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나라 외교부인가요?" 서울 도렴동 정부중앙청사 별관 17층에서 외교부 장관과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만남이 이뤄진 것은 2012년 1월이었다.
위안부 문제가 불거진 것은 생존 할머니들의 피맺힌 증언이 세상에 알려진 1990년대 초였건만 외교부 장관과 위안부 할머니들 간의 사상 첫 만남이었다.
당시까지 수요시위가 1000회를 넘기고, 피해 할머니 234명 중 171명이 돌아가시도록 할머니들을 만나 견해를 청취한 외교부 장관은 없었다. 이날 만남 역시 자발적인 게 아니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한국 정부가 노력하지 않은 것이 피해자의 기본권을 침해했다는 헌법재판소의 부작위(不作爲)에 따른 위헌 결정이 내려진 것은 그 전해 8월. 외교부가 나서 일본과 협의를 하느니 마느니 5개월을 허비한 뒤에나 이뤄진 장관과의 만남이었다.
"어느 나라 외교부인가요?"
김성환 장관은 50분 가까이 이용수, 강용출 할머니의 북받친 항의를 들었다. 이용수 할머니는 "일본 외교(통상)부입니까"라는 한마디를 꽂았다. 외교관은 국가의 대변인이자, 국민의 대변인이다. 일본의 입장을 두둔하거나, 일본과의 협상의 지난함을 말하는 것만으로 자리를 모면하려는 정부 태도에 대한 직격탄이었다.
장관 면담 3년 뒤 위안부 문제는 박근혜 정부의 밀실 합의로 대못을 박았다. 그 2년 뒤에나 '최종적, 불가역적 합의'라는 이면 합의가 밝혀져 규탄 대상이 됐다. 대통령의 뜻에 복종해야 하는 국가 공무원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국민의 아픔을 다루는 사안에 단 한 명의 외교부 직원도 직을 걸지 않는, 지극히 한국적인 풍토였다.
대한민국 외교부는 일본 앞에서 유독 겸손하다. 1992년 수교 때부터 할 말을 하지 못한 중국, 분단과 동맹의 족쇄에 이중으로 구속된 미국 앞에서도 지극히 겸손하긴 마찬가지다. 하지만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외교관들이 지켜야 할 국가의 토대는 사람이다. 제 나라 국민의 영육을 난도질한 사안에 겸손한 것은 사소한 과실이 아니다. 국가의 본령을 해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정은의 북한'과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이 맞붙으며 한반도 위기가 전쟁 직전까지 치닫던 2017년 4월 일본에 겸손한 외교부의 DNA는 다시 발현됐다. 직무 유기에 가까운 작태였다.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여러 차례 발사하고 '서울 불바다'와 '괌 포위 사격'을 경고하자, 트럼프는 '화염과 분노(fire and fury)' 및 북한의 절멸을 공언했다. 한반도 위기가 심각해지자 '아베 신조의 일본'은 한국보다 더 호들갑을 떨었다. 중의원에서 유사시 계획을 보고한다면서 한반도 난민의 입국 절차, 난민 수용소 건립, 망명 신청자 선별 작업을 포함했다. 내림세였던 내각 지지율은 반등세로 돌아섰다. 한반도 위기를 빌미로 정치놀음을 벌인 꼴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대한민국 외교부의 침묵이었다. 불안한 국민정서를 다독이고, 아베의 행태에 따끔한 경고를 날릴 사안이었건만 대일 교섭은 고사하고 단 한마디의 입장도 내놓지 않았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으로 대선판에 뛰어든 후보들도 침묵하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외교로 밥벌이는 하는 외교부가 통째로 침묵한 것은 당최 납득이 안 가는 사안이었다.
외교관의 민족혼, 국가혼은 과도한 주문인가
답답한 마음에 외교부 대변인에게 입장표명을 요청했지만, 역시 침묵으로 일관했다. 외교의 근간은 국가이고, 국가의 근간은 사람이다. 제 나라 국민조차 돌보지 않는 외교부가 대체 존재해야 하는가, 의문을 갖게 한 사건이었다. 정말 전쟁이 벌어지면 국민의 운명을 고스란히 일본 내각의 처분에 맡길 요량이 아니었다면 설명이 안된다.
청춘의 한 시점, 외교관을 직업으로 선택, 국가를 대변해온 삶의 정점이 외교부 장관이다. 위안부 합의안의 주역이었던 윤병세 장관은 5년 가까이 자리를 지켜 '오병세'라는 별명을 얻었다. '최종적, 불가역적 합의안'을 버젓이 만들고, 그것도 모자라 이면합의를 숨기고 넘어가려던 그의 장관직은 개인의 영광이었을지언정 국가의 자랑은 분명 아니었다. 그 반대였다. 아베가 한국민을 가상 난민으로 취급했을 때 침묵한 건 장관뿐이 아니다. 관련된 직업 외교관 모두의 직무유기였다.
일본 앞에서 유독 겸손했던 외교부의 입장은 지난 6일 강제동원 배상 방안을 발표로 정점에 도달했다. 하필 외교관 출신 정치인인 박진 장관이 발표했다. 박 장관은 정부 결정의 배경으로 '엄중한 한반도 및 지역, 국제 정세'를 들며 "경색된 한·일 관계를 방치하지 않고 국익 차원에서 국민을 위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국익에 도움이 되는 결정인지, 국민을 위한 결정인지 따져야 할 대목이지만 장관 스스로 발언에 책임져야 할 것이다.
2011년 헌법재판소의 부작위 판결은 2015년 박근혜-윤병세 팀의 밀실 합의안으로 의미가 퇴색했다. 2018년 대법원의 일본 전범기업 배상 판결은 윤석열-박진 팀의 '내 탓이오' 해법으로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했다. 사법부를 농락한 두 번의 사건에 외교부는 협상의 주역이자 종결자였다. 윤석열 정부의 무리수 이면에서 실무를 맡았던 장관 이하 직업 외교관들의 역할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는 시점이다.
"공무원은 영혼이 없다"고 하지만 이 말은 개인의 처세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 외교관이 국가혼, 민족혼이 없다면 그 폐해는 개인의 영역을 벗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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