동자들이 전원 복귀한다.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발사로 핵무력을 갖췄다고 선언했지만 그 과정에서 가해진 유엔 대북 제재의 효과가 본격적으로 반영되기 전에 대화에 나섰다. 국내외 많은 북한 전문가들이 동의하는 대목이다. 그런데 온갖 제안이 오가고 합의문이 만들어지는 동안 경제 조건은 달라지지 않고 있다. 지난 2월 하노이 북·미 협상에서 북한이 민생 부문과 관련된 제재의 해제를 요구한 것은 경제적 어려움을 공개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강한 부정은 긍정의 다른 표현이다. 김 위원장은 4·12 시정연설에서 제재 해제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말을 반복하며 자력갱생을 강조했다. 대북 제재를 더 강화해 북한이 손을 들게 하려는 것이 미국의 셈법이다. 이상한 축구경기가 벌어진 15일 랜들 슈라이버 미국 국방부 인도·태평양 안보담당 차관보는 “한반도는 ‘특별한 시점(particular juncture)’에 이르렀다”면서 주로 중국을 상대로 대북 제재의 엄격한 이행을 촉구했다. 김 위원장은 삼지연군을 방문한 자리에서 “미국을 위수로 하는 반공화국 적대세력들이 우리 인민 앞에 강요한 고통은 이제 더는 고통이 아니라 그대로 우리 인민의 분노로 변했다”고 말했다고 노동신문이 16일 전했다.
북한은 변하지 않았고 당분간 변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변한 것은 남측이다. 남북관계가 더 이상 문재인 정부의 최우선 순위가 아니라는 합리적인 의심이 든다. 북한의 비핵화도 체제안전 보장도 앞이 안 보이는 상황에서 우리 정부의 고민이 깊어가고 있는 것은 이해가 된다. 하지만 남북관계가 냉·온탕을 오가는 사이 그 피해는 고스란히 남북한 주민들에게 떨어진다. 기괴한 축구는 그 일단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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