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산전투 현장에 가다...(경향신문 김진호기자)/뉴스메이커
[월드뉴스] 그들에게서 우리의 미래를 본다
-르포/베트남 DMZ 케산전투 현장, 그 시절과 현재, 그리고 미래-
“전쟁 전에는 소수민족들이 화전을 일구며 사냥과 낚시 등으로 살 아가던 평화로운 밀림이었죠.
호랑이가 자주 출몰해 곧잘 인명피해가 있었고 코끼리도 살았어요.”
지난 3월 18일 베트남 중부 북위 17도선 이남의 광트리성. 성도 동하 에서 출발한 7인승 승합차가 9번 국도를 따라 서쪽으로 10여㎞를 달 렸다. DMZ 가이드 토(42)는 차창 밖 풍경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9번 국도 주변은 이 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을 간파한 미국이 1966년 말부터 10억달러를 들여 사수하려 했던 최전선이었다. 베트남 전쟁의 최대 격전지였으며, 단일 전선으로 2차대전 이후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역사의 현장이다. 북으로부터의 침투를 막기위해 전기가 통하는 장벽이었던 ‘맥나마라 장벽’(McNamara’s Wall)을 구축하고 네이팜탄과 화학무기 등으로 정글을 파괴해 시야 를확보하는데 엄청난 달러가 소요됐다.
그렇게 울창했다는 밀림은 간 데 없고, 텅빈 들판엔 인공식수의 흔적이 뚜렷한 2~6년생 고무나무들 사이로 평지에 느닷없이 서 있다는 인상을 주는 작은 봉우리들이 눈에 들어왔다. 토는 남부 사이공과 메콩 델타에서 민족해방전선 전사(베트콩)들이 벌였던 전투는 맥나마라 라인에서 벌어졌던 격전에 비하면 아이들 장난이었다고 전한다.
“미군은 히로시마에 투하했던 원자폭탄의 7배의 위력에 해당하는 폭탄을 이곳에 퍼부었죠.
그들이 물러가고 남은 것은 정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고등학교 역사교사 출신답게 토는 연도와 숫자를 열심히 주워섬기며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려고 애를 썼다.
베트남전이 끝난 지 26년.
이제는 전쟁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졌을 것 같은 베트남 DMZ(비무장지대)의 케산전투 현장을 찾았다.
베트남을 다녀온 사람들은 흔히 지난 60, 70년대 한국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고 소감을 말한다.
아마도 1달러 한장이면 국물이 얼큰한 쌀국수를 실컷 먹을 수 있는 낮은 물가와
호치민시 변두리만 나가도 여전히 낙후한 농촌의 모습을 보면서 예전의 한국을 회상하는 듯하다.
여인네 옆구리가 보일듯 말듯 시선을 잡아끄는 아오자이(긴옷) 물결에서
1970년대 유행가에 남아 있는 월남전의 향수를 느낄 법도 하다.
하지만 베트남이 우리의 과거만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그들의 DMZ 풍경에는 우리의 미래가 담겨있다.
총성이 멎은지 반세기가 다 되어가지만 여전히 남북이 대치하는 한반도의 DMZ와 달리,
베트남의 과거 DMZ 지역은 관광코스로 개발돼 있다.
한국의 DMZ가 선조들의 손길이 곳곳에 배인 산야를 자연으로 돌려놓았다면 베트남 전은 DMZ의 천혜의 밀림을 평범한 평야로 바꾸었다.
잠시 차를 멈춘 소수민족 바루족의 마을에도 전쟁의 흔적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4∼5m 길이에 직경이 70㎝는 족히 됨직한 포탄 탄피가 허드렛짐을 넣어두는 보관함으로 쓰이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삶터로 되돌아온 바루족의 마을. 조용한 산골마을에 느닷없이 찾아온 낯선 이방인에게
비록 돈을 달라고 손을 내밀지만 바루족 아이들의 표정은 천진난만했다.
웨스트모어랜드 당시 주월 미군 사령관은 이 지역 소수민족 청년들을 훈련시켜 진지의 보조병력으로
사용할 생각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전선의 향방이 불투명해지면서 많은 소수민족은 자진해서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의 길라잡이로 나섰다.
밀림의 개조자들은 ‘귀신잡는 해병’의 원조격인 미 해병대 병사들 이었다.
‘한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이다’(Once marine, forever marine)라는 말을 태평양 건너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퍼뜨렸던 그들은 17도선 남쪽 22㎞ 지점의 동하로 몰려들었다.
당시 주월 미 해병 사령부가 있던 동하에는 베트남인보다 해병이 더 많이 눈에 띄어서
동하 사령부에서 관장하던 9번 국도 주변을 ‘해병거리(Marine Square)’로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동하에서 서쪽으로 65㎞ 떨어진 케산은 미 해병의 자존심을 형편없이 구기면서
미군이 종전 전에 17 도선 이남에서 포기한 전략적 요충이기도 하다.
