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트럼프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행보는 단 한 번도 어긋난 적이 없다.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것도 럭비공의 형태와 운동 방향을 모를 때나 놀랄 일이다. 트럼프는 더 이상 예측 불가능하지 않다. 세계는 또다시 트럼프를 오독했다. “아무리 트럼프라도 이번에는 다를 것”이라는 기대가 또다시 무너졌기 때문이다. 조 바이든 민주당 대선후보가 승리만 하면 미국 민주주의가 기사회생할 것이라는 믿음이 기성 정치, 제도언론이 갖고 있던 희망 섞인 확증편향이었음을 입증한다.
대선 불복은 기실 ‘트럼프의, 트럼프에 의한, 트럼프를 위한’ 결정이다. 20년 전 플로리다주 민주당 지지성향 카운티의 재검표 중단에도 앨 고어 민주당 후보가 깨끗하게 패배를 인정하면서 “이게 미국이다(This is America)”라고 선언했던 멋진 나라는 지도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한 번 속으면 네 탓이지만, 두 번 속으면 내 탓임을 인정해야 한다. 시간이 갈수록 무대 위 조명은 바이든을 비추겠지만, 대선 이후 제46대 미국 대통령이 취임하기까지 70여일의 더블 캐스팅 주인공 또는 ‘주연 같은 조연’은 트럼프일지도 모른다.
트럼프가 ‘트럼프답게’ 행동할 여지는 우선 선거 결과에 있다. 바이든은 결코 선거판을 지배하지 못했다. 전통적으로 민주당 지지성향의 주였지만,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를 선택했던 펜실베이니아·위스콘신·미시간 등 이른바 ‘파란 장벽(Blue Wall)’주에서 바이든은 모두 앞섰다. 4년 전 힐러리 클린턴처럼 플로리다에서 헛된 발품을 파느니, 실지 회복에 유세를 집중하겠다는 전략의 성공이기도 하다. 하지만 2.7%포인트 차(50.6% 대 47.9%, 개표율 99%)를 기록한 미시간을 제외하곤 근소한 차이다. 폭스뉴스에 따르면 11일 현재 위스콘신(0.7%포인트)과 펜실베이니아(0.8%포인트)는 99% 개표 결과 격차를 넓히고 있다. 하지만 애리조나와 조지아에서는 0.3%포인트(개표율 99%)로 앞서고 있다.
아무리 차이가 적어도 결과에 승복하는 게 통상적이지만, 트럼프는 결코 통상적인 후보가 아니다. “억울하다”고 동정심을 유발하는 대신, “불법선거”라며 되받아친다. 그리곤 생뚱맞게 화를 낸다. 바이든이 사실상 정권인수에 나선 지난 주말 내내 버지니아 트럼프내셔널골프클럽에서 공놀이를 했다. 9일, 지난여름부터 눈엣가시였던 마크 에스퍼 국방장관을 해임했다. 트럼프가 내년 1월 정권 이양 전에 손볼 대상으로는 크리스토퍼 레이 연방수사국(FBI) 국장과 지나 헤스펠 중앙정보국(CIA) 국장도 꼽힌다. 기성 권력을 상징하는 ‘정부 내 정부(Deep State)’가 임기 내내 발목을 잡았다는 게 트럼프의 주장이다.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이들을 공격할수록 지지층이 환호하는 현실이 중요하다. 화이자가 개발한 코로나19 백신의 승인 사실을 늦게 공표했다면서 식품의약국(FDA)에도 트위터 총격을 퍼부었다. 대선 이후 트럼프의 존재는 바이든의 안정적인 정권인수 못지않게 궁금한 미래다.
