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칼린. 1974년부터 북한을 읽었다. 30여 차례 방북, 북한 측 파트너와 협상한 시간만 수백 시간이다. 처음엔 미 중앙정보국(CIA) 정보분석관으로, 1989년부터 2002년까지는 국무부 정보·분석국 동북아 팀장 자격으로 모든 북·미 회담에 관여했다. 수많은 정보보고서를 썼지만, 북한을 온전히 담을 수 없었다. ‘제임스 처치’라는 필명으로 <평양의 이방인(A Corpse in the Koryo)>을 비롯해 6권의 추리소설을 쓴 이유다. 아직도 북한을 읽고, 쓴다.
시그프리드 헤커. 1965년 과학도로 미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에 들어간 뒤 50년 가까이 ‘핵’을 끼고 살았다. ‘핵쟁이(nuclear guy)’ ‘기술쟁이(technique guy)’를 자처한다. 미국 핵무기 설계의 책임자이었지만 최근 30여 년 동안 본업을 배반했다. 핵무기가 사용되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헌신했다. 2004년 북한을 처음 방문했다. 이후 2010년까지 매년 영변 핵시설을 둘러보았다. 철저히 과학적, 실증적 잣대로 북핵을 다뤘다. 여든을 넘기고도 북한을 읽는다.
로버트 칼린과 시그프리드 헤커 박사가 서울을 방문했다. 지난 8일 서울 마포구 동교동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연단에 섰다. 강연 및 대담 주제는 ‘코리아에서 핵 재앙 예방하기’. 그토록 오랜 세월 북한을 읽은 그들이건만 북한이 다시 ‘미지의 신대륙’이 됐다고 입을 모았다. 절망과 좌절을 부인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희망을 말했다. 그 대강을 전한다.
먼저 연단에 선 칼린은 절망을 말했다. 그는 김일성 이후 대미 관계 정상화에 집착했던 북한이 중국과 러시아를 향하는 결정을 ‘미지의 신대륙’이라고 지칭하면서 현 단계에서 그 정체가 무엇인지, 어느 방향을 지향하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대미 관계 정상화를 최종적인 목표로 두되 그 과정에서 핵 개발 옵션을 포기하지 않으려던 지난 30여 년의 궤도에서 이탈, 전혀 새로운 궤도에 올라탔다는 것이다.
칼린과 헤커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9.13 정상회담을 ‘근본적인 정책의 전환’(포린 폴리시)이라고 짚은 바 있다. 칼린은 강연에서 그 전후 맥락을 소개했다. 칼린은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실패 뒤 변화의 첫 조짐이 보인 건 그해 12월쯤이었다고 회고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여전히 경제발전에 우호적인 외부 환경이 절박하지만, 일시적인 경제적 성취를 위해 우리의 존엄과 안보, 미래를 팔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변화를 실행하지는 않았다. 조 바이든 미 행정부가 취임한 2021년 1월에는 되레 미국과의 대화의 문을 빼꼼히 열어 두었다. 바이든 행정부가 새로운 제안을 들고나올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해 8월 미국이 20년 만에 아프가니스탄에서 굴욕적으로 철수하는 것을 본 뒤 첫 외교적 움직임이 감지됐다. 북한 외무성 누리집을 통해 대만 문제와 쿠릴열도의 영유권과 관련, 중국과 러시아의 입장을 지지하는 성명을 내놓았다. 과거에 전혀 볼 수 없었던 변화였다.
북한은 바이든 행정부 1년이 지난 2022년 1월 핵무기 및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관련, “보류했던 모든 활동을 재개한다”고 선언했다. 그해 2월 24일 발발한 우크라이나 전쟁과 무관한 결정이었다. 2018년 스스로 선언했던 모라토리엄(유예)을 깨고 3월 ICBM을 발사했다. 영변 핵시설에서도 활동을 재개했다. 대미 관여 정책의 종말이었다.
칼린은 여전히 대북 억제를 강조하는 한미 양국의 입장에 좌절감을 감추지 않았다. “억제, 억제, 억제를 말하지만, 어떤 효과를 기대하는지 의문”이기 때문이다.
