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은 핵 위협으로 계묘년을 열었다. 경쟁적으로 무력시위를 하더니, 한반도 안팎에서 군사적 긴장을 제도화했다. 평화의 갈림길에서 한참 뒤로 돌아간 것이다. 그렇게 정전 70년이 지났다.
북한 핵 vs 미국 핵
북한은 1월 1일 신년사 격인 당 중앙위 제8기 제6차 전원회의 보도문에서 핵무기 선제사용 가능성을 열어놓음으로써 '비대칭 확전' 의지를 분명히 했다. 북한을 '주적'이라고 규정한 남한을 '명백한 적'으로 못박았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전날 초대형 방사포 증정 행사장에서 "남조선 전역을 사정권에 두고 전술핵 탑재까지 가능하다"며 남한을 전술핵으로 공격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남측의 답은 미국 핵무기였다. 윤석열 대통령은 조선일보 1월 2일 자 인터뷰에서 한미가 미국 핵무기를 공동기획, 공동연습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이를 일축, 한미 간 최소한의 조율이 있었는지 의심케 했다.
한미 정상은 4월 26일 채택한 '워싱턴 선언'을 통해 미국 핵 자산을 정기적으로 한반도에 출현시키기로 하고, 7월 전략핵잠함(SSBN) 켄터키 함을 부산항에 정박시켰다. 한반도 긴장 관리에도 제 코가 석 자이건만, 양국 정상은 한미동맹 70주년 기념 공동성명에서 '글로벌 포괄적 전략' 동맹으로의 발전을 공동 비전으로 제시했다.
그 사이 윤 정부는 미국 정보기관의 대통령실 도·감청을 되레 옹호했고(4월), 미 국가정보협의회는 43년 만에 북한에 대한 국가정보평가(NIE)를 발표해 북한이 2030년까지 핵무기를 '강압 목적'으로 사용할 것으로 분석했다. 그럼에도 대화를 통한 해결 방안을 포함하지 않음으로써 북한과 한미가 무한대결을 예고했다.
외세 끌어들인 정전기념일
7·27 정전기념일은 과거로 퇴행하는 남북의 군사적 움직임이 본격화하는 기점이 됐다. 한국전쟁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고, 그 교훈을 토대로 평화를 구축하기는커녕 남북 모두 "전쟁 불사"를 외쳤다. 남측 대통령은 부산 유엔기념공원을 참배하고 엉뚱하게 부산 영화의전당에서 '유엔군 참전의 날-정전 70주년' 기념행사를 가졌다. 선글라스를 낀 채 유엔군 위령탑에서 묵념했던 대통령은 곧바로 자갈치시장을 찾아 장어를 손으로 잡아 보이는 퍼포먼스를 했다. 남한이 유엔군의 존재를 새삼 소환했다면, 북한은 정전기념일을 중국, 러시아와 연대를 강화하는 계기로 활용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중국의 당·정부 대표단과 러시아 군사대표단을 맞았다. 특히 소련 시절을 포함해 사상 처음 방북한 러시아 국방장관의 행보에 세계가 주목했다. 세르게이 쇼이구 장관은 김 위원장과 무기 전시회를 참관하며 "전투적 우의와 협조 관계를 확대키로 했다. 한미와 한미일의 연합군사훈련이 횟수나 질적으로 강화됐고, 북한은 탄도미사일 및 정찰위성 발사로 맞섰다.
한미일이 8·18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의에서 준 군사동맹을 추진하기로 합의하자, 북·러는 더 가까워졌다. 김 위원장이 전격 방러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9·13 정상회담을 갖고 '전방위 협력 확대'를 다짐했다. 김 위원장은 특히 우주개발과 항공, 운송, 인프라 협력을 희망했다. 남측은 북·러 간 위성과 미사일 및 재래식 군사기술 협력에 주목했고, 미국과 서방은 북한의 포탄 제공 가능성에 관심을 보였다. 가장 이해하지 못할 대목은 남한이 끊임없이 북러 군사협력의 내용을 궁금해하면서도 대러시아 외교력을 거의 가동하지 않은 채 무작정 비난만 해오고 있는 점이다.
