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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읽기/글로발, 발로글

쿠바 마나티, 에네켄 농장의 후예들

by gino's 2012. 2. 23.

화상ID
20011123000122
분류
정치
제목
쿠바 한인교포 이민 3세 에스민다 아마도 김 가족 모습
내용1

쿠바 한인교포 이민 3세 에스민다 아마도 김 가족 모습. 집앞 마당에서 딸 렉시스(15), 아들 젠드리(26)와 함께한 에스민다.


게재정보
2001/11/22 (목)     45판 / 23면
분류
인문/사회과학
제목
<역사 마지막韓人>(7)쿠바이민 산증인 에스민다 가족
본문

지구의를 반바퀴 이상 돌려야 만나는 쿠바. 멕시코 유카탄 반도와 미 플로리다 반도라는 두개의 손가락 사이에 낀 시가를 연상시킨다. 이곳에도 구한 말 `낯선 삶' 으로 걸어들어간 한국인들의 족적이 남아 있다. 그들 대부분은 허위허위 삶을 이어오면서도 끝내 조국의 말뚝을 벗어나지 못한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세상의 끝, 마나티
쿠바 동북단 라스투나스주의 마나티항. 오래전 항구 기능을 상실한 이곳은 쿠바에서도 철저히 버림받은 땅이다. 마나티시로 통하는 비포장 외길 18㎞와 녹슨 철로로 세상과 가까스로 연결된 폐항이다. 그러나 한인들이 하나의 긴 여정을 마치고, 또 하나의 고단한 여정을 시작한 출발점이었다.
1905년 유카탄 반도의 에네켄(애니깽) 농장에 팔려온 한인들은 1,031명. 계약대로 4년 동안 일을 한 뒤 고향으로 돌아오려 했지만 대부분 이역만리에서 분재(盆栽)된 삶을 마감했다. '부채 노예'의 사슬에서 풀려난 유카탄 이민자 가운데 288명이 1921년 쿠바로 건너갔다. 지난해 말 현재 아바나와 마탄사스, 카르데나스를 중심으로 거주하는 한인교포 1∼4세는 모두 700여명.
쿠바 수도 아바나에서 렌터카 편으로 꼬박 700㎞를 달려 마나티시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 8시쯤. 멀리서 온 손님을 살갑게 맞는 '김씨 집안' 사람들의 얼굴에서는 아무리 뜯어봐도 한국인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이민 3세 에스민다 아마도 김(48) 가족. 하지만 스페인 방식으로 이름 끝에 붙은 어머니의 성은 분명 코레아노(한국인)이다. 음식 이야기를 꺼내자 곳곳에서 "김치, 지지미, 콩장, 부침개" 등 어머니의 음식 이름을 쏟아냈다. 에스민다 가족이 거쳐온 행로는 쿠바 한인 이주사를 대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바나에서부터 동행한 쿠바 한인대표 헤로니모 임 김 선생(75)의 도움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카리브해의 무국적자들
8세때 부모를 따라 유카탄에 이주했던 에스민다의 할아버지 프란시스코 김 김(작고)은 20대 청년으로 쿠바에 넘어왔다. 시작부터 불길했다. 항구에서 국적 시비가 붙은 것이다. 일본인으로 분류하려는 쿠바 당국에 맞서면서 10여일 동안 배에 머물렀다. 한인들은 일본인으로 취급받기보다 무국적자로 남기를 선택했다.
한인들이 쿠바를 찾은 것은 '에네켄 지옥'을 탈출, 사탕수수밭에서 새삶을 꾸리기 위한 것. 그러나 때마침 미국의 관세장벽으로 국제 설탕값이 폭락해 한인들은 졸지에 잉여노동력이 됐다. 마나티에는 모기가 들끓고 마실 물도 마땅치 않았다. 결국 한인들이 갈 곳은 에네켄 농장밖에 없었다. 김씨 가족도 다른 한인들과 함께 쿠바 중서부 카르데나스와 마탄사스 지방의 에네켄 농장에서 파트타임 일자리를 잡았다. 에네켄에 신물이 난 조부는 마나티 부근으로 다시 이사온 뒤 일반 농장의 잡역부로 생을 마쳤다.
#에네켄 지옥도
13살 때부터 부친을 도와 에네켄 농장 일을 했다는 헤로니모 선생은 '생각하기도 싫은 지옥'이었다고 회고했다.
"새벽 3, 4시면 일어나 아침식사 준비를 하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했다. 키 낮은 유년생 에네켄 가지를 자르려면 온종일 허리를 숙여야 했다. 바위 위에서도 뿌리를 내리는 에네켄의 억센 줄기를 다듬으려면 열대 날씨에도 두꺼운 옷과 장갑으로 무장해야 했다. 날카로운 가시는 간단없이 살을 파고 들었다"
에네켄은 당시 쿠바의 최하층민들도 꺼렸던 일. 그러나 한인들은 그 에서도 조국의 독립을 염원했다.
#쌀 한 숟가락의 조국애
한인들은 쿠바에 도착한 지 3달 만인 21년 6월 북미 국민회 쿠바 지방회를 설립했다. 이후 한인촌이 들어선 아바나와 마탄사스, 카르데나스 지방회로 나뉘었다. 마탄사스에 22년 민성(民成)학교를, 카르데나스에 23년 진성(進成)학교를 각각 세웠다. 보잘것 없는 시설이었지만 자식들에게 우리말과 역사를 가르쳤다.
쿠바 한인들도 현대사의 굴곡을 고스란히 겪었다. 언젠가 돌아갈 조국이 일제의 침략을 받자, 독립운동 자금을 모았다. 매끼니 식구수대로 한 숟가락의 쌀을 모았다가 이를 팔아 돈을 마련했다. 모금운동을 주도했던 사람 중 한명인 헤로니모 선생의 부친, 임천택(작고)은 천도교의 성미(誠米) 방식을 택했다. 쿠바 전역 한인촌에서 이렇게 모은 독립자금은 아바나의 중국은행을 통해 상하이 임시정부에 보냈다. 37년부터 시작한 송금액은 당시 미화로 1,000달러를 웃돌았다. 60∼70대 노인이 된 이민 2세들은 올드랭사인에 맞춰서 애국가를 부르던 3.1절 행사를 똑바로 기억하고 있다.
#한지붕 두나라
이민 1세대는 길어야 한두달 내로 마나티항을 떠났지만, 부둣가 쇄락한 마을에는 묘하게도 '코레아'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쿠바 정부가 사탕수수 수출항을 60여㎞ 떨어진 푸에르토 파드레 항구로 옮긴 뒤 아무도 찾지 않던 이 곳에는 지난 3월25일 작지만 의미 깊은 탑이 들어섰다. '쿠바 한인 이주 80주년 기념탑'.
"빨강 지붕 아래 두개의 흰 탑은 한 지붕 밑에 있는 한국과 쿠바를 뜻한다"고 헤로니모 선생의 딸 파트리시아(33)가 말해주었다.
마나티 인근에 사는 교포를 제외하고 제막식에 참가할 수 있었던 인원은 40명에 불과했다. 대형버스 1대를 대절하는 데만 쿠바 평균월급(10달러)의 100배가 들었기 때문이다. 내년에는 버스 2대를 빌려 좀더 많은 사람들이 탑을 찾는 것이 교민들의 소원이다.
#25% 한국인
에스민다 가족에게 섣불리 '핏줄'을 강조해선 안된다. 많은 쿠바 한인들처럼 증조부 세대에 멕시코로 이주했고, 조부 대에 이르러 쿠바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피델 카스트로의 혁명(59년) 뒤 서반구에서 유일하게 인종차별이 없는 나라가 된 데다 냉전시절 본국과의 관계가 사실상 중단되면서 자연스레 현지인들과 인연을 섞었다. 에스민다의 할머니는 멕시코인, 남편은 쿠바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25%, 딸 렉시스는 12.5% 한인이다. 마음 깊은 곳에 한처럼 '조국'을 안고, 코스모폴리탄으로 녹아든 사람들이다.
아바나/김진호 기자jh@kyunghyang.com

