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고한 사람들의 삶을 담보로 하는 현재의 취약한 평화가 진짜 평화라고 믿으며, 스스로를 속이고 진실을 회피하는 것은 윤석열 정부의 외교안보 철학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이다. 자유와 연대가 우리 외교안보의 방향성이다."
정견과 전략의 혼란
안보마저 정치에 오염된 것일까. 직업 외교관 출신 조태용 국가안보실장(66)이 지난 9일 공개석상에서 내놓은 말이다. 윤석열 정부 출범 1주년을 맞아 '외교·안보·통일 분야 평가와 과제'라는 주제로 4개 국책연구기관의 공동학술회의가 열린 서울 종로구 포시즌 호텔에서다. 조 실장이 맡은 것은 기조연설. 마침 그 이틀 전 윤석열 정부 국가안보전략 보고서가 발표됐기에 국내외 주목을 받은 행사다. 국내외 전문가들은 물론, 주한 외교사절도 상당수 참석했다.
그는 미·중 전략경쟁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탈냉전 국제질서를 지탱해온 자유주의와 세계화라는 양대 축이 흔들리고 있다고 진단했다. 세계는 다시 군비증강과 전략적 경쟁 구도가 부상하면서 시장 논리와 비교 우위에 따른 자유 무역 대신 보다 신뢰할 수 있는 국가 간 연대와 공급망 협력이 훨씬 더 강조되는 '경제안보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덧붙였다. 부사와 형용사가 풍년인 것이야 외교적 수사로 치부해도 될 듯하다. 문제는 곳곳에 구분과 배제의 언어가 배치됐다는 점이다. 거품을 걷어내고 나서 다시 읽게 된 국가안보전략 보고서가 주는 함의는 그다지 상서롭지 못했다.
조 실장에 따르면 국가안보전략 보고서는 자유, 평화, 번영의 '글로벌 중추국가'를 지향하는 윤석열 정부가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명확히 보여주기 위해 정교하게 작성한 나침반"이다. 지정학이 귀환한 불확실한 시대, 북한과 미국, 일본, 중국 등 국가별 전략의 기조와 구체적인 실천 과제를 담았다, 고 했다. 국방혁신 4.0과 경제안보 외교의 추진 방향도 포함됐다.
적과 동지의 구분이 출발점?
조실장은 가장 먼저 필요한 것으로 우리가 놓인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제시했다. 이어 곧바로 피아를 갈랐다. 누가 우리의 생존과 안보를 위협하는 적인지, 그 적에 대항해서 우리 옆에 있을 나라는 어느 나라인지 분명한 인식을 가져야 한다, 는 주문이다.
우리 안보의 실체적 위협이자, 당면한 안보 위협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로 규정한 것 역시 안보수장으로서 이해할 만한 수순이었다. 그러면서 북한이 소위 위성 명목의 장거리탄도미사일 발사 한번에 쏟아부은 비용이 전체 북한 주민의 10개월 치 식량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계산 방법을 밝히지 않은 만큼 근거는 알 길이 없다. 다만, 그 끝에 자기 기만적 가짜 평화를 믿으며 진실을 회피하는 게 정부 외교안보 철학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이라고 말해 어리둥절하게 했다. 그에 따르면 자유는 공짜로 얻을 수 없는 것이고, 힘에 기반하지 않은 평화는 진짜가 아니다.
실체적 위협인 북한 핵과 미사일에 대한 전략은커녕 대책도 제시하지 않은 채 핵과 미사일이 북한 주민의 인권과 삶을 담보로 하는 것이라는 '주장'만 강조됐다. 외교안보 관료의 말인지 국회의원의 정견 발표인지 헛갈렸다.
두 번째로 정부의 국가안보 전략은 우리 외교 안보가 나아갈 방향성을 담고 있다면서 자유와 연대가 그 방향성이라고 말했다. 방향성을 말한다면서 뒤이어 "지난 수년간 우리는 스스로를 한반도에 가둬왔다"라고 말해 또다시 정견과 전략을 혼동케 했다. "윤석열 정부는 지난 정부와 달리 한반도와 동북아는 물론, 인도·태평양과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다"라고 새삼 강조, 지난 정부의 신남방·신북방 정책의 존재 자체를 지웠다.
