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비용 증가. 바이든 경제전략의 대표적인 역발상이다. 세계화 시대 만국 기업들의 지상목표였던 '비용 절감(cost-down)의 대척점에 서 있다. 비용 증가를 쉽게 풀이하면, 비싸더라도 미국 제품을 구매하고, 비싸더라도 미국에서 생산하라는 명제다. 미국이 제조업의 메카로 거듭나는 데 필요한 만큼 '비용 증가'를 감당하라는 것이다. '비용 증가'의 대표적인 사례가 에너지와 반도체 부문이다.
비용 증가를 그럴듯하게 만드는 데 동아시아 분단국 지도자가 자주 들먹이는 '가치'가 필요하다. '민주주의 대 권위주의' 구도에 지정학 개념을 덧씌운 게 공급망의 안정이다. 참으로 묘한 논리다. 가치와 명분 아래 비용 증가를 감당하는 게 정의로 포장된다.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좌관(46)이 지난 4월 20일 브루킹스 연구소 연설의 주제는 '미국의 신경제 리더십'이다. 미국 경제의 부흥을 위해 동맹과 우방이 비용 증가를 감당하는 게 신경제의 핵심의 하나다.
파트너 국가들의 역할은 설리번이 국내 산업기반 붕괴를 비롯해 미국이 처한 4개의 도전에 대응하는 두 번째에 나온다. 그는 "미국 내 생산력 구축이 출발점이지만, 미국의 파트너들이 생산력과 회복력 및 사회적 약자를 끌어안는 통합성을 구축하도록 하는 게 두 번째 단계"라면서 “경제적, 지정학적 현실에 맞서려면, 안전하고 지속 가능한 경제를 만들어야 하고, 파트너들이 미국과 함께해야 한다”고 말했다. 파트너는 선진국과 신흥국을 아우르는 생각이 비슷한 나라(LMN)로 규정했다. 특히 “반도체와 청정에너지 부문은 투자의 포화점이 먼 만큼 공적, 사적 투자가 필요하다”면서 “한 시도 낭비할 수 없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투자와 일자리는 모두 제로섬 게임이다. 미국에 투자하고 나면 그만큼 자국에 투자할 여력이 줄어든다. 일자리도 마찬가지다. 미국 중산층의 일자리를 늘려주고 나면, 그만큼 자국의 일자리가 준다.
설리번이 모범적인 청정에너지 투자 합의의 예로 든 것은 조 바이든 대통령이 지난 3월 미국을 방문했던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언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과 에너지 전환을 위해 미국과 EU가 과감한 공공투자를 하기로 합의한 것을 들었다. 설리번은 양측이 대서양 양안에서 각각 청정에너지 인센티브를 정렬하고, 핵심 광물과 배터리 공급망에 관한 논의를 시작하기로 했다고 소개했다.
설리번이 "아직 읽어보지 않았으면 꼭 읽어보라“고 권한 언론 성명에는 뜬금없이 미국산 액화천연가스(LNG)의 유럽 수출이 앞세워져 있다. EU가 2030년 이전까지 러시아 천연가스 수입을 중단하기 위해 매년 500억㎥의 미국산 LNG를 수입한다는 합의다. 2030년까지 러시아산 천연가스 수요의 3분의 1을 줄일 수 있는 분량이다. 미국산 LNG의 수출 확대는 바이든 행정부가 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를 유도하면서 얻은 소득의 일부일 뿐이다.
LNG는 지난 20일 히로시마 7개국(G7) 정상회의 코뮈니케에도 등장한다. 성명은 "우리는 러시아 에너지에 대한 의존도를 단계적으로 줄일 필요가 있다"라면서 LNG 공급 증가를 강조했다. "이 분야에 투자하는 게 현 위기에 대응하고, 잠재적 가스 시장 공급 부족을 해결하는 적절한 방법"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런데 LNG가 기후 변화에 대처할 에너지 전환인가. 국제 그린피스가 "화석연료에서 벗어나야 할 긴급한 필요에 직면해서도 지도자들이 테이블로 들고 온 것은 새로운 화석연료에 대한 지지"라고 규탄한 까닭이다. LNG를 쓰기 위해선 항구 접안시설은 물론 가스 저장소를 건설해야 한다. 설리번이 강조한 투자에는 건설에 필요한 투자도 포함된다. 값싼 러시아산 천연가스 대신 비싼 미국산 LNG를 사용하면서 투입해야 하는 추가 비용이다.
설리번은 각국이 미국산 LNG를 수입하는 데 필요한 설비투자를 탄소제로(Net Zero)와 ‘공급망’과 같은 용어와 뒤섞여 소개함으로써 '비용 증가'를 지정학적 변화와 기후 변화에 대응하는 가치 있는 투자로 포장했다.
