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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 70년] 남북이 전쟁을 기억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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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정전협정일을, 북은 '전승일'을 각각 기념했다. 한국전쟁 정전협정 체결 70주년인 27일 남북은 각각 다른 의미에서 이날을 맞았다. 남은 대통령이 묵념한 반면에 북은 '최고존엄'이 전면에 나서 2박 3일 동안 대대적으로 경축했다. 분단이 길어서일까. 같은 전쟁에서 싸우고, 같은 날 전쟁을 멈췄건만 전혀 다른 날이 됐다. 어디에도 평화는 없었다.

‘넋전춤’ (이해균 작) ▲작가의 말 “정전 70주년을 맞아, 민주화와 국가의 평화를 위해 헌신한 영령들의 넋을 위로하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남북 정상의 서로 다른 행보

윤석열 대통령은 26일 한국전쟁 국군 전사자 유해 봉환 행사를 주관했다. 27일엔 국가보훈부가 초청한 유엔 참전국 정부대표단과 함께 유엔군 전사자가 안치된 부산 유엔기념공원을 참배했다. 선글라스를 쓴 채로 유엔군 위령탑 앞에서 묵념했다. 부산 영화의 전당에서 열린 '유엔군 참전의 날-정전 70주년' 기념행사 연설에선 유엔군의 희생에 감사했다. 이후 자갈치 시장을 방문해 장어를 손으로 잡아 보이는 사진을 남겼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기념행사는 25일부터 시작됐다. 참전열사묘과 중국인민지원군 열사능원을 참배했다. 26일엔 러시아 군사대표단을 이끌고 방북한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장관을 접견하고, 북한 국방성이 주최한 '무장장비전시회-2023'을 함께 돌아보았다. 만수대 의사당에서 중국 당-정부 대표단에 환영 만찬을 제공했다. 곧 이은 27일 0시부터는 중국 당·정부 대표단과 러시아 군사대표단을 좌우에 앉힌 채 경축 대공연을 관람했다. 공연 직전에는 리훙중 중국 공산당 중앙위 정치국 위원 겸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 부의장을 단장으로 하는 중국 대표단을 접견하고 이 자리에서 시진핑 주석의 친서를 전달받았다. 대공연에서는 중국과 러시아 노래도 불렸다.

북한에서 정전기념일은 '전승절'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가운데)이 전승절 70주년 기념공연을 러시아 군사대표단(왼쪽), 중국 당-정부 대표단과 함께 관람하고 있다. 2023.7.27.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북한이 중국 인민지원군과 러시아의 지원에 감사하고, 남한이 한미 동맹의 연장선상에서 유엔군에 감사하는 것은 비슷한 구조였다. 전쟁 당시 북한-중국-소련(러시아) 대 남한-미국-유엔사의 구도를 재연한 셈이다. 때마침 남측의 전쟁 주체 유엔사의 앤드루 해리슨 부사령관(영국군 중장)은 25일 "일본과 한국이 각각 유엔사의 억제력과 군사 역량 강화에 역할을 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지난 전쟁을 갈무리하는 대신 다가올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남북이 전쟁을 기억하는 방식은 달랐다. 남측 대통령의 전쟁 상대는 북한뿐 아니라 한반도 남측의 절반이다. 지난 6월 29일 자유총연맹 연설에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시절 세계적으로 유행했던 '정체성의 정치'를 꺼내 들었다. '가짜뉴스와 괴담으로 자유 대한민국을 위협하며 국가 정체성을 부정하는 반국가 세력들'과 '자유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세력들'로 양분하며 중오와 거부의 몸짓을 내보였다.

김 위원장은 철저하게 미국을 겨냥했다. 그에게 전쟁은 "지구의 동방 일각에서 반제투쟁의 전초전을 굳건히 지키고 안아온 7·27의 기적"이자 "침략의 원흉 미제에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수치와 패배를 안기고 세계대전을 막아낸 인류사적인 대승리"이다. (25일, 참전열사묘 발언)

윤석열 대통령이 27일 유엔 참전국 정부대표단과 함께 부산 남구 유엔기념공원을 찾아 유엔군 위령탑에 헌화하고 있다. 2023.7.27.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27일 부산 중구 자갈치시장에서 장어를 손으로 잡으며 활짝 웃고 있다. 미국은 대통령포고령으로 한국전쟁에서 숨진 3만 6천여 명의 미군병사들을 추념하기 위해 백악관에 조기를 게양하는 날, 민간인을 포함해 수백만 명이 산화한 전쟁이 멈춘 날, 대한민국 대통령이 보여준 퍼포먼스다. 2023.7.28. 대통령실 연합뉴스