가치를 공유해야 '협력 대상국'
그는 방향성에서도 피아를 갈랐다. 협력 대상을 '가치를 공유하고 공동의 이해를 추구할 수 있는 나라'로 국한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가치를 공유하는 나라로 미국과 일본을 따로 떼어내 소개했다. 지난 4월 한·미 정상회담 워싱턴 선언을 환기하며 "한·미 동맹을 핵 기반의 새로운 동맹 패러다임으로 업그레이드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국익을 중심에 두고 원칙과 상호주의를 바탕으로 국제사회와 협력하는 글로벌 중추국가를 지향한다"면서 "중국과의 관계도 다를 바 없다"고 말하면서 스텝이 꼬였다. "상호존중을 기본으로 신장된 국력에 걸맞게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당당한 한·중 관계를 만들어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런데 한·중 관계가 냉온탕을 오가던 시절 고위 외교안보 관료였던 그의 이력을 비추어보면 어리둥절해진다. 조 실장은 박근혜 대통령이 톈안먼 망루에 올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2015년 9월 외교부 제1차관이었고,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를 결정하면서 한·중 관계를 비탈길로 몰았던 시절 청와대 국가안보실 제1차장이었다.
이 것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공무원은 영혼이 없는 존재"라고 하지 않던가. "그때는 그랬지만 이제는 신념을 갖게 됐다"고 주장한다면, 할 말이 궁해질 것 같다. '가치를 공유하는 나라'와만 협력하겠다는 말 역시 봉건군주제 사우디아라비아 지도자와 대통령이 만나 협력을 다짐했던 근접 과거를 혼란케 하지만, 국익에 도움이 된다면 '악마'와도 손을 잡아야 하는 현실정치(Realpolitik) 관점에서 이해할 대목이다. 그래서 그 역시 연설 마무리 발언으로 "외교안보정책에는 오직 국익만 있을 뿐"이라고 강조하지 않았겠나. 다만 국익만 있다면서 가치를 앞세우고, 가치를 말하다가 다시 국익을 거론하니 헛갈릴 뿐이다.
가치와 국익, 오락가락
"지금부터는 전략을 구체적으로 실천해나갈 2년 차를 맞는 올해부터는 국민적 지지가 중요하다"는 조 실장의 말은 울림이 컸다. 그러나 "이를 위해 언론과 학계, 전문가는 물론, 일반 국민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한 대목에선 전혀 신뢰가 가지 않았다. '정면으로 반하는 사람들'과 소통을 할 지 의문이기 때문이다. 연설을 몇 번 되돌려 들어도 전략의 밑그림은 짐작하기 어려웠다. 기시다 후미오의 일본과 조 바이든의 미국이 내놓은 국가안보전략 보고서와 확연히 다른 점이다.
그나마 조 실장의 연설은 직업 외교관으로 몸에 배었을 외교적 수사로 가득하기에 대충 듣는다면, 넘길 수도 있다. 오찬 연설을 한 김태효 국가안보실 제1차장은 "앉아 있는 분들의 성분이 다양하다"고 말문을 열어 경악게 했다. '성분'은 '유기적인 통일체를 이루고 있는 것의 한 부분'이나 '사물이나 현상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특성'을 뜻한다. 졸지에 유기체 또는 사물이 된 초청객들이 밥을 제대로 넘겼을지, 통역이 이 단어를 어떻게 바꾸었을지 궁금할 뿐이다.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외교안보팀 관료들이 내놓은 말은 한없이 가벼웠다. 2번의 한·미 정상회담과 2번의 한·일 정상회담 뒤 자신감이 생겨서일까. 가벼움에 더해 오만과 독선이 배어 나온다. 국가안보를 고민하는 것으로 밥을 버는 관료들의 언어는 정확해야 한다. 불필요한 오해와 오인을 피하는 것은 전쟁상황에서만 필요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윤석열 정부 외교안보 철학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이라는 경고는 섬뜩하다. 국제사회마저 내 편과 네 편으로 가르면서 보이는 단호함이 대체 국익에 어떤 도움이 될지 묘연하기 짝이 없다. 그 자신감이 불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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