바이든의 승리연설에도 공식 개표는 아직 종료되지 않았다. 가장 큰 관심은 재검표에 쏠린다. 주 개표가 완료된 뒤 재검표 돌입 가능성이 높은 주들은 위스콘신과 조지아, 네바다이다. 위스콘신은 99% 개표율에 표차가 0.7%포인트이다. 1%포인트를 넘어서지 않으면, 한쪽 후보의 요청으로 재검표가 가능하다. 조지아는 0.3%포인트(개표율 99%)에 머물러 재검표가 불가피하다. 재검표 기준(0.5%포인트 이하) 안에 있기 때문이다. 애리조나는 표차가 0.1%포인트 이상이면 재검표를 불허하며, 펜실베이니아는 재검표 기준(0.5%포인트)을 벗어났다.
네바다는 표차와 상관없이 재검표 요구가 가능하다. 위스콘신·조지아·네바다의 선거인단을 모두 합하면 32명으로, 트럼프가 확보한 선거인단 232명(알래스카 3명과 노스 캐롤라이나 15명 포함)에 더해도 승패는 바뀌지 않는다. 바이든은 290명이다. 플로리다주에서 조지 W 부시 공화당 후보와 앨 고어 민주당 후보의 최종 표차가 537표(0.009%)에 불과했다. 그나마 연방대법원 결정으로 재검표가 중단된 결과다.
하지만 악마는 늘 복잡한 디테일에 똬리를 튼다. 카운티·주 법원, 주정부, 연방대법원의 개입이 각각 변수로 작용한다. 트럼프의 전략은 “각 주정부의 선거결과 공표를 저지하는 데 있다(월스트리트 저널)”. 재검표 말고도 우편투표 소인 인정, 참관인의 불충분한 현장접근, 투표용 필기도구의 불량 등 법적 시빗거리는 많다. 트럼프와 공화당이 소송을 걸겠다고 밝혔거나 이미 소송이 진행 중인 사안은 10여건이다. 네바다·펜실베이니아·미시간·조지아 등 바이든이 앞섰거나 승리한 4개주에 집중된다.
일부 주의 재검표와 각종 송사, 여기에 지지층의 거친 시위가 이어지면, 최종 결과가 나올 때까지 대선 불복 후폭풍은 지속된다. 그렇지 않아도 대선 이후 코로나 19 확진자가 계속 늘어나 뒤숭숭한 상태다. 트럼프는 골프만 치고 다녀도 충분히 소란스러운 잡음을 낼 수 있는 것이다. 먼지가 가라앉고 나면, 지지자들에겐 트럼프가 스스로를 기성 엘리트 제도의 횡포에 희생당했다는 '신기루'가 기정사실이 될 게 분명하다. 그가 백악관을 떠나도 제도권 밖에서 가슴을 탕탕 치며 괴성을 지르는 ‘우두머리 오랑우탄’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정치적 자산인 동시에 제도권을 공격할 빌미가 된다. 바로, 트럼프의 노림수다.
공화당과 민주당, 보수 우파와 리버럴, 월스트리트(금융산업 및 거대기업)와 메인스트리트(전통산업 및 중소기업), 일자리, 총기 소지 찬·반, 낙태 및 피임의 문화 논쟁, 증세와 감세, 공공 건강보험 확대 또는 트럼프가 3년 전 폐지한 지불가능한 건강보험법(ACA·오바마케어) 부활 등은 늘 존재하는 미국 대선의 쟁점들이다. 이번 선거만의 특징으로 예상된 이슈는 코로나19 대확산과 인종 갈등 및 젠더(性) 문제였다. 결과는 미국 밖에선 의외이지만, 미국 안에선 상식에 가깝다. 민주당 지지표는 코로나19 대확산을, 공화당 지지표는 경제활동 재개를 중시했다. 에디슨리서치의 출구조사 결과 두 가지 이슈 중에선 경제와 일자리가 주목을 받았다. 응답자 10명 중 3명은 경제를, 10명 중 2명은 코로나19를 최대 이슈로 꼽았다.
