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 아침 밥상이 중요하듯, 군사분계선 부근의 분위기도 허투루 넘길 일이 아니다. 한해살이의 앞날을 누구도 예견하지 못할지언정 정초엔 불온함을 멀리하는 게 한반도 거주민의 오랜 풍습이다. 그런 점에서 2024년을 시작하면서 남과 북이 '말의 전쟁'에 이어 내보인 '결기'는 그리 좋은 징조가 아니다. 남북의 새해 첫 '상차림'을 면밀하게 봐야 하는 이유다.
북 200발, 남 400발
남북이 포격전으로 새해를 열었다. 합동참모본부는 5일 "북한군이 오늘 09시쯤부터 11시쯤까지 백령도 북방 장산곶 일대와 연평도 북방 등산곶 일대에서 200여 발의 사격을 실시했다"고 발표했다. 다행히 우리 군과 국민의 피해는 없었다. 탄착점이 북방한계선(NLL) 북쪽이었기 때문이다. 군사적 목적이라기보다 일종의 경고 성격을 띤다고 볼 수 있다.
우리 군도 이날 오후 3시쯤부터 K9 자주포 등의 해안포를 대응 발사했다. 역시 경고 성격이었다. 다만 '비례 대응'의 범주를 넘었다. 북측이 발사한 포탄의 두 배가량인 400여 발을 발사했기 때문이다. 국방부 당국자는 <시민언론 민들레>에 "우리도 6년 만에 처음으로 해상완충해역에 포사격을 했다"면서 이같이 전했다. '해상완충해역'은 이제 의미가 없는 말이다.
남북은 2018년 9.19 남북군사합의(1조 2항)에 따라 서해 남측 덕적도~북측 초도까지의 해역에서 포사격 및 해상 기동훈련을 중지키로 했다. 하지만 지난해 11월 22~23일 남측의 비행금지구역 일방 효력 정지에 이은 북측의 합의 전면 파기로 무용지물이 됐다. 6년 만에 달라진 건 남북 군 당국이 해상완충해역에 갈마들며 포사격을 한 데 그치지 않았다. 백령도, 연평도 주민들까지 14년 전의 악몽을 떠올려야 했기 때문이다.
인천시 옹진군 연평면사무소와 백령면사무소는 낮 12시 13분쯤 안내방송을 통해 주민들에게 대피령을 내렸다. 주민들은 가까운 대피소로 피했다가 오후 3시 46분쯤 대피령이 해제된 뒤에야 집으로 돌아갔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3시간 30분 동안 연평도 주민 2100명 중 495명이 대피소 8곳에 분산됐고, 백령도 주민 4800여 명 중 269명과 대청도 주민 36명이 대피해야 했다.
주민 20%만 대피
북한이 포사격한 해역은 연평도, 백령도로부터 수십㎞ 떨어진 곳인데 주민들이 왜 대피해야 했을까. 또 왜 전체의 20%도 안 되는 주민만 대피시켰을까. 국방부 당국자는 "북한이 해안포를 쐈기 때문에 주민을 대피시킨 게 아니라, 연평도 포격 때처럼 우리 군의 해안포 사격을 빌미로 북한군이 연평도를 포격할 수 있어서 대피령을 내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우리 군이 백령도와 연평도 북측 수역으로 해안포 사격을 했다는 건 남측의 완전한 억지 주장이며, 대피와 대응 사격 놀음을 벌인 것 역시 상투적인 수법"이라는 북측 인민군 총참모부의 보도도 틀렸다. 그야말로 상투적인 대남 선전전일 뿐이다.
