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족 관계건,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이건 남북은 체제가 다르다.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 이성준 합참 공보실장(대령)은 8일 정례브리핑에서 "북한이 지난 3일 연속 포병 사격을 실시한 만큼 적대행위 중지구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못을 박았다. 이 실장은 거듭된 언론의 질문에 '적대행위 중지구역'이 무효가 됐음을 거듭 확인했다. 9.19 남북군사합의의 전면 파기를 선언한 것이다.
9일 자 조간신문 대대적 보도
9일 자 여러 조간신문이 1면 머리기사로 대대적으로 보도한 근거다. 이런 뉴스를 접한 국민은 9.19 합의가 정부 차원에서 파기됐다고 받아들였을 것 같다.
물론 9.19 합의는 사실상 무효가 됐다. 우리 측이 지난해 11월 22일 군사분계선 일대 '비행금지구역'에 대해 일부 효력 정지를 선언하고, 북한 국방성이 다음날 성명에서 "지상·해상·공중에서 중지했던 모든 군사적 조치를 즉각 회복한다"고 선언함에 따라 사실상 파기됐다. 윤석열 정부는 이로써 1974년 7·4 공동성명 이후 남북 간 합의를 먼저 깬 첫 번째 정부가 됐다.
그러나 파기하더라도 적법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 그게 우리가 북한과 다른 점이다. 우리 정부가 달포 전 일부 효력 정지를 결정한 과정과 합참이 8일 '적대행위 중지구역 파기'를 발표한 과정은 확연히 달랐다.
11월 22일 한덕수 국무총리는 영국 출장 중인 대통령을 대신해 임시국무회의를 소집했다. 소집 이유는 북한의 군사정찰위성 3차 발사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엉뚱하게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한 9.19 합의 1조 3항에 대한 효력 정지를 추진한다고 발표했다. 국가안보회의( NSC)도 거쳤다. 남북 국방부 장관이 2018년 체결한 합의문에는 일부 효력 정지 또는 파기 절차에 관한 규정이 없다. 대신 통상적인 국가 간 협정 내용의 변경 절차를 준용, 적법한 절차를 밟았다.
권한 위임 사실 밝히지 않는 합참
신원식 국방장관은 언론의 사전 질문에 "절차가 있는 문제"라고 강조했었다. 이번엔 합참 대변인이 정부 차원의 결정을 발표했다. 그는 어떤 권한을 위임받았을까.
아무리 합참 대변인이라고 해도 일개 대령이 합당한 권한을 위임받았음을 밝히지 않은채 합의 파기를 선언하는 것은 정상적인 민주주의 국가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다못해 인민공화국인 북한도 '국방성 성명' 형식으로 정부의 방침을 발표했다.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9일 오전 정례 국무회의를 기다렸다. 사후에라도 공식 발표가 나올 수 있어서다. 헛된 기대였다. 대통령이 주재한 국무회의에서는 9.19 합의 파기 문제가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국방부도, 정부도 어떠한 공식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예상대로 9일 국방부·합참 브리핑에서 언론의 질문이 제기됐다. "어제 군에서 9.19 군사합의 전면 파기를 선언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게 맞느냐. 작년 11월처럼 국무회의 의결이나 이런 절차를 거쳐야 하는 게 아닌가"라는 질문이었다. 이에 국방부 당국자는 "9.19 군사합의 전면 파기 관련해서는 우리가 답할 사안이 아닌 것 같다. 관련 부처 간 필요한 논의나 협의가 필요한 사안이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거꾸로 돼도 한참 거꾸로 된 답변이다.
발표 내용은 사실상 전면 파기
8일 합참 공보실장의 발표는 "적대행위 중지 구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단언이었다. 9.19 합의에 '적대행위 중지구역'이라는 표현은 없다. 다만 합의문 1조에 ‘남과 북은 지상과 해상, 공중을 비롯한 모든 공간에서 군사적 긴장과 충돌의 근원으로 되는 상대방에 대한 일체의 적대행위를 전면 중지하기로 했다’고 규정했다. 국방부는 9일 브리핑에서도 분계선 5㎞ 이내에서 대규모 연대급 기동훈련이나 포병사격훈련 또 해상훈련 등이 제한받았던 부분이 해소된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먼저 효력 정지한 비행금지구역에 더해 육상과 해상의 제한이 해소됐다는 말은 바로 전면 파기를 뜻한다. 그런데 뒤늦게 "관련 부처 간 필요한 논의나 협의가 필요할 사안으로 생각한다"는 답변은 뭔가. 정리하면 8일 합참 공보실장을 통해 덜렁 선언하고, 조간신문들이 이를 대대적으로 전파했는 데, "(하루 지나 생각해 보니)논의나 협의가 필요한 사안인 것 같다"는 말이다.
합참 공보실장은 9일 '어떠한 권한을 위임받아 어제 브리핑에서 그렇게 발표했느냐'는 <시민언론 민들레>의 질의에 "필요한 절차를 거쳤다"면서도 '합참이나 국방부, 정부 차원에서 거친 절차냐'는 추가 질문에 같은 답변만 되풀이 했다. '추가 확인 뒤 답을 달라'는 요청에도 응하지 않았다.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를 "모든 국정의 중심을 국민에게 두고 따뜻한 정부, 행동하는 정부가 되겠다"는 말로 시작했다. 무슨 이런 합참, 이런 국방부, 이런 정부가 다 있나.
무슨 이런 정부가 다 있나
한반도는 전시가 아니다. 그렇다고 평시도 아니다. 북한이 지난 30일 당중앙위 제9차 전체회의 결정으로 남북관계를 '적대적인 두 국가, 교전 중인 두 국가 관계'로 규정하고 나선 마당이다. 1992년 2월 19일 남북기본합의서에 규정했던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를 31년 만에 뒤집었다. 우리 육군이 1월 1일부터 포사격을 시작했고, 북측이 5일부터 연 사흘간 서해 포사격을 한 상황이다. 전쟁을 해도 대한민국은 헌법 제1조 제1항에 규정된, '민주 공화국'으로 싸워야 한다. 정부 결정의 기본적인 절차조차 생략 또는 무시하는 이런 꼴로는 제대로 된 국가는커녕, 제대로 된 교전국도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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