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자동차 세일즈 매니저로 일했던 거래점의 사장은 직원이나 고객에게 1달러 동전을 나눠주는 걸 즐겼다. (1950년대 미국에서 1달러는 적은 돈이 아니었다.) 사건은 일터에서 열린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일어났다. 사장은 바닥에 동전을 흩뿌려놓고, 직원들이 이를 줍는 광경을 보고 즐거워했다. 아버지는 그 직장을 떠났다.”
조지프 로비넷 바이든 주니어(조 바이든·77)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가 자서전에서 소개한 아버지의 일화다. 아버지가 깊은 인상을 남겼는지, 이번 대선 과정에서도 아버지의 기억을 주변 사람들에게 자주 이야기한다고 한다. 바이든은 “일하는 사람에게 봉급이 전부는 아니다. 존엄과 존중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부통령으로 취임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초래한 월스트리트의 ‘살찐 고양이’들을 감옥에라도 보내고 싶다고 통탄했던 것과 맥락이 이어진다. 그의 말에는 노동자 중심의 세계관이 묻어난다.
‘노동자 코스프레’는 선거판에서 잘 먹히기도 한다. “미국 경제의 힘을 포천지 500대 기업의 이익이 아닌, 팁으로 먹고사는 웨이트리스가 해고 걱정 없이 아픈 아이를 돌보기 위해 휴가를 낼 수 있는지로 계량하겠다”는 오바마의 대선후보 수락연설처럼 서민들의 마음에 다가간다. 바이든의 다짐은 민주당이 지난 7월 발표한 정강에 여실히 반영돼 있다. ‘코로나19 대확산으로부터 미국민을 보호하겠다’는 약속을 앞세웠지만, 주요 공약은 ‘더 강하고 공정한 경제 만들기’였다. 노동자와 일하는 가정 보호 및 ‘그린 뉴딜’을 통한 수백만개의 일자리 창출이 핵심이다. 임금 인상 및 노동자 권리 증진, 탄탄한 일-가정 양립, 강력한 ‘일하는 가정 정책’ 등 보통사람들의 삶을 부축하겠다고 약속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반자유무역협정(FTA) 입장과는 결이 다르지만, 미국 노동자를 위해 더 공정한 무역질서를 구축하겠다고도 약속했다.
미국 정당의 정강은 조변석개하지 않는다. 4년 전 힐러리 클린턴 후보를 선택했던 민주당 정강 역시 ‘중산층을 위한 임금 인상 및 경제 안정 복원’이 최우선 공약이었다. 기록적인 기업 이익의 많은 부분을 노동자에게 돌아가도록 하겠다고 공언했다. 이는 오바마를 후보로 지명한 2008년 전당대회 정강이, 그 4년 전 낙선한 존 케리 후보 당시 정강의 유사품인 것과 마찬가지다. 일하는 가정의 부양과 보건의료 개혁, 인권 개선, 미국의 글로벌 리더십 강화 등 비슷한 목록이다. 선거에선 정강이라는 상품도 중요하지만 후보, 즉 세일즈맨의 전달력이 더 중요하다. 대통령 중심제 국가에선 더욱 그렇다. 오바마는 케리와 비슷한 상품을 들었지만, 독특한 가족 배경과 감성적 접근으로 사상 첫 흑인 대통령의 역사를 썼다. 그렇다면 클린턴이 세일즈에 실패한 지점에서 바이든은 성공할 수 있을까. 이번 선거가 바이든과 트럼프 대통령 중 선택이라기보다 친·반 트럼프의 싸움이라고 가정한다면, 바이든의 정치적 DNA를 정독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성싶다.
2016년 민주당 정강에서 노동자 또는 ‘일하는 가정’의 부축에 우선순위를 둔 것은 다분히 민주당 내 비주류이자 좌파 격인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후보 경선과정에서 일으켰던 돌풍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올해는 샌더스에 더해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의 바람몰이 역시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학생 운동권’ 출신의 날카롭고 비범한 이미지의 클린턴과 노동자 친화적인 소탈한 이미지를 보여준 바이든의 성향은 확연히 다르다. 시대적 상황도 다르다.