설리번은 또 미국·캐나다 정상이 청정에너지 공급 및 중산층 일자리 창출에 합의한 것을 예로 들었다. 일본과 핵심 광물 공급망 협력을 심화하기로 한 것도 포함됐다.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이 국가 간 분쟁의 원천이 아닌, 신뢰의 원천이 되기 위한 협력사업의 본보기로 꼽은 사례다. ‘대한민국’은 그 뒤에 나온다. 유럽과 한국, 일본, 대만, 인도 등 파트너들과 함께 반도체 인센티브에 관해 협의하고 있다는 말이다. 설리번은 향후 3년 동안 반도체 투자가 극적으로 늘 것으로 예상된다고 덧붙였다. 미국은 투자의 마중물로 반도체·과학법을 통해 기업의 공장 설립 및 확대에 390억 달러의 인센티브를 마련해놓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장관(52)이 지난 2월 23일 조지타운에서 한 ‘반도체과학법(CSA)과 미국 기술 리더십의 장기비전’ 연설문을 들춰볼 필요가 있다. 러몬도 장관은 “2030년까지 수십만 개의 일자리를 되찾고, 미국이 최첨단 반도체 생산거점이 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미국은 1990년 세계 반도체 칩의 37%를 생산했지만, 현재는 고작 12%에 불과하다. 첨단 반도체는 더 심각하다. 한때 세계 수요의 거의 전부를 생산했지만, 지금은 생산량이 제로(0)다. 대만이 첨단 반도체의 92%를 생산한다. 러몬도는 대만의 첨단 반도체 산업기술이 UC버클리대가 연방정부 지원을 받아 개발한 기술임을 강조하면서 미국이 첨단기술의 연구 중심과 반도체 슈퍼파워의 자리를 되찾겠다고 다짐했다.
러몬도는 “2001년 30만 명에 달하던 미국 반도체업계 노동자의 3분의 1이 일자리를 잃었다. 그사이 세계 반도체 시장은 3배가 넘게 성장했다”고 강조했다. ‘미국을 위한 칩(Chip for America)’을 내세우며 수십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할 것이라고도 장담했다. 미국이 반도체 종주국이 된다면 필연적으로 바로 한국과 대만 등 반도체로 경제를 일으켰던 나라에 '부수적 피해'가 발생한다. 모리스 창 TSMC 창업자는 지난해 12월 미 애리조나주 피닉스에서의 공장 착공식에 참석한 자리에 "세계화는 거의 죽었다. 자유무역도 거의 죽었다"고 선언했다. 세계화의 죽음을 아쉬워할 이유는 별로 없다. 문제는 그 결과 비용 부담을 떠안아야 한다는 점이다.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세계 1위 기업인 TSMC는 미국 공장의 비용상승 탓에 대만 공장 제품에 비해 20~30% 가격을 올려야 한다.
설리번이 이 밖의 나라들과의 협력사업을 소개한 것은 '고명'으로 읽힌다. 인도와 수소에서부터 반도체까지 모든 분야를, 앙골라와 태양열 발전을, 인도네시아와 ‘공정한 에너지 전환 파트너십(JETP)을, 브라질과 기후 친화형 성장을 각각 협력하고 있다면서 국제협력을 강조했다.
설리번의 연설문을 토대로 바이든 경제전략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바이든의 앞뒤가 들어맞지 않는 장광설을 듣다보면 맥락을 잡는 게 불가능할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바이든은 지난 4월 26일 워싱턴 한미 정상회담 공동기자회견 자리에서 미국이 중국과 경쟁하기 위해 미국으로 반도체 공장을 끌어들이고 있는 것과 관련해 던진 LA타임스 기자의 질문에 엉뚱한 소리를 한바탕 쏟아냈다. LA타임스 코트니 기자의 질문은 "(한국 기업들의 중국 내 반도체 생산 확대를 막으면서 중국에 의존하고 있는 한국 기업들에 해를 끼침으로써) 미국 선거를 겨냥한 국내 정치로 핵심 동맹국에 피해를 주고 있는게 아니냐"는 것이었다.
바이든은 "미국 내 제조업과 일자리를 늘리는 게 내 욕망이지만, 중국은 염두에 두지 않고 있다"고 강변했다. 족히 A4 용지 1장 분량의 답변 중 한국 반도체 기업들의 미국 투자가 일자리를 늘린다고 한껏 '선거운동'을 하더니, 돌연 "그(한국 기업들의 미국투자)게 한국 내 일자리도 늘린다. 그래서 나는 윈-윈(win-win)이라고 생각한다"고 답변했다. 잠자고 있지는 않았으되, 확실히 봉창을 두들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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