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일은 빌어먹을 서막에 불과하다(Past is fucking Prologue).”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40년 지기이자 최고의 선거운동 책사인 로저 스톤(68)의 신조다. 3년 전부터 넷플릭스에서 방영되고 있는 다큐물 <킹메이커 로저 스톤(Get me Roger Stone)>에 나오는 ‘스톤의 법칙들’ 중 하나다. 다음달 3일 미국 대선 결과를 예측하는 것은 신의 영역이다. 주류·비주류 미디어가 대량 생산하는 보도물보다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적 DNA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넷플릭스 다큐물이 더 다가온다. 트럼프는 지난 7월 위증을 비롯한 7가지 혐의로 교도소에서 40개월형을 살아야 했던 그를 전격 석방했다. 공화당 내에서조차 비난이 쏟아졌지만, 스톤을 감형해 석방한 것은 그만큼 트럼프에게 그의 존재가 절실했음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아무리 욕을 먹어도 어차피 ‘빌어먹을 지난 일’이 될 테니까.
각종 여론조사를 보면 민주당 후보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이 트럼프를 앞서고 있다. 당선에 필요한 선거인단은 270명(전체 538명). 월스트리트저널이 소개한 쿡 폴리티컬 리포트·인사이드 일렉션·내탄 곤잘레스 및 래리 사보토의 유리구슬(버지니아대)의 이달 초 공동예측에 따르면 바이든은 222명의 안전(188명) 또는 우세, 트럼프는 125명의 안전(77명) 또는 우세를 보이고 있다. 중간지대 선거인단 191명을 지지 성향으로 보면, 바이든 68명, 트럼프 56명, 초경합 67명이다. 하지만 2016년 대선에서 예측이 보기 좋게 빗나간 탓에 여론조사에 대한 신뢰는 금이 갔다. 트럼프의 역전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민주당 텃밭을 잠식하고, 중간지대 선거인단을 최대한 끌어온다면 무리한 예상은 아니다.
생각하지 못했던 일을 생각해야 하는 ‘트럼프 시대’의 미국 대선을 종래 잣대에 의지해 가늠한다면 허방 짚기 십상이다. 스톤이 정치적 속임수라는 금단의 열매를 처음 맛본 것은 놀랍게도 8세 때인 1960년 대선 정국에서다. 가톨릭 신자인 부모가 존 F 케네디 후보를 지지하고 있음을 알게 된 스톤은 학교 식당에 줄을 선 학생들에게 “(리처드) 닉슨은 토요일 등교를 지지한다더라”라는 가짜뉴스를 퍼뜨린다. 꼬마들을 상대로 한 모의투표에서 케네디가 압도적 우세를 보이자 지역 언론에 소개됐다고 한다. ‘가장 더러운 사기꾼’임을 자인하는, 미래의 선거전략가가 탄생한 순간이다. 가짜뉴스와 언론 활용은 그의 주무기다. 지난 대선에서 스티브 배넌의 브레이트바트 뉴스를 비롯한 비주류 매체들을 변방에서 중심으로 끌어당겼다.
민주당 ‘반트럼프’ 정강, 공화당은 ‘4년 전 그대로’…사라진 공약 경쟁
40여년 전부터 사업가에 불과한 트럼프에게서 대통령의 소질, 정확히 대선 싸움에서 승리할 소질을 발견한 것도 스톤이었다. 트럼프가 개혁당 후보 등록 검토위원회를 조직, 몇 달간 유세활동을 벌였던 2000년 대선 당시부터 선거전략을 총지휘했다. 2016년 트럼프의 대선 당선 뒤 그는 “1988년부터 내가 꿈꿔온 것이다. 트럼프에게는 대통령이 될 만한 그릇(size)과 용기, 배짱이 있다고 늘 생각해왔다”고 말했다. 선거전략가가 아이디어를 준다고 모든 후보가 이를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건 아니다. 스톤이 등 뒤에 초상화 문신을 해넣을 정도로 숭배하는 리처드 닉슨은 ‘침묵하는 다수’란 말을 남겼다. 로널드 레이건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 ‘법과 질서의 후보’라는 구호로 보수 표심을 자극했다. 스톤은 “이전에 다른 사람들이 발견했던 것들을 단지 알려줬을 뿐이다. 그걸 활용해 대통령직을 거머쥔 것은 트럼프”임을 강조한다. 트럼프가 재선 유세에서도 즐겨 동원하는 표현들이다.