코로나19의 대유행은 기왕의 양극화를 극단의 상황으로 내몰았다. 바이러스가 급속히 확산됐던 지난 3월부터 10월 중순까지 미국 억만장자들의 재산은 얼추 3분의 1(9310억달러)이 늘었다. 22만5000여명이 숨지고, 수천만명이 실업자가 되는 사이 부자들의 곡간은 더욱 불어난 것이다. “세계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경제를 건설했다. 내년엔 더 위대할 것이다”라는 트럼프의 장광설은 그다운 거짓말일 뿐이다. 진보성향 매체인 더 네이션의 편집장 출신인 카트리나 밴더 허벨이 최근 워싱턴포스트 칼럼에서 소개한 수치다.
지역마다 경제활동을 봉쇄했던 시기, 온라인 판매와 제약산업, 원격의료, 비디오 콘퍼런스 산업은 번성했다. 화이트칼라 직업은 정상화되고 있으며, 주식시장은 다시 꿈틀대고 있다. 반대편의 상황은 말이 아니다. 10월 현재 2300만명이 실업급여를 받고 있고, 8월 말까지 1200만명이 기업주 부담 의료보험을 잃었으며, 9만8000여개의 소규모 사업장이 문을 닫았다. 허벨이 “진정한 (경제) 회복은 강한 타격을 입은 노동자들을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고 역설한 까닭이다. 바이든과 민주당은 코로나19 이전으로의 단순한 회복이 아니라 더 나은 복원을 약속하고 있다.
올해 민주당 정강은 서문에서 ‘국가의 영혼’을 수선하겠다고 다짐했다. 최상의 부유층과 최대 기업들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가정과 소규모 기업들을 내팽개친 트럼프 시대를 종식시키겠다고 약속했다. 수백만개의 일자리 창출, 번영의 공유, 인종에 따른 소득 격차 해소, 노동조합권 존중, 노동자 임금 인상 등을 통해 ‘새로운 사회적·경제적 계약’을 미국민과 맺겠다고 강조했다. 대선후보가 누구라도 민주당이 내놓을 만한 약속들이다. 바이든은 여기에 자신의 지문을 묻히고 있다.
후보 경선에서 겨뤘던 샌더스 상원의원과 보건의료, 사법적 정의, 기후 변화, 경제, 교육 및 이민정책별로 6개의 공동위원회를 만들었다. 지난 7월 초 바이든-샌더스 태스크포스가 내놓은 첫 보고서는 샌더스가 대표한 당내 진보진영과 바이든의 중도진영 간 타협의 산물이었다. 정부 주도 의료보험을 확대하되, 샌더스가 주장했던 전 국민 의료보험에는 못 미쳤다. 오바마 행정부 당시 교육정책과 트럼프 이민정책의 철폐 등에 합의했다. 민주당 진보진영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지만, 정책적 교두보를 설치했다는 데 만족하는 분위기다. 이 정도 변화도 새로운 것이었는지, “바이든이 (글로벌 공급망의 재건 시도 등을 통해) 신자유주의를 매장할 준비를 하고 있다”(제임스 트라우브, 포린폴리시)라는 자극적인 헤드라인이 나온다. 오바마는 지원 유세에서 바이든의 공약에 대해 “역사상 어떤 주요 정당 대선 후보보다 진보적”이라고 치켜세웠다.
미국 민주당이 어려울 때마다 되돌아보는 마음의 고향은 프랭클린 델라노 루스벨트(FDR) 시대의 뉴딜이다. 오바마를 두고 ‘검은 루스벨트’라며 기대를 드러냈던 이유다. 바이든 역시 선거를 불과 1주일 앞두고 루스벨트를 소환했다. 각종 여론조사 결과 승리가 예견돼서인지, 트럼프가 박빙의 판세를 보이는 경합주를 오가는 동안 바이든은 투표를 닷새 앞둔 지난 27일 공화당 텃밭으로 남행을 했다. 루스벨트가 요양차 자주 들렀던 조지아주 웜스프링스의 ‘작은 백악관’으로 달려가 루스벨트의 향수를 한껏 상기시켰다.
