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우크라이나에 무기나 포탄을 지원하는 문제를 (지난 몇 달 동안)한국과 이야기했다. 하지만 미국이 개입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할 것이라고 본다. 한국은 러시아와 중국의 반응을 두려워하고 있다."
폴란드 '정부 수반'의 공개발언 외면
마테우스 모라비에츠키 폴란드 총리(44)가 지난 12일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지난 7일 뉴욕타임스의 보도로 공개된 기밀문건 내용대로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155㎜ 포탄 33만 발을 지원하는 문제를 폴란드와 협의해왔음을 확인하는 말이다. 국내 언론은 주로 이 대목과 관련해 인터뷰 내용을 소개했다. 하지만 모라비에츠키 총리의 발언은 훨씬 더 심각한 문제를 제기한다.
특히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직접적인 개입이 없이 한국이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는 대목은 외교적으로 도를 넘은, 지극히 무례한 발언이다. 주권국가로서 한국의 지위를 깡그리 무시하는 인식이 깔려 있지 않으면 할 수 없는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미국 정보기관의 문건 누출로 국민적 불안감이 확대되는 가운데 국민적 자존심마저 땅에 떨어뜨리는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윤석열 정부가 국제적으로 어떻게 인식되는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우리 외교부는 모라비에츠키 총리 인터뷰가 보도된 뒤 "우리 정부는 우크라이나의 자유 수호를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에 동참하고 있다. 살상 무기를 지원하지 않는다는 입장에 변함이 없다."는 요지의 입장문(Press Guidance)을 내놓았다. 그러나 15일 현재 폴란드 정부에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 발표하지 않고 있다.
정상적인 국가에서는 제3국 정부 수반이 이처럼 무례한 발언을 공개적으로 내놓는다면 외교 경로를 통해 발언의 진위를 확인하는 한편, 공식적인 항의나 발언 정정 등의 요구를 한다. 국가의 위신이 걸린 문제에 대해 항의하고, 정확한 답변을 끌어내는 것은 대외적으로 국가를 대표하는 외교부 공무원들이 봉급을 받는 이유의 하나이기도 하다. 동유럽 사정에 정통한 전직 외교관은 “도를 넘는 발언이 아닐 수 없다”라고 공분했다. 뉴욕타임스 인터뷰가 직접 인용 방식으로 소개한 모라비에츠키의 발언을 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바이든 대통령이 이 문제에 개입한다면 아주 좋을 것이다. 바이든 대통령이 미국의 개입과 일종의 피난처, 일종의 안보 보장을 한국에 제공하지 않는 한 그런 (한국이 무기·탄약을 우크라이나에 보내는) 일이 일어날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I would be very happy if President Biden intervened. Because without the intervention of the United States and some kind of shelter, some kind of security guarantee that President Biden could give South Korea, I don't think this is going to happen.)"
잦은 망언으로 외교 분쟁 전력
한국이 전쟁 중인 나라에 살상 무기를 제공하지 않는 것은 단순한 정부 입장이 아니다. 관계 법령에 저촉되는 문제다. 모라비에츠키는 이 문제를 놓고 한국과 지난 몇 개월 동안 대화했다면서도 국내법적인 난관을 무시하고 있다. 그러면서 바이든 대통령이 개입해 피난처(shelter) 또는 안보 제공을 한다면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무기·탄약을 보낼 수 있다고 강변했다. 아무리 우익 포퓰리즘 '법과 정의당(PiS)' 소속 총리라고 해도 도가 지나친 말이 아닐 수 없다. 인터뷰 기사를 작성한 뉴욕타임스의 줄리언 반스 기자와 아담 엔투스 기자는 이와 관련해 주미 한국대사관에 코멘트를 요청했지만, 답변을 받지 못했다고 밝히고 있다.
사업가 출신으로 부총리 겸 개발장관(2015)을 거쳐 총리(2017)에 전격 임명된 모라비에츠키는 절제되지 않은 표현으로 이미 국제적으로 입방아에 올랐던 인물이다. 2018년 2월 17일 뮌헨 안보회의에서 나치의 홀로코스트 관련, "폴란드 부역자는 물론 유대인 부역자, 러시아 부역자, 우크라이나 부역자도 있다고 말하는 게 범죄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 전 세계 유대인 공동체로부터 반유대인 발언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두 차례 통화 끝에 같은 해 6월 홀로코스트 문제를 공동연구 한다는 내용의 코뮈니케를 발표한 뒤에나 정리된 파문이었다. 2019년 8월에는 "폴란드는 독일로부터 2차 대전 배상금을 받은 다른 나라들보다 많은 600만 명의 인명을 잃었다"라면서 생뚱맞게 추가 배상을 요구하기도 했다. 독일과 폴란드는 1970년대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가 무릎을 꿇는 사죄 뒤 과거사 배상을 일단락지었다.
모라비에츠키는 우크라이나 전쟁 뒤 국방예산을 국내총생산(GDP)의 4%까지 끌어올리는 한편, 미국의 방침에 적극 호응하고 있다. 지난 13일 워싱턴의 싱크탱크 애틀랜틱 카운슬 초청 대화에서는 최근 중국 방문길에 "유럽이 미국 의존도를 줄여 대만과 관련한 미·중 갈등에 휘말리지 말 것"을 강조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발언에 딴지를 걸었다. 그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정복되면 그 다음 날 중국이 대만을 공격할 수도 있다"면서 "그들(프랑스 등이)이 막대한 지정학적 대가로 유럽연합의 상품을 중국에 더 팔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비꼬았다.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선 서유럽 국가들을 지목, "그들은 더 많은 것을 더 빨리, 더 많은 무기를 (우크라이나에) 제공해야 한다. 그들은 부자나라들이다"라고 말했다.
폴란드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한국과 긴밀한 국방협력을 하는 북대서양조약(나토) 회원국이다. 특히 한국산 무기를 가장 많이 사들이고 있다. 국산 다연장로켓 ‘K239 천무'와 K2 전차, K9 자주포, FA-50 훈련기 등 지난해에만 124억 달러의 무기수입을 계약했다. 올 들어서는 방위사업청의 승인을 받아 K9 자주포의 차체(섀시)를 사용한 자국산 크랩 자주포를 우크라이나에 제공하고 있다.
그렇다고 폴란드 '정부 수반'의 망언에 제대로 대처하지 않는다면, 그가 말한 그대로의 국제적 위상을 자인하는 격이 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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