선거를 보름여 남기고 이미 상당수 주에서 사전 우편투표가 진행 중인 시점에 스톤을 거론하는 것은 그가 정한 ‘스톤의 법칙들(Stone’s Rules)’이 트럼프 유세를 여전히 지배하고 있다는 의심 때문이다. 트럼프 캠프뿐 아니라 미국 사회도 지배하고 있는 것 같다. “아무것도 인정하지 마라, 죄다 부인하라, 역습하라”는 스톤의 법칙이 유감없이 발휘된 것이 9월29일 1차 대통령 후보 TV토론이었다. 막말과 끼어들기로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했던 토론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이게 미국인가”라고 탄식했다. 하지만 선거판에서건 외교무대에서건, ‘트럼프 시대’가 주는 드문 미덕의 하나는 날것 그대로의 현실을 생생하게 보여준다는 점이다. 그렇다. 바로 그게 미국이다. 지금까지 그럴듯하게 포장돼왔을 뿐이다.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상대방 외모나 생김새를 놓고 비방하는 것은 비열한 짓이다. 권투선수가 벨트 아래를 가격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하지만 작금의 미국 정치문화는 서로 벨트 아래로 선방을 날리고, 상대가 비틀거리는 순간 승기를 잡으려는 사각의 링이 돼버린 지 오래다. 심판은 보이지 않는다. 반트럼프 진영 역시 이에 못지않다. 대놓고 트럼프를 조롱하거나, 원색적으로 맞대응해왔다. 미국 선거 역사상 가장 더럽고 추잡한 선거판이 진행 중이다. 상대 후보를 마구 해치는 정치가 트럼프 시대의 ‘새 표준’이다.
‘상대 후보가 상처받기만 한다면…’ 양쪽 진영 모두 가세한 막말싸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는 물론 주류 언론도 막말싸움에 가세하고 있다. 뉴욕타임스에는 트럼프의 피부색을 빗댄 ‘오렌지맨’과 적은 숱을 가리듯 옆으로 빗어넘긴 헤어스타일이 화제에 오르고, 월스트리트저널엔 코로나19에 감염됐다가 음성 판정을 받은 트럼프가 마스크를 착용할 필요 없다는 강변이 버젓이 실린다.
당연히 공약 경쟁은 사라졌거나, 의미를 잃었다. 공화·민주 양당은 4년마다 대선·총선이 있는 해 여름 전당대회에서 발표하는 정강(Party Platform)으로 국내외 현안에 대한 당 입장을 공개한다. 선거 구호와 정치적 수사에 묻히기 쉬운 당의 우선순위와 정책적 시사점을 준다. 민주당 전국위원회(DNC)는 7월31일 ‘반트럼프’를 골자로 91쪽의 정강을 내놓았다. 첫 번째 공약의 주제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부터 국민과 경제를 보호하겠다”는 것이었다. 공화당은 이례적으로 2016년 정강을 원문 그대로 다시 채택했다. 공화당 전국위(RNC)는 트럼프의 ‘아메리카 퍼스트 어젠다’에 대한 전폭적 지지를 확인하면서, 새 정강은 다음 대선인 2024년에나 내놓겠다고 밝혔다. 트럼프가 재선된다면, 제46대 대통령의 국내외 정책 내용과 방향은 지난 4년과 같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를 두고 “짐이 곧 국가”라는 프랑스 루이 14세의 말에 기대어 트럼프가 절대군주가 됐다는 비아냥(브루킹스연구소)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어차피 복잡한 정책 내용은 뉴욕타임스나 월스트리트저널을 챙겨 읽는 먹물들이나 관심을 둘 사안이다. 트럼프의 콘크리트 지지층인 남부 인종차별주의자들과 중서부 산업 황폐화 지역의 ‘성난 백인 남자들’은 종이 활자 대신 트위터 메시지나 트럼프의 말 한마디에 더 열광한다. 그 점, 무정강은 현실적이다. 저소득·저학력 백인뿐이 아니다. 찰스 코크 코크인더스트리 회장을 비롯한 상당수 월가의 백인 자본가들은 대선을 코앞에 두고 진행 중인 에이미 코니 배럿 연방대법관 후보자의 무난한 상원 인준을 위해 소리 소문 없이 지갑을 풀고 있다.