우리 정부와 보수언론은 9.19 합의 일부 효력 정지를 두고 분계선 인근 상공에서의 대북 정찰을 재개하게 됐다며 '안보의 정상화'라고 평가했다. 틀린 말이 아니다. 5일 서해에서 벌어진 일은 남북 군이 무력시위를 하고, 그 탓에 주민이 불안에 떨어야 하는 긴장이 '일상화' 된 첫 신호이기 때문이다. 악몽의 재연을 바라지 않았다고 해도, 이를 내다보지 못한 책임은 분명히 규명해야 한다. '9.19 합의 전면 재검토'를 지시한 대통령과, 일부 효력 정지가 "1조 원의 이익이 있다면, 그로 인한 손실은 1원"이라고 호들갑 떠들었던 신원식 국방장관에 책임의 일단이 있다는 말이다. 국민이 안보 불안으로부터 자유롭도록 보장하는 안전장치는 돈으로 가치를 따질 수 없다.
9.19 일부 효력정지가 초래한 '긴장의 일상화'
기실 새해 아침 첫날 포문을 연 건 남측이었다. 1일 육군 각급 부대는 새해를 실사격 훈련으로 시작했다. 제3 포병사단 예하 백골 포병사단은 강원도 철원 문혜리 포격사격장에서 K9, K55A1 자주포 18문을 동원해 150발을 쐈다. 강원 양구에서는 1월 1일 사격에 급급했던지, 사전 홍보조차 하지 않은 탓에 새해 첫날 주민들을 놀라게 했다. 강원도민일보는 양구군 동면 팔랑 1리 포 사격장에서 느닷없이 실시된 박격포 사격 훈련 탓에 놀란 주민들이 해당 부대로 몰려가 항의했다고 2일 전했다.
한 군사전문가는 <민들레>에 "육군의 혹한기 훈련은 매년 하지만 장병들이 하루 쉬는 1월 1일부터 사격을 한 것은 지극히 이례적이다. 정치적 메시지가 담겼다고 본다"고 말했다. 우리 군은 1일부터 연일 주둔지와 작전지역 안에서 자주포와 전차, 공군 항공, 화포, 차량 등을 동원해 사격 훈련을 하고 있다. 국방일보에 따르면 해군은 3일 동·서·남해의 1·2·3함대 해역에서 올해 첫 해상기동훈련과 함포 사격훈련을 동시에 전개했다. 구축함을 비롯해 함정 13척과 항공기 3대가 참가했다.
북한의 해안포 사격 훈련은 9.19 합의 이전만 해도 일상적으로 벌어졌다. 그때마다 우리 군도 대응 사격을 해왔다. 그 끝에 발생한 유혈 충돌이 2010년 연평도 포격 사건이었다. 그러나 국방부 당국자의 설명과 달리 우리 군은 북한군의 포사격과 우리의 대응 사격을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굳이 공개하지 않았다. 주민을 대피시키지 않은 건 물론이다. 5일처럼 남북의 포사격이 있을 때마다 주민대피령을 내린다면, 서해 5도 어민들은 어떻게 마음 편하게 조업을 할 수 있겠나.
우려되는 해동기 이후 '격랑'
이제 해동기가 되면 남북의 해안포 사격으로 서해가 다시 시끄럽게 됐다. 윤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인 2022년 3월 북한의 서해 창린도 해역 해안포 발사를 두고 "9.19 합의 위반"이라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해상완충해역 북방이었기에 합의 위반이 아니었다. 진정한 국방은 통수권자 이하 군 수뇌부가 밤잠을 설치며 대비할지언정 국민은 편하게 생업에 종사할 수 있어야 완성된다. 시도 때도 없이 국민을 불안케 하는 국방은 하류 중의 하류다. 다가오는 4월 총선과 무관하기를 바랄 뿐이다.
그렇지 않아도 서해는 9.19 합의 파기 뒤 충돌 가능성이 높아진 곳이다. 제1연평해전(1999), 제2연평해전(2002), 천안함 침몰(2010)에 이어 연평도 포격이 발생했다. 이날 남북의 해안포 사격과 주민대피령 발동은 '9.19 없는 서해'의 앞날을 보여준다. 군사적 충돌의 안전장치를 먼저 해체해 놓고 애먼 일선 장병들에게 "즉, 강, 끝(즉시 강력하게 끝까지 응징)" 구호를 외치게 하는 것은 국민 우롱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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