'우크라 승전' 기원한 남측 대통령
윤 대통령은 7·15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를 방문해 우크라의 승전을 기원하고, 유엔 총회 연설서 북한의 대러 무기·군수품 지원을 기정사실화 했다. 러시아 외교부는 급기야 9월 22일 정례브리핑에서 "(러·북 협력이) 궁금하면 외교 경로를 통해 소통하지 왜 마이크부터 잡는가?"라고 통박했다. 연말까지 한·러 간 외교적 대화는 겉돌았다.
추석 연휴 기간과 겹친 중국 항저우 아시안 게임은 남과 북의 떨어진 거리를 실감케 한 자리였다. 북측 선수단과 임원들은 종목마다 남측 선수와 취재진을 의도적으로 외면했다. 일부 종목 단일팀을 꾸렸던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의 추억은 까마득한 과거가 됐다. 되레 한반도 남측 곳곳에서 온갖 전투, 전쟁 기념식이 곳곳에서 열렸다. 윤 대통령은 9·15 인천상륙작전 전승 73주년 기념행사를 대통령으론 처음으로 주관했다.
인천항 수로 팔미도 근해 노적봉함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공산 세력 물리친 인천상륙작전을 계승하겠다"고 말했다. 뜬금없이 "공산세력과 그 추종 세력, 반국가 세력이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한다"고 주장, 칼끝을 내부로 돌렸다. 20여 척의 함정과 헬기, 상륙돌격장갑차, 특전단 고속단정과 미 해군 강습상륙함, 캐나다 호위함 등이 참여해 상륙작전을 재연했다. 미 SSBN 켄터키 함의 부산 입항 당시에는 대통령 부부가 함께 함상을 방문했다.
남북의 '협력적' 평화 파괴
남북은 백지장도 맞잡는 정신으로 평화를 모색하기는커녕 되레 있는 안전장치마저 '협력적'으로 파괴했다. 남측이 한발 빨랐다. 북한의 정찰위성 발사를 빌미로 11월 22일 국무회의에서 9·19합의 중 군사분계선 일원의 비행금지구역(1조 3항) 효력을 일방적으로 정지했다. 2022년 말 북한 무인기의 서울 상공 침범 뒤 대통령이 효력 정지 검토를 지시한 뒤 기회 있을 때마다 거론한 끝에 결정한 것이다. 북한 국방성은 다음날 부분이 아니라 합의 전체를 파기한다고 발표했다. 되로 주고 말로 받은 격이다.
앞을 보면서 뒷걸음질을 치면 필연적으로 헛발질이 나온다. 국방부는 북한 정찰위성의 위험성을 한껏 강조하면서 9·19합의 일부 효력 정지를 덜렁 해놓고, 정작 북한 만리경-1호 정찰위성이 궤도에 올라가자, 성능을 낮게 평가했다. 하마스의 10·7 이스라엘 기습공격을 들어 합의 파기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억지도 내보였다. 2010년 이후 291건에 달했던 북한의 대남 침투·국지도발이 2018년 합의 도출 이후 단 2건으로 줄었다. 서해 교전도 없었다. 이 모든 충돌을 예방해 온 담보한 9·19 합의는 사라졌다.
단언컨대 '힘에 의한 평화'는 없다. 힘과 힘이 부딪치는 파열음 속에 분쟁의 위험을 키울 뿐이다. 갑진년에도 대만해협과 남중국해 등 미·중이 대치하는 지역에서 전운이 가시지 않고,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미·러 간 대리전도 장기화 국면에 접어든 지 오래다. 이스라엘 극우 포퓰리즘 정권은 신년에도 하마스 제거를 명분으로 가자지구 민간인 학살을 계속할 게 분명하다. 글로벌 안보 상황이 악화되는 가운데 정전 71년을 맞는 한반도 거주민은 지구촌 어느 지역보다 큰 분쟁 위험을 안고 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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