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여정 북한 당중앙위 부부장의 2일 담화가 깊은 동면에 들어간 남북관계를 새삼 일깨운다. 드디어 윤석열 대통령의 진가를 확인했다면서 단순히 감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남측 대통령을 공개 '찬양'했다. 북한 '최고존엄'이자 친오빠인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지론인 '참신한 선전선동론'의 과감한 실천이자, 조선노동당 '대남 대변인'으로서 화려한 변신이 아닐 수 없다.
그는 2일 자 담화에서 자신이 생각을 고쳐먹게 된 계기로 윤 대통령의 1일 신년연설의 한 대목을 꼽았다. "올해 상반기까지 증강된 한미 확장억제 체제를 완성해 북한의 핵 미사일 위협을 원천봉쇄할 것"이라는 다짐과 "북한의 핵 미사일 위협에 대비해 한국형 3축 체계를 더욱 강력히 구축하는 데 속도를 낼 것"이라는 말이다. 그는 "가뜩이나 어수선한 제 집안에 '북핵, 미사일 공포증'을 확산시키느라 새해 벽두부터 여념이 없는 그(윤 대통령)에게 인사말 겸 지금까지 세운 '공로'를 '찬양'해주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고 털어놓았다.
'공로'의 내용은 역설적이다. "지금 조선반도의 안보 형세가 당장 전쟁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매우 위태롭게 되고 안보 불안이 대한민국의 일상사가 된 것은 전적으로 윤석열 대통령의 '공로'"라는 평가였다.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기회 있을 때마다 험한 말로 남측을 비난해 온 그가 이리 '따뜻한 덕담'으로 새해를 연 것은 처음이다.
"입 가진 사람마다 비난을 퍼붓고 있지만 나는 찬양하고 싶다"라면서 "이 인간이 시종 '힘에 의한 평화'를 떠들고 확장억제력 증강과 한미 합동군사연습에 몰념하여 대한민국의 운명을 백척간두에 올려놓은 것"을 '찬양'받아 마땅한 치적으로 꼽았다.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역발상이 아닐 수 없다. 뒤이어 "야유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진심으로 하는 말"이면서 공연한 오해를 막으려는 세심함까지 보였다.
달을 보라 하는데 달을 가르치는 손가락만 보지 말 일이다. 손가락이 달라졌을 뿐 '달의 현상'은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중언부언 탓에 풍자의 생명인 간결미가 없어 아쉬움을 남긴다.
그가 윤 대통령의 '능력'과 '공로'를 인정하고, '특등 공신'으로 '찬양'하게 된 연유는 무엇일까. 우선 미국의 핵전략자산을 끌어들여 대한민국을 '목표판'(과녁)으로 만들고, 때 없이 북한의 '정권종말'과 같은 위협을 입에 달고 살아 온 것을 고맙게 여겼다. 무차별적인 각종 규모의 합동군사연습을 확대 강화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주적'인 자신들의 분노를 최대한 끌어 올리고, 서울을 겨냥한 '방아쇠'의 안전장치를 풀게 한 '능력'은 누구나 소유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기자가 10여 차례 방북 취재를 통해 깨달은 남북 간의 역설적인 화법은 김 부부장의 풍자를 해석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남측 취재진을 표독스레 대한 북측 관계자를 괴롭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되레 그를 "훌륭한 사람"이라고 공개적으로 상찬하는 것이다. 북한은 남북 당국 간 회담이건 이산가족 상봉행사이건 행사 뒤 '총화'를 한다. 총화 시간에 남측으로부터 칭찬을 받은 이는 역으로 비판의 대상이 된다.