각국의 기밀문서가 공개된 지금, 한국전쟁의 성격은 분명해졌다. 논란의 여지가 별로 없을 정도이다. 시작과 끝은 물론 그 과정도 '강대국 정치'의 소산이었다. 남북한 지도자의 역할은 극히 한미했다. 기껏해야 행동대장에 불과했다. 남침은 '김일성 주석의 북한'이 했지만, 개전 시기를 정하고 무기와 전술을 제공했으며, 전쟁의 완급을 조정한 장본인은 요시프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었다. 마오쩌둥도 김일성 주석도 스탈린 앞에선 존재가 작았다.

북·중·러 vs 남·유엔사 구도 복원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스탈린이 만든 전장에 뛰어들었지만, 전쟁을 계기로 냉전의 세계질서를 기획, 실행할 수 있었다. 그 설계도가 NSC-68이라는 전략보고서였다. 미·소 대결이 미·중 경쟁으로 바뀌었을 뿐 지금까지 골간이 유지되고 있는 한반도 냉전구조의 출발점이었다.

한국전쟁은 강대국들의 대리전이자 제한전이었다. 한반도 거주민들은 그 틈바구니에서 죽어 나갔다. 북한군은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이후 대부분 궤멸됐다. 10월부터 유엔군에 맞서 전쟁을 수행한 주체는 중국 인민지원군이었다. "정전협정이 한창이던 무렵 북한군은 단 한 개의 제대로 된 사단도 갖지 못하고 있었다." (이문항 전 유엔군 사령관 특별고문) 한국군은 몇 개 사단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포로교환 협상 결과를 거부한 이승만 대통령의 몽니로 정전협정 서명국에서 제외됐다. 어차피 남북 모두 전시작전통제권을 외국군에 넘기고 치른 전쟁이다.

한국전쟁 정전협정 70주년인 27일 경기도 파주시 통일대교 남단에서 시민사회단체 대표자들이 한반도 평화 선언문을 낭독한 뒤 철책에 평화를 기원하는 리본을 달고 있다. 2023.7.27. 연합뉴스

남이나, 북이나 자랑스러워할 게 별로 없는, 참담한 역사의 기억인 것이다. '정전'을 '승전'으로 바꾸고, 전쟁의 모든 과정을 김일성 주석이 주도했다는 북한의 주장은 북한 내에서만 유효한 해석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의 한반도다.

북한이 정전 70년 행사를 전례 없이 성대하게 경축한 것은 과거의 승리뿐이 아니라, 현재의 승리에 방점을 놓았기 때문이다. 김 위원장은 2017년 이후 두 차례나 핵무기를 보유한 '전략국가'의 지위를 강조했다. 2017년 12월 21일 당 세포위원장대회 개막사에서 "미국에 실제적인 핵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전략국가로 급부상한 우리 공화국의 실체를 이 세상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2018년 신년 연설에서도 '전략국가'의 지위를 언급했다. 강대국 사이에 낑긴 '완충국가'에서 '전략국가'로 변모했다는 자신감은 승전일 경축 대공연에서 중국과 러시아 대표단을 양쪽에 거느리고 자리를 잡은 데서도 엿보인다.

북한이 7월 12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8형을 발사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한·미가 미국 전략핵잠함(SSBN)을 42년 만에 한반도로 불러들이자, 기다렸다는 듯이 단거리탄도미사일과 순항미사일을 발사했다. 북한과 한·미가 모두 한반도가 정전협정 체제임을 새삼 부각시키고, 앞으로도 상당 기간 그렇게 살 것임을 다짐한 것과 마찬가지다. 남이나, 북이나 엉뚱한 '자신감'으로 기세등등한 채 정전 70주년을 맞았다. 자신감과 자신감이 맞붙으면, 그 결과는 공멸뿐인 것을.

국내 6대종단 원로 종교인 33명이 26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정전협정 70주년을 맞아 '종교인 평화선언'을 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법륜 정토회 지도법사, 전병금 전 기독장로회 총회장, 도법 전 대한불교조계종 화쟁위법원장, 김희중 전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 박경조 전 대한성공회 주교원 의장주교, 이성택 전 원불교 교정원장, 박남수 전 천도교 교령 등이 참여했다. 2023.7.23. 정토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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