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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정동탑

<정동탑> 슈뢰더를 위한 변명

by gino's 2012. 2. 25.
[경향신문]|2005-11-08|34면 |45판 |오피니언·인물 |컬럼,논단 |1500자
이달중 독일 총리직을 내놓게 될 게르하르트 슈뢰더는 결코 성공한 정치인이라고 할 수 없다. 그의 정계은퇴와 함께 2차대전 이후 한시대를 풍미했던 '게르만 모델' 역시 사실상 종말을 고하게 됐다. 좌우 동거정부 속에서 어떤 형식으로든 변할 전망이다. 독일 경제는 밀려오는 신자유주의 물결 속에서 더 이상 높은 사회보장 수준을 유지하기 힘든 경계선에 도달한 듯하다.

헬무트 콜을 꺾고 1998년 등극했던 그는 실업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총리직을 내놓겠다고 장담을 했지만 콜의 전철을 되밟고 말았다. 콜 전총리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실업률(1994년 10.3%)의 함정을 벗어나지 못했다. 지난 9월 조기총선에 승부수를 던졌건만 그의 사민당은 기민.기사련 연합에 4석 차이로 석패했다.

그의 퇴진을 앞두고 주로 영.미 언론을 중심으로 과도한 사회보장 지출과 노동시장의 경직성을 근거로 '독일병'이라는 담론이 무성한 것은 유럽 차원에서 세계화시대 사회모델을 둘러싼 논의가 본격화하고 있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영.미식 사회모델을 유일한 대안으로 여기는 국내 보수층이 유럽식 복지의 실패 사례로 슈뢰더를 지목하고 있기도 하다. '기업 하기 좋은 세상'이 해법이라는 해묵은 주장이다. 과연 그럴까.

마거릿 대처의 손으로 '영국병'을 치유한 영국이 경제사회적으로 건강해졌다고 보는 데는 시각이 엇갈린다. 영국은 지난해 실업률을 4.7%로 묶는 눈부신 성공을 거뒀지만 국민의 상당수는 파트타임 노동자로 전락했다. 대처는 노동조합뿐만 아니라 제조업의 기반을 죽였으며 그 결과 엷어진 중산층은 원상회복하지 못했다.

슈뢰더는 신자유주의의 격류 속에서도 독일 사민주의가 지켜온 복지국가 노선을 유지하느라 고군분투했다. 기업에 대한 세금감면과 복지국가 개혁을 절충한 아젠다 2010을 발표, 전통적 지지층마저 등을 돌리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영.미식으로 한쪽을 포기하거나, 파이가 커진 다음에 해결할 문제로 미뤘다면 훨씬 쉬웠을 싸움이다.

우리에겐 슈뢰더의 7년을 더 자세히 들여다봐야 할 이유가 또 있다. 아직 많은 숙제를 남기고 있지만 통일 이후 동.서독 간의 격차를 좁히는 작업 역시 간단치 않았기 때문이다. 콜 전총리가 12% 대의 실업률을 슈뢰더에게 물려줄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는 지난달 27일 영국 햄프턴코트에서 열렸던 비공식 유럽연합 정상회의에서 고용보다는 성장을, 사회보장 지출보다는 연구.개발(R&D) 지출을 중시하는 앵글로 색슨 모델의 장점을 유럽의 공동전략으로 제시했다.

지난해 평균실업률 9.2%를 기록한 유럽연합(EU)에서 가장 성공한 블레어였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그의 주장은 큰 반향을 얻지 못했다. 되레 '병자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슈뢰더는 "세계화의 도전에 대한 올바른 대응은 보호의 축소가 아니라 그 강화"라는 말을 남겼다.

슈뢰더의 퇴진은 '통독총리'라는 후광 속에 퇴진했던 콜 전총리와 달리 소박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떠나는 그에게 박수를 쳐야할 이유는 충분한 것 같다.
김진호 국제부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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