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중생 사망사건 직접 사과 안해 역풍”
ㆍ당시 미군 2사단장 회고록 펴내
“여중생 사건 당시 사과하는 자세를 보이지 못한 게 역풍을 불렀다.”
2002년 6월 효순·미선양의 사망사건의 소용돌이 속에 황황히 한국을 떠났던 러셀 L 아너레이 당시 주한미군 2사단장이 최근 펴낸 책 <생존(Survival)>에서 당시를 회고했다. 이 책에서 그는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 발생 현장에서 6주 동안 합동태스크포스 사령관으로 일하면서 느낀 재난대비의 필요성을 집중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일부를 여중생 사건 회고에 할애했다.
그는 “2002년 좁은 도로 위에서 발생한 여중생 사건은 최악의 시점에 최악의 상황에서 일어났다”면서 “세계의 눈이 한·일월드컵 개막에 쏠린 데다가 한국의 젊은 정치인들은 사건을 반미와 북한 비위 맞추기에 이용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특히 이 사건에 대한 사단의 입장 발표를 관행대로 2사단의 공보장교(소령)에게 맡겼던 게 화근이었다고 회고했다. 소령이 사과하는 태도는 보이지 않고, 사건의 구체적인 정황을 설명하는 데만 초점을 맞추는 바람에 일이 커졌다는 것이다. 아너레이는 “사고가 발생하면 깊이 사죄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 한국문화에서 거센 역풍을 초래한 실수였다”면서 “우리가 실수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시위가 확산된 뒤였다”고 자책했다.
“결국 나는 동두천 캠프 케이시 앞에서 시위대가 나를 ‘살인자’라고 부르면서 주한미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가운데 괴로움과 실망감 속에 한국을 떠났다”면서 이임식 당시의 씁쓸한 기억을 되살렸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경험은 재난을 당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를 깨닫는 계기가 됐다.
아너레이는 카트리나 구호 현장에서 참모들이 준비한 사무적인 내용의 원고 대신 본인이 직접 보고, 파악한 내용을 이재민들에게 설명해 호응을 받았다면서 “2002년 한국에서나 2005년 루이지애나에서나 사람들이 원한 건 지도자의 한마디”였다고 전했다. 그는 효순·미선양이 사망한 며칠 뒤 가족을 찾아 위로하는 등 여론을 되돌리려 노력했지만 무위에 그쳤다.
<워싱턴 | 김진호특파원 jh@kyunghyang.com>
입력 : 2009-05-07 17:58:48
ㅣ수정 : 2009-05-07 17:58: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