이어 연단에 선 헤커는 과거의 교훈을 되새기고, 상황을 더 악화시키지 않으면서, 미래에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은 북한이 속였다는 이유로 제네바 합의를 파기했지만, 기실 “북한은 속인 게 아니라 대미 관계 정상화와 핵 개발 옵션이라는 두 개의 길(dual path)을 고수한 것”이라면서 이를 이해하지 못한 조지 부시 행정부가 첫 번째 해결 기회를 놓쳤다고 지적했다. 2.29합의를 깬 버락 오바마 행정부나, 2018년 싱가포르 합의를 이듬해 2월 하노이에서 깬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도 같은 실수를 범했다는 것이다. 세 번의 변곡점 중에서 첫 번째에는 북핵 문제 해결이 가능했지만, 이제 근본적인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현실 인식을 내비쳤다.
헤커는 2010년 영변 핵시설을 둘러본 뒤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에게 “북핵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해체(CVID)를 이제 잊고, 3가지 노(No)를 생각하라” 권고했었다고 전했다. ‘3노’는 추가 핵무기 제조, 성능 개량, 비확산 제동(No more bombs, No better bombs, No export)이었다. CVID는 13년 전에 이미 실현 가능성이 없었다는 말이다. 지난 30여 년의 과거를 돌아보면, 미국은 북핵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동결하거나, 뒤로 물릴 세 번의 기회를 모두 잃고 그때마다 상황을 악화시켰다는 게 헤커의 진단이다.
칼린과 헤커는 북한이 과거에도 그랬듯이 언젠가 다시 대화의 문을 노크할 것이라는 점을 희망의 근거로 내세웠다. 북한이 대중국 의존을 원치 않고, 여전히 경제발전을 원하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북러 관계는 우크라이나 전쟁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확대되는 것이기에 그 확장성과 지속성의 한계는 국가정보원의 판단(1일 국회 정보위 보고)이기도 하다. 헤커가 “이념적이거나 종교적이기는커녕 지극히 실용적”이라면서 "그게 우크라이나나 중동과 다른 점"이라고 말했다. "희망은 가까운 장래에 많지 않지만, 장기적으론 분명히 있다”고 역설한 까닭이다.
칼린과 헤커(80)는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96)과 함께 두 세기에 걸쳐 북한을 상대해온 미국의 대표적인 북한통이다. 페리 전 장관은 2017년 한반도 전쟁 위기 이후 일관되게 “북한 비핵화는 잊으라”고 설파해 왔다. 외교를 통해 해결할 수 있는 선을 이미 넘어섰다는 이유에서다. “외교는 여전히 필요하지만 북한이 아닌, 한국과 일본과의 외교가 먼저”라면서 “한일의 독자 핵무장을 막고, 미국 핵우산에 신뢰를 줘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4‧26 워싱턴 선언과 8‧18 캠프 데이비드 성명과 같은 맥락이다.
칼린은 이에 대한 <시민언론 민들레>의 질의에 “페리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라면서 “그러나 한국과 일본을 설득하는 게 1단계 외교라면, 2단계는 대북 외교”라고 단언했다. 역대 미국 대통령의 집권 1기, 2기의 외교 노선이 달랐던 점을 근거로 “바이든이 재선에 성공하면 착수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문제는 언젠가 대북 외교를 시작하더라도, 경기장 벤치에 선수가 없다는 점”이라면서 “기존 선수들은 모두 은퇴했기에 젊고 새로운 선수를 교육하는 게 미래 준비의 일환”이라고 말했다.
사회자(문정인 연세대 명예교수)는 “나쁜 상황이 더 나빠지고 있다”고 했다. 유감스럽지만 나는 상황이 그보다 더 나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시그(시그프리드 헤커 박사)와 내가 발견한 '신대륙' 때문이다. 미지의 신대륙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지 설명해야 할 것 같다. 우리는 신대륙의 지형은 물론 지명도 모른다. 안전한 항구가 있는지, 곡식을 재배할 수 있는 토양인지도 모른다. 북한은 오랜 검토 끝에 1990년대부터 2019년까지와 전혀 다른 전략 정책을 채택했다. 대내 정책과 외교, 군사, 안보 정책을 추진하는 새 엔진이 될 전략적 결정이다. 우리로선 그 내용을 추측조차 하기 어려운 전략이다.
김일성의 결정은 30여 년 동안 유지됐다. 미국이나 한국에서 볼 수 없는 정책의 일관성이었다. 결정은 두 개였다. 우선 북미 관계 정상화를 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새로운 환경에서 생존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적대적인 붕괴한 소련과 믿을 수 없는 중국을 상대로 충격완화 장치가 필요했다. 두 번째 역시 똑같이 중요했다. 북미 관계 정상화로 전략적으로 우호적인 외부 환경을 조성, 북한이 경제발전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30여 차례 평양을 방문, 북한 사람들과 수백 시간 동안 협상했다. 1990년대 외교적 성과를 거둔 것은 우리가 외교를 잘해서가 아니었다. 북한이 이 방향으로 움직이길 원했기 때문이다. 북한은 한 번도 쉽게 나오지 않았지만, 북미 관계 개선의 문으로 들어오도록 미국을 끌어당겼다. 이러한 정책에는 브레이크가 내부 장착(built-in)돼 있었다.