바이든은 FDR이 사망한 장소이기도 한 작은 백악관 앞 유세에서 꺼진 뉴딜의 불길을 상징적으로 되살렸다. “FDR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시카고의 한 언론인은 동료를 향해 ‘모든 걸 치우고 움직이자’고 말했다. 오늘 여러분 앞에서 말하건대, 여러분의 대통령으로 봉사할 영광스러운 기회를 준다면 모든 것을 치우고 행동에 나서겠다”고 약속했다. “몇 주 전 국가의 통합을 강조하기 위해 게티즈버그를 찾아갔듯이, 오늘은 어떻게 우리 나라를 치유할 것인지를 말하기 위해 이곳, 웜스프링스에 왔다”고 강조했다. 이어진 공약은 민주당 정강에 나온 목록의 반복이었다.
“루스벨트는 말만 번지르르한 여느 정치인과 다름이 없었지만, 세계 대전이라는 위기에서 위대한 대통령으로 거듭났다. 바이든 역시 (무색무취한) 중도 성향(moderate) 민주당원이다. 하지만 미국을 뒤덮고 있는 건강·경제·인종의 3중 위기 속에서 가장 담대하고 야심찬 어젠다를 들고나왔다. 그가 역사상 가장 진보적인 대선후보가 된 까닭이다.” 진보적 언론인 데이나 밀뱅크가 워싱턴포스트 칼럼에서 내놓은 희망 섞인 평가다. 트럼프 행정부 4년 동안 미국은 극심하게 양분돼왔다. 선거를 앞둔 지금은 더 그렇다. 서로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고, 상대 목소리에 귀를 닫는 확증편향 현상이 뚜렷하다. 바이든에게 쏟아지는 한쪽 진영의 숱한 기대와 찬사에만 귀 기울이고 결과를 예상하기가 불안한 이유다.
바이든이 거침없이 발산하고 있는 수많은 메시지들 역시 말만 듣고 반기기에는 많은 학습효과가 있다. 오바마가 ‘검은 루스벨트’ 근처에도 가지 못했듯이 바이든이 제2의 루스벨트가 될지는 낙관하기 어렵다. 그가 꿈꾸는 미국에 노동의 가치가 다소 자리를 넓힐지 모르지만, 그 역시 미국 특유의 자본 논리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지는 미지수다. 트럼프 시대에도 미국 정치에는 상도의가 살아 있다. 밀어준 만큼 보상하는, 후원자와 후보자 간의 공정거래가 작동한다. 반응 정치센터(CRP)가 최근 내놓은 자료에 따르면 바이든은 지난해부터 이달 중순까지 월가 금융산업 종사자들로부터 7400만달러의 후원금을 받았다.
지난 대선 클린턴의 후원금(8700만달러)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오바마와 트럼프가 거둬들인 금액을 훨씬 초과한다. 4년 전 취임 축하금을 포함해 2000만달러를 월가에서 받았던 트럼프는 이번 대선에서 1800여만달러를 받았다. 바이든이 받은 정치후원금에는 그가 “감옥에 보내고 싶다”고 했던 월가 자본가들이 포함됐다. 소액 후원금만으로 충분히 경선을 치러냈던 샌더스나 워런과 다른 점이다.
바이든의 아버지 일화에 대해선 다른 말도 있다. 그의 여동생은 마리클레르 인터뷰에서 아버지가 중고차 매니저를 그만둔 건 바이든이 상원의원에 당선된 뒤 “상원의원의 아버지가 중고차 세일즈를 해선 안 된다”는 생각에서였다고 전했다. 자서전, 특히 정치인의 자서전은 윤색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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