인구 100만명당 코로나19 감염자가 500명이 넘어 바이러스 확산이 가장 심각한 11개주 가운데 바이든이 우세한 주는 위스콘신과 일리노이 등 2곳에 그쳤다. 몬태나·노스다코타·사우스다코타·아이다호·와이오밍·유타·네브래스카·캔자스·알래스카 등 9개 주는 트럼프를 택했다. 이들 주가 전통적으로 공화당 지지성향인 레드주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지는 않다고 볼 수도 있다. 트럼프 투표자의 78%는 바이러스 위험이 있더라도 경제활동 정상화를, 바이든 투표자의 79%는 경제 타격에도 코로나19 차단을 각각 선택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건강보험 개혁이 “개인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이유로 오히려 백인 저소득층에서 강한 반대에 직면했던 것을 상기해보면 지극히 미국적 현상이다. 하루 최대 확진자가 20만명이 넘고, 사망자가 23만여명에 달했음에도 보건의료는 철저히 사적 영역에 속한다는 ‘미국적 상식’을 드러낸 것이다.
젠더 문제는 이번 대선의 승부를 가를 최대 변수로 예상됐다. 그렇지 않아도 지난 대선 국면에 공개된 트럼프의 저속한 여성폄하 발언으로 여성들의 반트럼프 지수가 높아진 지 오래다. 트럼프 취임식 다음날 벌어진 ‘2017 여성 행진(Women’s March)’에는 미국 내에서 최대 520만명이 참가했다. 같은 해 10월 할리우드에서 터져나온 미투(#MeToo) 운동은 미국 사회를 혁명적으로 흔들어놓았다. 선거 전 각종 여론조사에서 특히 도심 교외지역에 거주하는 여성들이 트럼프를 심판할 가장 강력한 유권자층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에디슨리서치 조사 결과 백인 여성의 55%는 트럼프를 찍었다고 답했다. 2016년 대선의 52%보다 되레 늘었다. 백인 남성은 58%였다. 트럼프를 찍은 흑인 여성표 역시 2016년 대선의 4%에서 8%로 갑절이 늘었다. 흑인 남성표는 13%에서 18%로 각각 늘었다. 중남미계 라티노 여성의 28%와 남성 36%도 트럼프를 택했다. 이 역시 멕시코 장벽과 가족간의 생이별을 낳았던 트럼프의 우악스러운 반 이민 정책에도 지난 대선보다 늘어난 수치다. 젠더에 따른 민주당 후보 지지 비중은 1980년 이후 평균을 벗어나지 않았다. “대선에선 정치가 젠더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라는 설명(워싱턴포스트)으론 납득이 되지 않는 결과다. 흑인 유권자들의 트럼프 지지 증가는 지난 6월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과 이후 미국사회를 달군 ‘흑인의 목숨도 소중하다’ 시위 사태를 무색하게 하는 결과다. 성적 소수자(LGBT) 유권자들의 트럼프 지지가 28%로 4년 전에 비해 두배 많아진 것 역시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트럼프가 후안무치하게 보여준 여성혐오와 반유색인종, 반LGBT 정서에도 불구하고 수컷다움을 숭상하는 ‘백인 부족장주의(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찰스 블로)’는 여전히, 미국 사회를 특정 짓는다.
지난 세기 마오쩌둥의 공산주의 유격대만 물과 물고기의 관계처럼 서식지가 필요한 게 아니다. 포퓰리즘도 마찬가지다. 2009년 건강보험 개혁과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확장돼온 포퓰리즘의 영역은 바이든의 승리에도 미국의 절반에서 건재함이 드러났다. 2016년 대선을 지배한 반세계화·반이민·반자유무역이 이번 선거엔 이슈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코로나19에 가렸을 뿐이다. ‘3반(反)’에 백인 우월주의 및 남성 우월주의가 애국주의라는 이름으로 덧씌워진 포퓰리즘의 토양은 비옥하다. 민주당이 토양을 뒤엎지 않는 한, 미국사에서 ‘트럼프 4년’이 해프닝이 아니라, ‘바이든 4년’이 예외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코로나19 덕을 톡톡히 본 바이든은 근본적인 변화 대신, ‘더 나은 트럼프 이전’으로의 복귀만을 약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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