남측 정부가 대북 화해협력을 주창하건, 적대적이건 중요하지 않다. 상호 불신을 걷어내지 못한 분단 체제에서 생즉사, 사즉생의 역설은 통용돼 온 어법이기 때문이다. 김 부부장이 한껏 남측 대통령을 띄워놓고 남측에서 비난받을 것을 앞당겨 염려하는 대목에서 떠오른 기억이다. "안보를 통째로 말아먹은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비난이 그쪽 세상(남측)에서 장차 더해질 것이 뻔하지만 우리에게는 자위적이며 당위적인 불가항력의 군사력을 키우는 데 단단히 '공헌'한 '특등 공신'이기 때문"이다. 그의 말대로 "입에는 꿀을 바르고 속에는 칼을 품은 흉교한 인간보다 적의를 가감 없이 드러내는 우직하고 미련한 자를 대하기가 훨씬 수월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김 부부장이 윤석열 정부의 소신이 옳았음을 인정하는 대목에선 '남북 합작'의 의혹까지 생긴다. 그가 '자유민주주의 체제하의 통일'을 염불처럼 떠들어 '민족의 화해 단합'과 '평화통일'과 같은 환상에 눈이 흐려지지 않게 각성시킬 수 있었다고 말한 대목에서다. "우리를 침략하려는 적의 선의를 믿어야 한다는 허황된 가짜 평화 주장"을 질타하고 "조직적으로 지속적으로 허위 선동과 조작, 그리고 가짜뉴스와 괴담으로 자유 대한민국을 흔들고 위협하며 국가 정체성을 부정하는 세력"과의 전쟁을 다짐한 윤석열 대통령의 지난해 6월 28일 자유총연맹 창립 축사를 연상시키지 않는가.
김 부부장의 문재인 정부 비난 역시 윤석열 정부의 전 정부 비난과 붕어빵이다. 다만 윤 정부와 관점이 달랐다. 그는 문재인 대통령을 "참 영특하고 교활한 사람"이었다면서 "어리숙한 체하고 우리에게 바투 달라붙어 평화 보따리를 내밀어 우리의 손을 얽어매어 놓고는 돌아앉아 네가 챙길 것은 다 챙겼다"고 지적했다. "특유의 어눌할 어투로 '한 핏줄'이요, '평화'요, '공동번영'이요 하면서 살점이라도 베어줄 듯 간을 녹여내는 그 솜씨가 여간이 아니었다"라는 평가도 덧붙였다. 구체적인 실례로 북한에는 핵·미사일 발사 시험의 금지를 간청하고, 돌아서서는 F-35A 전투기 수십 대를 반입하고 여러 척의 잠수함을 취역시켰으며, 미사일 사거리를 제한한 한미 미사일협정의 완전 철폐를 밀어붙인 점을 들었다.
"돌이켜 보면 참으로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고, 진짜 안보를 챙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고 인정하는 대목에서 다시 분단과 불신이 낳은 남북 간의 어법이 떠오른다. 생즉사, 사즉생의 역설에 따르면 북이 칭찬한 윤 대통령이 틀렸고, 비난한 문 대통령이 옳았다는 말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는 "(제2의 문재인이 아닌) 무식에 가까울 정도로 '용감한' 윤석열이 대통령 권좌를 차지한 것은 우리에게 두 번 없는 기회"라며 "문재인 때 밑진 것을 열 배, 스무 배 아니 그 이상으로 봉창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문재인 정부 때인 2018년 9·19 남북 군사합의안 파기의 명분을 만들어 준 현 정부에 대한 감사도 잊지 않았다. "먼저 9.19 합의 조항을 만지작거려 주었기에 휴지장 따위에 수년간이나 구속당했던 우리 군대의 군사 활동에 다시 날개가 달리게 됐기 때문"이다.
김 부부장의 독특한 담화는 그러나 일시적인 충동에서 나온 게 아니다. 당국가 체제인 북한에서 당의 입장 발표문을 즉흥적으로 쓴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 뿌리는 김정은 위원장이 2019년 3월 9일 내놓은 '참신한 선전선동'에 닿아 있다. 김 위원장은 우리의 공보전문가 격인 제2차 전국 당 초급 선전일꾼 대회에 보낸 서한에서 '새로운 투쟁'의 방법론으로 제시했다. 특히 "하나의 구호를 게시하고 한 건의 선전선동자료를 침투해도 비현실적이고 과장된, 요란한 표현으로 분식할 것이 아니라 인민이 선호·인정·호응할 수 있게 진실성과 통속성을 보장하는 게 중요하다"고 지적한 대목에 정확히 부합한다.
뻔한 말을 재미있게 하는 게 선전의 정수다. 북한은 핵전력을 대폭 증강한다고 하고, 남한은 미국과 핵무기 전개 훈련을 예정하고 있다. 올해도 한반도 안보상황은 험로가 예상된다. 그 와중에 나온 김 부부장의 풍자가 한반도의 현실을 되레 분명하게 돋을새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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