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프전 당시 이란의 풍자잡지 '아스가르 아가' 1990년 12월호가 소개한 만평에는 두 개의 제단이 나온다. 근간(近刊) 케임브리지 이슬람사에 소개된 그림은 신의 제단 앞에서 도움을 청하는 국민들과 달리 성조기의 제단에서 기도를 올리는 걸프의 보수적인 아랍국가들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지도자들을 조롱하고 있다. 위급할 때 신보다 미국을 찾는 아랍 지도자들은 여전히 자기 종교와 자기 국민으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있다. 이를 간파한 워싱턴의 책략가들도 아랍의 수구 지도자들에게 등을 돌리고 있다.북녘 종교인들이 남녘의 교우들과 어우러져 의미 깊은 만남을 가졌던 지난 3.1절, 시청앞과 여의도를 점거한 구국반공 집회의 전열에는 일부 개신교 지도자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들은 북녘의 지도자를 '악의 세력'으로 명쾌하게 규정짓고, 부시 대통령을 자유의 수호자로, 미군을 십자군으로 치켜세웠다. 그들의 기도속에서 성조기는 영원하고, '부시 보우하사' 한반도의 평화는 지켜질 것으로 소망됐다. 부시가 독실한 신앙인이라는 게 일부 목회자들에게 형제애를 불러일으켰는지도 모른다.
분단과 독재의 오랜 질곡을 건너면서 공룡교회로 성장해온 일부 개신교 목회자들에게 민족은 어디 있느냐고 새삼 물어봐야 소귀에 경읽기가 될 성 싶다. 다만 그들이 그토록 의지하는 부시 대통령이 교회의 보편적 가치 잣대로 어떻게 평가되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올해 83세가 되는 교황 요한 바오로2세는 최근 세속정치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 "전쟁은 인간성의 패배"라는 신념에서 부시의 이라크 침공을 막기 위해서다. 교황뿐이 아니다. 12년전 걸프전 때만 해도 침략자 이라크에 대한 응징을 지지했던 전세계 기독교단은 일제히 돌아섰다.
성서(聖書)적 어휘를 자주 들먹이는 부시의 미국 교회는 가장 적극적이다. 미 교회협의회(NCC)를 비롯해 미국내 6천4백만 개신교 신자와 5천만 가톨릭 신자들의 공식대표들은 지금 바그다드를 거쳐 파리와 런던, 베를린을 순례하며 "반전"을 전파하고 있다. 부시의 미국 연합감리교회도 포함된다. 하지만 백악관은 미국 종교지도자 50명이 지난 1월30일 제기한 대통령 면담 요청에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메시아적인 비전'(NYT 칼럼니스트 크리스토프)으로 전쟁을 획책하는 부시로서는 딱하게 됐다. 대를 이어 교회의 공개심판을 받는 꼴이 됐기 때문이다. 아버지 부시 전 대통령은 걸프전을 앞두고 미국 성공회 주교에게 축복을 요구했다가 "신의 뜻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거절당한 바 있다.
이라크와 북한은 다르다고, 부시가 이라크에서 사탄 역할을 할지라도 한반도에서는 천사가 될 수 있다고 강변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부시 행정부가 공공연히 후세인 다음으로 손볼 대상으로 꼽고 있는 인물은 불행히도 김정일 위원장이다. 핵 선제공격 후보에 한반도를 우선순위로 올려놓았다. 북녘 땅에 미국의 가공할 만한 대량살상무기가 떨어지면 남녘도 아마겟돈의 참상을 면치 못한다는 사실을 정녕 모르는 것일까. 그래서 더욱 부시에게 매달려야 한다고? 그렇다면 두고 보자. 부시가 전세계 교회의 공개비난을 수용해 이라크 침공을 포기하는지를.
박정희 이후 군사독재자들과 달콤한 밀월을 해 온 일부 개신교 목회자들은 공교롭게도 아랍의 봉건.독재 지도자들과 닮은 점이 있는 것 같다. 아랍 지도자들이 미국을 좇는 이유는 세속적인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세계가 안다. 강자보다 약자를, 배부른 자보다 배곯는 자를 섬기는 이 땅의 많은 기독교인들은 일부 목회자들이 부시를 좇는 이유도 기득권 수호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것도 '신의 이름'으로.
북한과 미국을 함께 겨냥해 핵없는 한반도, 전쟁없는 한반도를 촉구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의 3.1절 성명이 그나마 한줄기 희망의 메시지를 준다. '평화가 강물처럼' 흐르기를 기원하며 남편과 어린 아이들을 두고 바그다드의 방패를 자원한 한 한국 기독교인의 기도는 우리를 숙연케 한다.
김진호 국제부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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