케산이 가까워지면서 주변은 키가 작은 아라비아 커피나무가 들어선 플랜테이션과 후추농장의 한가로운 풍경으로 채워졌다.
라오스 접경 지역으로 연결된 도로 한가운데는 고속도로 톨게이트 같은 신축 구조물이 들어서 있었다.
아직 페인트 냄새가 나는듯한 건물은 라오스 방면에서 유입되는 마약을 단속하기 위해 만든 검문소이다.
이곳을 지나 300m를 올라가면 라오스의 사바나켓과 케산으로 가는길이 갈라지는 삼거리가 나온다.
현지어로 ‘살아 있는 시내’(Living Stream)라는 뜻의 케산은 해발 600m의 높이에 불과하지만
밀림 한가운데 솟아 높은 전략적인 가치를 갖고 있었다.
쾅트리성의 평원지대를 한눈에 볼 수 있을뿐 아니라, 라오스 영토를 에돌아 건설된 호치민루트를 봉쇄할 수 있는 위치였기 때문이다.
남베트남에서 활약하던 베트콩들에게 무기와 식량을 공급했던 호치민루트는 케산 일대의 밀림을 지나
라오스와 캄보디아 를 거쳐 인도차이나 반도의 남단인 메콩 델타 지역까지 연결됐다.
케산 정상에 주둔했던 미군과 북베트남군 간에 처음 전투가 벌어진 것은 1967년 4월.
주변 고지에서 화력을 집중시킨 미군의 승리였다.
그러나 67년 말부터 미군 정보 당국은 박격포와 로켓 등으로 무장하고 케산 주변으로 이동하는
북베트남 정규군의 끊임없는 행렬을 발견했다.
1968년 1월 21일부터 시작된 북베트남군의 케산 포위는 무려 75일간 계속되면서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프랑스군이 장기 포위 끝에 굴복 했던 ‘디엔 비엔 푸 전투’의 악몽을 떠올린 존슨 대통령은
백악관 상황실에 6,000명의 미 해병이 꼼짝없이 갇힌 케산의 모형을 갖다놓고 매일 전황을 체크했으며,
시사주간 <타임>와 <뉴스위크> 지가 모두 커버스토리로 케산전투를 다뤘다.
5,000여 대의 비행기와 헬기를 동원한 미군은 고작 200㎡에 불과한 케산 정상의 평지주변에 무려 10만톤의 폭탄을 투하했다.
웨스트 모어랜드 장군은 한때 원자폭탄 사용까지 심각하게 고려했다고 전해진다.
결과는 미 해병 500여명과 북베트남군 1만여 명과 엄청난 민간인의 희생뒤에 미군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북베트남의 공격은 계속됐다.
웨스트 모어랜드의 임기가 끝난 7월 미군은 결국 케산기지를 초토화시키고 황급히 철수했다.
미군의 입장에서 전쟁은 여기에서부터 어긋났다.
미군은 전투에서는 지지 않았지만, 전쟁에서는 이기지 못했다.
미군이 떠나자마자 북베트남군은 호치민루트를 닦아 적지의 베트콩들에게 생명선을 이었기 때문이다.
전선이 없는 이상한 전쟁은 이곳에서 비롯됐다.
미군이 철수하면서 석기시대로 만들었다는 정상에는 현재 조그마한 전적비와 구멍가게만한 기념관만이 횡뎅그레 놓여 있다.
결코 여정이 편하지 않은 케산전투 현장을 찾는 외국인들 중에는 이곳에서 살아 남은 미국의 재향군인이 많다고
가이드 토는 전한다. 괭이를 든 현지인 아주머니 7, 8명이 땅을 파고 있었다.
아직도 나온다는 탄피를 비롯한 각종 ‘미제 쇠붙이’들은 그들에게 짭짤한 부수입을 안겨주고 있다.
케산 입구의 시골 도로에서는 확장공사가 한창이었다.
베트남과 라오스, 캄보디아 등 인도차이나 국가들을 중국과 연결시켜,
경의선이 복원되면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함께 명실공히 아시아의 대동맥이 될 도로는
호치민루트를 따라 건설되고 있었다. 1975년 전쟁이 끝난 베트남 DMZ에는 아직도 지뢰제거 작업이 계속되고 있었다.
토는 “외국 군대는 싫지만, 외국 관광객은 언제든지 환영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덜컹거리는 승합차에 실려 구엔왕조의 고도였던 후에까지 꼬박 70여㎞를 되돌아왔다.
〈광트리(베트남)/국제부 ·김진호기자 jh@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