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추상같은 지시'가 1년 가까이 이행되지 않고 있다. 다른 사안도 아닌, 국토 방어와 국민 안전에 직결되는 문제이건만 갈수록 말만 다채로워진다. 9.19 남북 군사합의의 효력 중지 또는 파기를 둘러싸고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그 이유를 추적해 보면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단면이 드러난다. 무슨 이런 나라가 다 있나, 싶다.
대통령이 2018년 남북 간 9.19 합의의 효력 정지를 검토하라고 지시한 건 지난 1월 4일 국가안보실·국방부·합참·국방과학연구소로부터 북한 무인기 대응 전략을 보고받는 자리에서였다. 대통령은 "북한이 다시 우리 영토를 침범하는 도발을 일으키면 9.19 군사합의 효력정지를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대통령실은 이틀 뒤 군사합의 효력이 정지되면 군사분계선 일원에 대북 확성기 설치와 운영이 재개된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지시 10개월이 지난 시점에도 국방장관은 여전히 "즉각 이행하겠다"는 말을 하지 않고 있다. 신원식 국방장관은 19일 한국방송 '일요진단 라이브'에 출연, "북한이 이달 말 정찰 위성을 발사하면 9.19 군사합의 효력 정지를 위한 논의를 빠르게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신 장관은 "효력정지는 외교안보부처와 조율해야 하고,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공포해야 한다"면서 "구체적인 절차에 들어간 것은 아니어서 앞으로 논의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9.19 군사합의는 남북이 지상, 해상, 공중을 비롯한 모든 공간에서 군사적 긴장과 충돌의 근원이 되는 일체의 적대행위를 전면 중지하기로 한 것이다. 북측의 위반 사례가 있었지만, 2000년 이후 18년 동안 505건이던 북한의 침투 및 국지도발이 합의 뒤 단 두 차례에 그쳤다. 그럼에도 정부가 효력정지를 검토한다면 이유가 있을 터.
지난 2월 국방백서에 따르면 북측은 이후 17차례 합의를 위반했다. 침투 또는 국지도발과 비교하면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킨 정도가 다르다. 이중 해상완충구역 내 포병 사격이 14차례로 대부분이고, 북방한계선(NLL) 이남 해상완충구역 내에 북한 미사일이 떨어지거나, 중부전선 우리 측 감시초소(GP) 총격을 가한 사례가 각각 한 차례 있었다. 마지막이 북한 소형무인기 5대가 서울 북부와 인천시 강화 일대를 침범한 사례다. 이중 대통령의 지시가 직접 관련된 것은 작년 무인기 침범이다. 여기서 첫 번째 의문이 제기된다. 대통령 지시는 '북한이 다시 우리 영토를 침범하는 도발을 일으키면'을 전제한 것이다. 군사위성 발사와 '영토 침범'은 상관이 없다. 또 과연 진지한 지시였는지도 의문이다.
합참이 북한 무인기가 김포 상공을 통해 침범했다면서 대처 명령을 내렸다고 밝힌 건 12월 26일 오전 10시 25분. 김포, 인천공항의 민항기 이륙이 각각 62분, 48분 중단되고, "대피하라"는 서울시의 재난문자 오발송으로 1000만 시민이 공포에 떨었다. 그러나 군 통수권자는 24시간이 지나도록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대통령실은 "국가안보회의(NSC)를 소집할 사안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국민은 불안한데 대통령과 대통령실은 여유로운, 희한한 상황이 벌어졌다. 대통령은 다음 날 오전 수석비서관 티타임에 은퇴견 새롬이를 선보였다. 9.19 합의 재검토 지시는 이로부터 1주일 뒤 갑자기 나왔다.
