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2006-01-10|30면 |45판 |오피니언·인물 |컬럼,논단 |1590자 |
러시아의 대 우크라이나 천연가스 수출 중단 사태를 바라보면서 한편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북한 핵위기로 4년째 미적거리고 있는 한반도 상황과 중첩돼 보였기 때문이다. 저변에 깔린 지정학적 사정이 어떻든 간에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천연가스 가격 문제로 촉발된 위기를 가격 협상으로 풀었다는 사실이다. 유라시아 대륙 동서 양쪽에서 진행중인 두개의 이슈는 에너지와 안보, 또는 두가지를 아우르는 '에너지 안보'라는 점에서 같은 뿌리를 갖고 있다. 러시아가 1월1일을 기해 파이프라인을 잠근 것은 분명 도발이었다. 냉전시절에도 없었던 일이다. 사태는 경제 논리와 정치 논리가 얽히면서 복잡한 양상을 보였다. 러시아는 오렌지 혁명으로 집권한 유셴코 정권의 친 서방 노선에 신경이 거슬렸을 법하다. 우크라이나는 가급적 가스값을 '특혜 가격'에 가깝게 묶어놓은 채 국가병탄과 학살의 과거를 안겨준 러시아로부터 멀어지려고 했던 것 같다. 서방 언론은 물론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까지 나서 러시아의 정치적 의도를 질타했지만 기실, 일석이조를 노린 것은 우크라이나도 마찬가지다. 물론 푸틴의 러시아가 추구한 에너지 패권은 우려할 만한 수준이다. 그럼에도 분명한 사실은 두 나라가 또, 그 너머 유럽이 파이프라인으로 여전히 연결돼 있으며, 이를 철거하지 않는 한 문제가 생길 때마다 무릎을 맞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자원대국 러시아가 칼자루를 쥔 것 같지만 꼭 그렇지 않다. 우크라이나와 유럽이 러시아의 에너지에 의존하고 있듯이 러시아 역시 에너지를 수출해야 할 절실한 필요가 있기에 협상은 늘 가능하다. 세계화된 시장에서 소비자의 신뢰를 잃게 될 경우 그 피해는 자신에게도 돌아간다. 러시아가 파이프라인을 사흘 만에 다시 튼 이유다. 불행히도 유라시아 동쪽의 사정은 이와 같지 않다. 2002년 10월 북핵 위기가 불거지고 한동안 북한 영토에 파이프라인을 놓아 사할린 유전의 천연가스를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북핵문제를 해결하자는 아이디어가 제기됐지만 어느 틈에 사라졌다. 파이프라인은 고사하고 2백만㎾의 송전선을 휴전선 너머로 놓자는 '중대 제안'마저 중요성을 잃고 있다. 에너지 문제를 에너지로 풀려 했던 함경남도 금호지구의 신포 경수로공사 현장도 미국의 몽니로 끝내 문을 닫았다. 떠나는 남도, 보내는 북도 아쉬워했다는 전언이다. 러시아 정부는 에너지 수출의 76%를 유럽에 보내고 있지만 2015∼2020년 자국 석유의 주요 생산지역으로 동시베리아와 극동지역을 꼽고 있다(한국석유공사 2002년 분석). 한반도 역시 러시아의 자원 영향력 권에 들어갈 날이 머지 않았다. 그 전에 러시아와 남북한이 에너지 가격을 놓고 맞짱 뜨게 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러시아가 시장 상규에 어긋나게 한반도행 천연가스 값을 느닷없이 4배 올리겠다고 하면 곤란하겠지만 기껏해야 협상 테이블 위에서 해결할 문제다. 파이프라인의 국제정치학은 때로 분쟁의 씨앗이 되지만 동북아에서는 공존의 시대를 여는 조건이 될 수도 있다. 러시아가 우리의 동맹국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적어도 에너지와 안보를 빌미로 여전히 불안정한 체첸에 '제2의 자이툰'을 파병하지 않으면 한반도 평화가 흔들릴 것이라는 '협박'을 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기에. 김진호 국제부 차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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