지지층에게 트럼프의 또 다른 미덕은 멕시코 국경의 장벽 건설,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및 보호무역, 반중국·반이민·반무슬림 정책, 동맹 때리기, 기후변화 무시, 고용 증가 등 약속을 잘 이행해왔다는 점이다. 구체적 수치나 원인은 중요치 않다. 혹 충분히 이행하지 못했다면 트럼프 탓이 아니다. 국가 속 국가(Deep State)로 군림해온 기득권층과 제도권 언론 탓이다. 얼추 국민 두 사람 중 한 명이 스톤의 규칙, 트럼프의 주문에 단단히 홀린 미국의 현주소다.
4년 전 트럼프를 당선시킨 포퓰리즘의 양대 동력인 분노와 증오는 여전히 유효하다. 굳이 스톤의 법칙이 아니더라도 선거판에서 증오는 늘 사랑을 이긴다. 다만 코로나19 대확산 속에 불안감을 느끼는 백인 노년층의 이탈 심리와 지지층 사이에서 승자의 여유 또는 안도 심리가 확산된다면, 트럼프 캠프엔 재앙이 될 수 있다. 트럼프가 이번에도 “미국이 위기에 처했다”며 공포심리를 부추기는 까닭이다.
바이든은 결코 변화의 핵이 아닌 것 같다. 버락 오바마나 힐러리 클린턴과 같은 주류 후보나 버니 샌더스, 엘리자베스 워런 등 비주류 후보들이 몰고다녔던 특유의 바람이 없다. 트럼프와 바이든 사이에서의 선택이라기보다 친·반 트럼프를 가려내는 선거의 성격이 짙어 보인다.
미국은 대선 다음날인 11월4일은 물론, 한 달 뒤인 12월4일에도 대통령 당선자 얼굴을 보지 못할 수 있다. 트럼프는 선거 결과 불복 의사를 노골적으로 공개하고 있다. 스톤은 선거에 패하면 계엄령 발동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행 여부는 중요치 않다. 상대가 당황하기만 하면 그만이다. 공화당 주도 상원은 선거가 연방대법원으로 갈 것에 대비, 배럿 연방대법관 후보자에 대한 인준청문회를 서둘러 진행하고 있다.
그러한 트럼프의 요구에 적당히 귀 기울이면서 평화와 번영을 모색하는 게 동아시아 분단국의 운명이라는 현실이 결코 유쾌할 수는 없다. 하지만 현실은 현실이다. 트럼프의 대외정책 자체가 ‘원칙화된 현실주의’다. 바이든이 당선된다고 해도 경제적·정치적으로 중국을 봉쇄하고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전략적 인내’와 유사한 정책이 나올 가능성이 농후하다. 트럼프가 되건, 바이든이 되건 ‘익숙한 미국’을 보게 될 것이라는 점이 예측 가능한 유일한 미래다.
조지 W 부시 공화당 후보와 앨 고어 민주당 후보가 백중지세를 보였던 2000년 대선은 플로리다주에서 불과 537표 차이로 승패가 갈렸다. 적지 않은 미국 언론은 2000년 11월22일 플로리다주 마이애미-데이드 카운티 선거사무실에서 벌어진 ‘브룩스 브러더스 난동’이 승부를 갈랐다고 분석했다. 일단의 폭력시위대가 사무실에 난입해 직원을 폭행하고 소란을 피우자 개표작업은 결국 법원이 허락한 시한 내 끝내지 못한 채 중단됐다. 당시 폭력시위를 조직, 투입한 장본인이 바로 스톤이었다. 트럼프가 스톤을 사면한, 진짜 이유일지도 모른다. “법의 경계를 넘지 않는 선에서 나의 후보를 당선시키는 데 필요한 모든 일을 할 것이다.” 스톤이 석방된 뒤 일성으로 내놓은 자신의 규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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