'쿠바 이민사'쓴 마르타 임 김
자칫 묻혀버릴 뻔한 쿠바의 한인 이민사가 복원된 것은 이민 1세 임천택 부녀의 2대에 걸친 노고 덕분이었다. 그가 남긴 32쪽짜리 '쿠바 이민사'는 초기 한인사회의 유일한 기록이었다. 미완성의 쿠바 이민사를 완성한 사람은 둘째딸 마르타 임 김(63.전 마탄사스 종합대학 교육대학장.사진)이다. 1997년 광복절에 부친에게 추서된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부군인 라울 R 루이스(60.마탄사스 종합대 박물관장)와 함께 작년 1월 출간한 '쿠바의 한국인들(Coreanos en Cuba.사진 아래)'을 공동집필했다. 12년 동안의 현지 조사 및 자료정리와 3년 집필의 결실이었다. 2000년 쿠바 문화부로부터 최고 학술출판상을 받은 이 책은 아쉽게도 아직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았다. 치열한 지식인의 풍모가 몸에 밴 그를 아바나 시내에서 92㎞ 떨어진 마탄사스 자택에서 만났다.
-쿠바 한인들이 차별대우를 받지는 않았는가.
"모두가 살기 힘들었지. 한인이 특별히 차별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궁핍했던 시절 아주까리 잎으로 찌개를 끓여먹고, 옥수수 빵으로 연명했다"
-한인사회가 가장 어려웠던 시절은 언제인가.
"태평양전쟁 초기인 42년 쿠바의 보수신문 델라 마리나가 '한국인과 하포네(일본인)는 마찬가지다'라고 왜곡보도했을 때가 가장 큰 위기였다"(그는 살바도르 디아스 베르송이라는 당시 신문기자의 이름을 똑똑히 기억했다)
-책을 펴내면서 아쉬웠던 점은.
"이 책은 사실상 과거의 기록이다. 미묘한 부분이 있어 다루지 못한 59년 혁명 이후 한인사를 언젠가 쓰고 싶다. 61년 미 CIA의 피그만 침공사건 당시 한인 형제끼리 총부리를 댔던 비극도 있었다. 침공군이었던 형 호르헤 김은 포로로 잡힌 뒤 죽었고, 혁명군이었던 동생 베니그노 김은 싸우다 죽었다"
-남북한을 어떻게 보는가.
"국명은 다르지만 한번도 조국을 2개로 생각한 적이 없다. 한국 방문때 오두산 통일전망대에서 북쪽을 바라보면서 슬펐다. 이렇게 아름다운 나라가 왜 갈라져 있어야 하는가"
-한국을 다시 찾고 싶지는 않은가.
"가고 싶지만 돈도 없고, 국제정세 때문에…. 그래도 나는 부친의 평생 소원을 대신 이뤘다. 1세대 이민들은 단 한명도 고국방문을 하지 못하고 죽었다" 김진호 기자

<역사 마지막韓人>(7)쿠바이민 산증인 에스민다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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