북핵 위기가 고조되던 1994년 북한은 벼랑 끝에 가까이 있었지만, 결코 벼랑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지미 카터가 중재자로 평양에 도착하기 전부터 이미 뒤로 물러설 준비가 돼 있었다. 2017년에도 심각한 긴장이 조성됐다. 김정은은 그해 3월 "올해가 외교로 되돌아올(Pivot to Diplomacy) 준비를 할지 결정할 해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벼랑 끝에서 브레이크를 밟았다. 그리곤 장기적으로 미국과 관계 개선을 한다는 할아버지의 첫 번째 정책 노선을 따랐다.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이후 김정은은 정책을 재검토했다. 평양에선 어느 방향으로 갈지를 놓고 토론이 벌어졌다. 결정의 첫 신호는 그해 12월에 나왔다. 김정은은 "물론 우리는 경제발전에 우호적인 외부 환경이 절박하지만, 우리의 존엄을 팔지 않을 것이다. 경제적 성취와 행복을 위해 안보와 미래를 양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우리의 외부 환경에 어떠한 (긍정적)변화도 없다"는 판단에서 나온 매우 중요한 성명이었다. 국내 주민을 주상대로 한 메시지였다.
2021년 1월, 조 바이든 행정부가 취임하자 북한은 약간의 협상 여지를 남겼다. 미국이 과거와 다른 제안을 들고 오길 기대했던 것 같다. 그해 8월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자 세계는 충격 속에 미국이 더 이상 강한 나라가 아니라는 인상을 받았다. 북한도 후퇴하는 미국을 보았다. 외교적 변화의 조짐은 그즈음 북한 외무성 누리집에서 발견됐다. 느닷없이 러시아와 중국을 지지하는 글이 올라왔다. 과거에 전혀 볼 수 없던 입장이었다. 매우 중요한 변화의 첫 단서였다.
2022년 1월, 북한은 "보류했던 모든 활동을 재개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관계 당국에 필요한 준비를 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미국에 다가가려던(engaging) 오랜 정책의 종말이었다. 그해 3월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발사했다. 2017년 이후 처음이었다. 영변 핵시설에서도 활동이 재개됐다. 북한은 우리가 (정찰위성 등을 통해)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2년이 지났다. 그런데도 우리는 정부 발표 등에서 끊임없이 억제(deterrence)를 말한다. 우리는 왜 "억제, 억제, 억제'를 말하나. 그게 과연 효과가 있기는 한 건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북한이 다시 문을 열고 나올 때까지 준비해야 한다. 북한은 돌연 노크하거나, 문을 밀거나, 슬쩍 문에 부딪히는 데 능란하다. 하지만 과거에 우리가 알던 방(상황)이 아닐 것이다. 북한과의 대화 탁자에 같은 사람들과 같은 의제를 배치할 수 없다. 우리는 준비가 돼 있지 않다. 북한은 우리에게 새로운 걸 바란다. 이를 이해하지 않는다면, 협상을 재개해도 곧 실패할 것이다. 실패한다면, 한국과 미국은 어떤 희망도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1965년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에 학생으로 들어간 뒤 '핵쟁이(nuclear guy)'로 살았다. 최근 30여 년 동안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처럼 핵무기가 사용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데 헌신했다. 우리는 2차대전 중 도쿄에 32만 9000개의 폭탄을 투하했다. 하지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뜨린 단 한 개의 핵폭탄이 야기한 피해는 너무 컸다. 서울에 떨어진다고 생각해보자. 다시 핵무기가 사용돼선 안 된다.
세 가지가 중요하다. 우선, 과거를 이해하고, 과거로부터 배워야 한다. 두 번째, 우리가 무엇을 하던 상황을 악화시키지 말아야 한다. 세 번째, 준비해야 한다. 첫 번째는 내가 지난해 <핵의 변곡점(Hinge Point)>이란 책을 쓴 이유이다. 몇 차례 방북했고, 그들의 핵시설을 둘러볼 수 있었다. 내가 본 것을 여러분이 보기를, 내가 들은 것을 여러분이 듣기를 원한다. 전략적 공감(strategy empathy)을 위해서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영감을 받기를 원한다. 핵시설은 중요하지 않다. 러시아는 물론 중국과 인도, 파키스탄, 영국, 프랑스의 핵시설을 방문했다. 여러분이 내가 만난 북한 사람들을 만나기를 바란다. 그들은 뿔이 달리기는커녕 지극히 전문가다웠다.
