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11213000068 |
|
정치 |
|
러시아제 라다 승용차에 손자 넬슨을 태우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헤로니모 선생 |
게재정보
|
2001/12/13 (목) 45판 / 23면 | ||
분류
|
이민/교포 | ||
제목
|
<역사속의 마지막 韓人>아바나의 택시운전사 헤로니모 | ||
본문
|
|||
<역사속의 마지막 韓人>아바나의 택시운전사 헤로니모 쿠바현대사와 함께한 '한인 혁명영웅' 쿠바 이민 2세 헤로니모 임 김 선생(75·임은조)이 좋아하는 노래는 가수 노사연의 `만남'이다. 1982년산 러시아제 라다 승용차를 몰고 아바나 시내를 누비면서 즐겨 흥얼거린다. 그가 우리말로 알고 있는 한국 노래는 7곡. 그 역시 한국인이기에 아리랑의 리듬이 낯설리 없건만, 노랫말의 의미가 곱씹히는지 낡은 카 카세트플레이어에서 만남만 나오면 열심히 따라부른다. 일흔이 넘은 나이지만 쿠바에서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현 직업은 택시운전사. 물론 온종일 운전대를 잡기에는 힘이 부친다. 부인 크리스티나(73)가 집 한칸을 헐어 운영하는 간이음식점(카페테리아) 일을 도우면서 가끔 차를 몰고 나가는 정도다. 폐차 시기를 이미 넘긴 낡은 자동차지만, 라다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그가 예사로운 신분이 아니라는 점을 말해준다. 쿠바에서는 장관급의 특별허가가 있어야만 승용차를 소유할 수 있고, 정부에 매달 35달러의 세금을 낼 경우 파르티쿨라르(민간) 택시영업을 할 수 있다. 에네켄 농장에다 평생을 묻은 부친(임천택.작고)의 조국이 한국이었다면, 그에게는 조국이 2개 있다. 부친의 조국과 그의 조국. 피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과 아바나 법대 동창생인 그는 진검승부하듯 쿠바 현대사를 살아낸 행동하는 지식인이다. #혁명의 시대 마탄사스 외곽 엘 볼로 에네켄 농장의 한인촌에서 태어난 그는 대학에 입학하면서 사회문제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차이나타운 등에서 고학을 하며 힘겹게 학업을 이어가던 그는 운동권 학생이 됐다. 헤라르도 마차도와 연이은 풀헨시오 바티스타 독재정권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가정형편으로 5년제 법대 졸업을 1년 앞둔 49년 학업을 접고, 진보정당 오르토독소(Ortodoxo)당에 가입, 이후 10년 동안 직업혁명가로 반정부 투쟁에 몸을 던졌다. 역시 오르토독소 당원으로 정치에 입문한 카스트로가 우여곡절 끝에 쿠바 동부 산악지역에서 활동하던 시절 그는 마탄사스 지역에서 점조직으로 운영된 도시 게릴라로 싸웠다. 46년인가, 47년인가 주민들과 함께 마탄사스 시청을 3일간 점령했다. 진압경찰이 전기를 끊어버려 선풍기를 돌리지 못한 건물 안은 생지옥이었다. 이로 인해 2개월간 옥고를 치렀지만 선생은 "올바른 일이었고, 해야 할 일이었다"고 회상했다. 에네켄 농장에서 품을 팔면서 어렵사리 맏아들을 교육시킨 부친에게는 늘 죄송했다. 아버지는 아들이 무언가 일을 꾸미고 있다는 낌새를 차렸지만 피델의 혁명이 성공할 때까지 끝내 소상한 이야기를 숨겼다. #그의 조국, 아버지의 조국 혁명 직후 아바나 경찰청에서 1년을 복무한 뒤 공기업을 거쳐 63년부터 3년간 산업부의 조직.인사담당 에스페시알리스타(스페셜리스트)로 일했다. 체 게바라를 만난 곳도 산업부였다. 당시 산업부 장관을 지내고 있던 체를 가까이 대하면서 평생 잊을 수 없는 '위대한 인간'의 풍모를 접했다. 체가 또다른 혁명을 위해 쿠바를 떠난 뒤 산업부는 5개 부서로 분리됐고, 헤로니모 선생은 식량산업부에 소속됐다. 식량구매국장을 끝으로 30년 가까운 공직생활을 마치고 88년 퇴직했다. 92년부터 3년간은 자신이 살고있는 아바나 디테라스시의 민선시장으로 뽑혀 이웃을 위해 봉사했다. 그 자신이 혁명영웅이자 공산당원이건만 현실비판에는 거침이 없다. 선생은 쿠바사회를 '젊은이들에게 기회를 주지 못하는 나라' '경쟁도 자극도 없는 비효율적인 사회'로 규정한다. #남과 북 늘 아버지의 조국을 가슴 속에 안고 살았다. 선생은 운좋게도 남한과 북한을 모두 방문했다. 67년 북한정부 초청으로 평양과 원산 등을 둘러봤다. 특히 금강산의 아찔한 아름다움은 그의 가슴 속에 추억의 사진으로 남아있다. 95년에는 쿠바 한인대표 자격으로 서울에서 열린 광복 50돌 한민족축전에 참가했다. 단 한번도 조국을 2개로 생각한 적이 없건만 분단은 멀리 쿠바 한인들에게도 생채기를 주고 있다. 쿠바 전국을 다니며 한인 후예 700여명의 출생증명서를 챙겨서 교민회 설립 신청을 했다. 그러나 북한과 수교국인 쿠바 정부는 지난해 "한국이 2개로 남아있는 이상 허가해줄 수 없다"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이룰 수 없는 꿈, 교민회 공산주의 국가 쿠바에서 일종의 협회로 분류되는 교민회는 다른 나라의 경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존재 자체를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가 꿈꾸었던 한인회관은 방 3개의 작은 집. 