어찌 됐든 군 통수권자의 지시는 막중하다. 그런데 10개월 넘게 검토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북한의 군사위성발사 또한 올해 2차례 있었다. 그런데도 굳이 3차 발사에 맞춰 효력정지를 검토한다는 국방부 장관의 말은 또 무엇인가. 정부나 군 고위관계자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대통령의 지시 사항을 자기 생각인 양 되새겼다. 생뚱맞게 남북 대화를 맡은 김영호 통일부 장관이 지난 6월 파기 필요성을 언급한 데 이어 신 장관도 9월 취임과 동시에 "반드시 폐기되는 게 바람직하다"고 복창했다. "비행금지구역 설정이 북한군 장사정포 등 군사표적에 대한 우리 군의 감시, 정찰 능력을 제한한다"는 이유에서다. 10·7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기습공격하자 또 다시 9.19 합의를 탓했다. 사흘 뒤 "예컨대 비행금지구역 같은 것들은 북한의 임박한 도발 징후를 실시간 감시하는데 굉장히 제한돼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한국방송 간담회에선 왜 갑자기 "효력정지도 절차가 있는 문제"라면서 추가 논의가 필요한 것처럼 뜨뜻미지근한 말을 내놓았을까. 이 대목에서 군 수뇌부 유전자에 깊이 각인된 '대미 추종' 본능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9.19 합의'는 남과 북이 각각 주권국으로 맺은 것이다. 효력중지 또는 파기는 각각이 결정할 문제다. 합의 제6조는 "쌍방이 발효에 필요한 절차를 거쳐 문본을 교환한 날로부터 효력이 발생한다"고 명시했지만, 파기 절차를 명시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생뚱맞게 한미 간 협의사항이 됐다. 그것도 미 측의 주무장관도 아닌,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이 '누설'했다. 지난 9일 서울에서 한미 외교장관 회담 공동기자회견 자리에서 "한국과 북한 간 합의지만, 오늘 논의에서 다뤄졌다"라면서 "이번 주말 방한하는 오스틴 국방장관과 관련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때부터 국방부 고위관계자들은 11·13 한미 연례안보협의회의(SCM)에 앞서 "동맹 현안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9.19합의가 다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제55차 SCM 공동성명에 그 내용은 포함되지 않았다. 로이드 오스틴 장관은 회의 뒤 공동기자회견에서 "의견을 나눴고, 어떻게 해결할지 긴밀하게 협의하기로 했다"고 답했다. 한미 간 협의 사안임을 못 박은 것이다. 당초 대통령의 효력정지 검토 지시도 의아하지만, 이를 10개월 넘게 끈 뒤에도 여전히 미국에 물어봐야 하는 사안이 된 과정도 의아하기 짝이 없다.
'9.19 합의' 관련 입장은 2019년 제51차부터 윤석열 정부 첫 SCM인 지난해 제54차 공동성명에 담겼었다. 국가 간 회담의 결과문은 양측이 합의한 내용과 한 측이 일방적으로 말한 내용을 구분해 싣는다. 주어가 다르다. 후자는 상대측이 동의하지 않았음을 말한다. 51차~53차 SCM 공동성명은 '양 장관'을 주어로 "한반도에서의 우발적 충돌 방지에 효과적으로 기여하고 있다는 점에 공감한다"는 식으로 기술했다. 제54차 공동성명에선 '양 장관'이 사라진 대신, '한명의 장관'이 등장했다. "이종섭 장관은 북한의 반복적인 방사포 사격 등 '9.19 군사합의' 위반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3항)." 오스틴 장관은 공감하지 않은 우려 표명이다. 왜일까. SCM 공동성명은 '힘에 의한 평화'만을 담는 문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해 한미가 취해야 할 조치로 3가지를 적시한 올해 55차 성명 5항을 보자. △동맹의 압도적인 힘과 △대북 제재와 압박과 함께 △대화와 외교를 추구하는 노력 등 3가지를 강조했다. 미국이 섣불리 9.19 합의의 효력정지에 동의하지 않은 것은 대화와 외교를 펼칠 '여지'를 놓지 않으려는 이유에서일 것이다. 대한민국 대통령의 지시를 미국의 일개 장관이 묵시적으로 거부한 건 결코 유쾌하지 않은 한미관계의 현실이다. 그러나 미국이 거부한 명분은 고개가 끄떡여진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이유다.
SCM 공동성명에는 '두 장관'이 아닌, 한국 측 장관만을 주어로 하는 다른 한 문장이 약방의 감초처럼 매번 포함된다. 국제법적으로 효력이 없건만 한국군 수뇌부가 집요하게 강조하는 NLL 문제이다. 이번 55차 성명에도 "신원식 장관은 NLL이 남북 간의 군사력을 분리하고, 군사적 긴장을 예방하는 효과적 수단이라는 한국의 입장을 전달했다(5항)"라고 기술했다. 윤석열 정부의 9.19 합의 효력정지 방침이 적나라하게 모순을 드러내는 또 다른 대목이다.
역대 우리 국방장관은 NLL의 군사력 분리 및 긴장 예방 효과를 강조해 왔다. 9.19 합의는 '해상'뿐 아니라 '지상'과 '공중'을 포함한 모든 공간을 군사력 분리 및 긴장 예방의 대상으로 한다. 해상 안정을 가져온 NLL이 필요하다면서, 육‧해‧공의 안정이 담보된 9.19는 효력 정지하겠다는, 얼토당토않은 말이다. 또 NLL이 효과적이었다면, 세 차례 서해 교전은 왜 일어났나.
9.19 합의를 둘러싸고 연초부터 대한민국에서 진행된 것은 대통령의 한마디에도 불구하고 "효력 정지는 안된다"고 말할 소신 있는 장군이나 장관을 단 1명도 보유하지 못한 나라, 그마저도 미국과 의논해야 결정할 수 있는 나라에서만 벌어지는 지독히 볼썽사나운 블랙코미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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