북한은 김일성 이후 외교와 핵 개발이라는 두 개의 길(dual path)을 걸었다.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추구하는 한편, 핵 옵션을 놓지 않았다. 제네바 합의가 그랬다. 북한은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뿐 아니라 플루토늄 프로그램도 포기하지 않았다. 2004년 내가 영변에서 확인한 사실이다. 우리를 속이려 했다기보다 두 개의 길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이 새로운 발걸음을 디딜 때마다 힌지 포인트, 즉 변곡점이 생긴다. 미국과 한국 정부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세 개의 변곡점이 있었다. 불행히도 우리는 매번 잘못된 결정을 내렸다. 우리는 북한이 핵 개발을 중단케 할, 취소한 뒤로 물리게 할 기회를 얻었었지만 모두 놓쳤다.
나는 기술자로 위협을 평가한다. 첫 변곡점이었던 부시 행정부 초기. 그들은 북한이 우리를 속이고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했다는 이유로 플루토늄 프로그램을 동결한 제네바 합의를 깼다. 북한이 우라늄 농축으로 핵무기를 만들려면 10년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플루토늄 핵무기는 6개월이면 만들 수 있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제네바 합의를 깼다. 큰 실수였다. 전혀 다른 접근을 시도한 오바마 행정부 역시 실수를 범했다. 오바마가 프라하에서 ('핵무기 없는 세상') 연설을 한 날 북한이 탄도미사일 1기를 발사하자 2.29 합의를 깼다. 트럼프 대통령은 재앙의 취임 첫해를 지낸 뒤 싱가포르에서 (북한에) 손을 내밀었지만, 하노이에서 뒤로 물러섰다. 또 다른 실수였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역사를 이해해야 한다.
두 번째, 상황을 더 악화시키지 말아야 한다. 변곡점마다 상황은 더 악화했다. 핵무기 1개를 만드는 데 6㎏ 정도의 플루토늄이 필요하다. 제네바 합의를 깬 결과 북한은 37년 동안 영변의 실험용 원자로를 가동, 50㎏ 정도의 플루토늄을 확보했다. 2010년 로버트 칼린과 방북한 뒤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에게 보고했다. 나는 한 번도 공직자 자격으로 방북하지 않았다. 민간인(트랙2)이었다. 북한은 우리에게 우라늄 원심분리기를 보여주었다. 클린턴 장관에게 우리가 보고 온 것을 전하면서 '3개의 노(3 Nos)'를 제안했다. 북핵과 관련해 "추가 핵무기 제조와 성능 개량, 비확산의 제동(No more bombs, No better bombs, No export)만 생각하라"고. "CVID(완전하고 검증가능한 불가역적인 핵무기 해체)는 잊으라"고, "상황을 더 악화시키지 말라"고 권고했다. (그때 이미)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세 번째 무엇을 준비할 것인가. 지금은 나쁜 상황이다. 밥 칼린이 말한 대로 북한은 미국으로부터 발길을 돌려 중국과 러시아를 향하고 있다. 방어는 중요하다. 북한의 화학무기에도 대비해야 한다. 더러운 폭탄(항공기 투하용 핵무기, dirty bomb)에도 대비해야 한다. 한미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선 연합훈련이 필요하다. 하지만 연합훈련을 광고하는 걸 보면서 과연 북한이 이를 어떻게 볼까,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까. 우리가 참수작전을 말하면 북한은 이를 도발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북한은 이념적이지도, 종교적이지도 않다. 중동이나 우크라이나와 다른 점이다. 지극히 실용적이다. 과거에 그랬듯이 입장을 바꿀 수 있다. 북한은 대중국 의존을 원치 않는다. 경제를 발전시켜 주민 생활을 개선하기를 원한다. 사람들이 나에게 희망이 있느냐고 물어오면 나는 "물론 희망이 있다"고 답한다. "불행히도 가까운 장래에는 많지 않지만, 장기적으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더욱 과거에서 배우는 게 필요하고, 상황을 악화시키지 말아야 하며, 준비돼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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