당장 기금 마련도 어렵지만 협회가 없으면 구입할 권리조차 없다. 국가가 모든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쿠바 동북단 마나티항에 세워놓은 한인 이주 80돌 기념탑조차 한인회 이름으로 소유하지 못하고 있다. 후손들에게 우리 역사와 우리말을 가르치고 싶지만 이 역시 공개적으로 할 수 없다. "일본인도, 중국인도 협회를 갖고 있건만…". 교민회 설립 추진과정에서 아바나의 북한대사관을 방문, 협조를 요청했다. 그러나 반응은 싸늘했다. 조국의 분단은 이역만리에서도 장벽으로 남아있음을 새삼 실감했다. 그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남도 북도 쿠바 한인들보다는 되레 쿠바인들에게 친절하다는 것이다. 어찌된 연유로 남도 북도 정작 한인 후예들에게는 이리 모질게 대하는지 모를 일이다. 선생의 자택에서 한식 저녁을 대접받은 날. 선생은 자리에서 일어나 책장 자물통을 열더니 10여개의 훈장을 주섬주섬 꺼냈다. 쿠바 정부 최고훈장을 두번이나 받았건만 그는 자신의 훈장들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가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는 훈장은 한국 정부가 97년 그의 부친에게 추서한 건국훈장 애국장이다. 이민 초기 한인회 결성에서부터,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을 송금하는 등 아버지가 마지막 순간까지 매달렸던 조국. 그 역시 평생을 돌아 다시 찾은 아버지의 조국. 그러나 부친에게나 그에게나 조국은 늘 짝사랑의 대상이었다. 마침내 선생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바나/김진호 기자 jh@kyunghyang.com 마지막 한글수업 加교민 이일성씨 우리 말.문화갈증 해소 쿠바교민 '화합 전도사' 일요일 점심 무렵. 아바나 시내 조용한 주택가에 자리잡은 이르마 임 김씨(임은영.59)의 집이 손님들로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지난 1년6개월 동안 쿠바 한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주었던 이일성 선생님(60.밴쿠버 거주)의 마지막 수업일이기 때문이다. 건강이 악화돼 캐나다로 돌아가는 선생님의 환송연이기도 했다. 쿠바에서는 고위직으로 통하는 대형 중국식당 '라 토레 델 마르필'의 지배인 파블로 박씨(박금성.62) 부부, 마탄사스에서 달려온 마르타 임 김(임은희.63)씨 등 아들, 손자, 며느리가 손을 잡고 모였다. 거실에 둥그렇게 마련된 자리가 차자, 이일성씨의 주도로 한국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쿠바 한인사회가 갖고 있는 유일한 국악기인 단소도 연주됐다. 이씨가 쿠바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그의 유창한 스페인어 실력 때문이다. 1999년 미주 한인교회의 아바나 방문길에 통역을 해준 것이 인연이 돼 우리말 선생님 역할을 맡았다. 작년 3월 마탄사스에 거처를 마련한 이일성씨 부부는 아바나와 카르데나스 등 3곳에 모여사는 한인들에게 주 1, 2회씩 우리말 수업을 했다. 다른 지방에 흩어져 사는 한인들도 종종 방문했다. 쿠바 한인들이 몇마디나마 우리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순전히 그의 열정적인 강의 덕분이었다. 불편한 대중교통 편으로 한인사회를 찾아다닌 그의 수업은 난생 처음 한글을 배우는 교민들의 갈증을 풀어주었다. 이씨는 한글만 가르친 것이 아니다. 노래를 통해 한국의 정서와 혼을 심어주었다. 마르타씨가 쿠바 이민사를 출판할 수 있었던 것도, 또 마나티항에 한인 이주 80돌 기념탑을 세운 것도 모두 이씨와 한인교회의 도움으로 가능했다. 그는 한인사회의 접착제 역할도 했다. 일부 반목하고 살던 한인들이 그의 한글수업이 진행되면서 다정한 이웃이 됐다. 60, 70세가 넘은 분들도 꼼꼼하게 노트정리를 하면서 열성을 보였다. 그의 한글 수업은 엄밀하게 말해 불법수업이었다. 쿠바 정부로부터 교민회를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씨는 후임 선생님을 찾아보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그는 "내가 떠나고 나면 교민들이 그동안 애써 배운 한글을 잊게 될까봐 걱정된다"고 아쉬워했다. 내년 3.1절 행사에 다시 오기로 한 이씨는 교민 학생들에게 작은 약속을 했다. 국악기를 확보해 내년 봄에는 '덩더쿵'을 연주하자는 것. "선생님 내년에 봐요". 어색한 우리말로 인사하며 하나둘씩 떠나가는 교민들의 발걸음이 무거워 보였다. 김진호 기자 |
다시 쿠바로. 아바나 외국인전용병원 르포 (2) | 2012.02.23 |
---|---|
쿠바 마나티, 에네켄 농장의 후예들 (1) | 2012.02.23 |
베트남 케산전투 현장을 가다 (25) | 2012.02.23 |
유라시아 철도기행/로테르담 (5) | 2012.02.23 |
유라시아 철도기행/프라하 (0) | 2012.02.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